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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심판 결정문을 보며

등록일 2017-03-15 02:01 게재일 2017-03-1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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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는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3년, 박근혜 정부 4년, 유신체제로부터 40년의 시간을 단 21분으로 압축한 한편의 드라마였다. 탄핵심판 결정문이 군더더기 없는 명문이었기에 속전속결로 진행될 수 있었다. 현학적이지 않고 과도한 수사도 없었다.

헌재는 “성실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성실한 직책 수행의무 같은 추상적 의무규정의 위반 이유로 탄핵 소추하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세월호 구조 실패를 탄핵 사유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다수가 느끼는 분노일지라도 상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은 논제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법의 준엄함을 보았다. 성실한 직책 수행을 못했다는 것이 탄핵 사유가 될 경우, 나는 성실하게 일해도 회사가 불성실하다고 판단하면 일방적 해고를 당할 수 있다. 하루에 10시간씩 일한 업무일지를 보여줘도 소용없다. 회사는 내게 15시간 일하지 않았으니 불성실하다고 말할 것이다. 여소야대 정국마다 대통령의 불성실함을 트집 잡아 탄핵 소추안을 남발할 게 뻔하다.

세월호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불성실을 넘어 방치로 일관했다. 본인은 애썼다는데, 억지스러워도 이게 상대성이다. 법은 명확하게 나타난 구체적 사실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공학적 시스템`이다. 그래서 절대적이다. 탄핵 반대 세력들이 시비 걸 거리를 제거해버렸다.

헌재가 “피청구인의 일련의 언행을 보면 법 위배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헌법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며 대통령을 꾸짖을 때 통쾌함을 느꼈다.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말, 선생님이 불량학생에게 자주 하는 소리다. 이정미 재판관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으니 실형을 선고받은 `일진` 청소년들이 울며 용서를 빌어도 “안 돼. 안 바꿔줘” 하던 천종호 판사가 떠올랐다. 최고 권력자라고 하더라도 법이 혼낼 수 있다. 잘못을 추궁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더 엄하게 야단칠 수 있다.

“피청구인의 법 위배 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한 것은 법의 합리성을 잘 보여준 대목이다. 작은 살점 하나 떨어져나가더라도 몸속의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게 당연하다. 대통령 자리에 있어봤자 나라만 더 망치고 국민들 힘들게 할 뿐이니 짐 싸서 나가라고 명령한 것이다. 수술 후 완전 회복까지는 상처에서 고름도 끓고 불순물도 나오고 통증도 있다. 탄핵 불복 폭력 시위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암묵적 불복 메시지는 그런 차원으로 보면 된다. 좀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다.

가슴을 울린 구절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해 파면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안창호 재판관의 보충의견이다. 탄핵심판 결정문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절창이었다. 보수와 진보, 촛불과 태극기가 아니라 정의와 불의의 문제다.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 할 뿐이라는 신념의 표현이다. 부모가 어린 자식에게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고, “너보다 약한 친구를 괴롭히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헌재가 대통령에게 인간의 양심과 도덕, 정의를 가르쳤다. 불의를 자꾸만 이념으로 포장해 선동하는 자들은 어릴 적 부모님의 가르침을 되새겨야 한다. 불의는 어떻게 해도 불의일 뿐이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무겁고 찬란한 한 문장을 읽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퇴장한 이정미 재판관이 황야의 총잡이처럼 보였다.

헌재 판결에 승복한다는 한마디 말만 해도 집으로 가는 길이 평탄할 텐데, 스스로 질척이며 진창을 걸어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과 상반된다. 정의는 잘 닦인 길이고 불의는 시궁창이다. 어디로 다닐지는 본인 선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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