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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등록일 2017-04-26 02:01 게재일 2017-04-2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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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영재포항예총 회장
“이 일만 마치고는 떠나야지….”하는 결심을 되풀이하였으나 번번이 여의치 않아 마침내는 만사를 젖혀두고 우선 떠나고 봐야겠다는 작정을 했다. 양말 몇 개와 세면도구만 챙긴 조그만 종이가방 하나를 달랑 들고 나서고 보니 이토록 간단한 일이 어찌 그리 어려웠던가 싶어 오히려 의아할 지경이었다.

여행! 어떤 이는 여행을 익숙한 지겨움의 탈출이며 매력적인 낯설음과 조우하는 일이라 하였고, 옛 어른들은 `독서만권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를 군자의 덕목이라 하여 독서를 통한 지식이나 지혜의 습득과 여행을 통한 체험의 중요함을 같은 비중으로 생각하였다. 어쨌거나 여행은 개인적인 힐링을 위해서도 중요할 뿐 아니라 보다 큰 안목을 갖추기 위하여 꼭 필요한 컨설팅이기도 하다. 그만큼 여정에서 얻어지는 체험이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번 여행은 전혀 다른 의미가 있었으니, 어떤 큰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선언적인 세레모니의 의미가 강한 것이었다. 더 늦기 전에 소원이던 그림에 푹 빠져보고 싶어서 매일 아침 출근시간에 작업실로 출근하리라 결심하고 직장을 그만두었으나 막상 퇴직을 하고 한 달이 넘도록 붓은 잡아보지도 못하고 이런저런 일들에 휘둘렸으니 뭔가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였고, 스스로에게 새로운 다짐을 하는 의미로 여행을 선택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퇴직을 하면 직장생활에 고생한 보상으로 해외여행 한 두번은 기본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세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다기보다 아직도 내게 그런 여유는 없다. 시간적 여유도 경제적 여유도 넉넉지 않은 사람이 굳이 여행을 결심한 데에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선언적인 행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며, 그래야 제대로 붓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젊은 시절에도 할 일은 늘 많았고 바빠서 정신없이 사느라 전람회 날짜가 코앞에 다가와서야 비로소 다급하게 작업실을 찾았고, 작업실에 가서도 붓부터 잡는 게 아니라 먼저 빗자루를 잡는 묘한 성격이었다. 먹고사느라 그토록 소원이던 그림 그리는 일에 충실하지 못했으니 더 늦기 전에 이제는 그 일을 해야겠고, 이 여행은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붓을 잡기 위한 의식의 의미가 가장 강한 것이었다.

길을 떠나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묘한 감정과 함께 무작정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전에도 몇 차례 다녀서 제법 익숙한 지리산과 실상사, 가까운 벗이 있어서 유달리 정이 가는 유자의 고장 고흥, 내친김에 고흥반도의 끝까지 내달려서 처음으로 만난 소록도의 생경함 등 반가움과 낯설음이 교차하는 여정이었다. 남쪽 바다는 어찌 그리 고요하며 소록병원 초입의 솔숲은 그 많은 사연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리도 덤덤하게 서 있던지…. 자연과 예술이 하나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허겁지겁 사는 동안에도 긴 세월동안 한결같았을 솔숲이며 바다, 찾는 사람들은 각자의 귀로 제각각 다른 자연의 이야기들을 들었으리라. 모든 것이 다 익숙하기만 하면 영원히 정체할 것이며, 모든 것이 다 낯설기만 하면 영원히 방랑하게 되리라. 낯선 장소와 다른 문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기 때문에 설레는 것이며, 나와 친숙한 그 무엇이 또한 함께 존재하므로 여행은 가능한 것이다.

명나라의 서예가 동기창은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걸으면 가슴속의 온갖 더러운 것이 제거되고 산수의 경계가 절로 만들어져 손 가는 대로 그려내니 이것이 바로 산수의 전신이다.”라고 했다.

시대를 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행을 하는 것`은 문기(文氣)를 얻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독서로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고, 여행하면서 겪은 다양한 경험과 견문을 얻어야 비로소 미망에서 깨어나 창작의 길로 향하는 바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봄이다. 우리는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으며, 허겁지겁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가오는 연휴에는 가까운 곳이라도 나들이를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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