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이다. 전쟁이 발발한 지 어언 67년, 그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고 곳곳에 남아 있다. 내 주변에는 6·25때 돌아가신 부친의 유골을 찾아 헤매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도 있다. 일전에 6·25특집 대중가요는 우리 세대의 심금을 울려 주었다. 가량 잎이 떨어지는 `전선의 달밤`, 북에 둔 누이를 그리는 `굳세어라 금순아` 남편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 등은 아직도 우리의 귓전을 울려 주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 6살의 가난한 소년은 전쟁의 의미도 알지 못했다. 소년은 조용한 산골 동네 앞 사람들이 왁자지껄 밀려가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군용 트럭이 요란하게 지나가고 북한 인민군이 동네에 들어오는 장면을 신기하게 구경만 하였다. 시골 대나무 밭으로 둘러쳐진 소년의 집은 인민군 중대 본부가 되었다는 것도 철이 들어서 알았다. 마당에는 취사용 큰 가마솥이 걸리고, 대나무 밭에는 알 수 없는 통신 장비가 세워지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나이 어린 10대의 인민군들이 인절미를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그의 할머니는 할 줄 모른다고 손을 내 젓는 모습만 어렴풋이 기억한다.
군인들은 동네 앞 오동나무를 향해 따발총 연습을 하였고 어린 소년은 귀를 막고 그 군인 아저씨의 뒤를 즐겁게 따라다녔다. 동네 어른들은 점령군으로부터 치안대의 조직을 강요받고, 식량을 공출하는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철없는 소년은 아무 것도 모르고 위장된 차량과 전쟁무기만을 신기하여 만져 보았다. 마을 앞으로 연일 휘발유 냄새를 풍기는 차량이 지나가고 소년은 신기한듯 차량 뒤를 따라가기도 하였다. 해거름에는 행색이 초라한 피란민들이 밥을 얻어먹기 위해 동네에 들이닥치고, 소년은 저녁 늦게 동네 뒷산 굴속에 숨어 있는 고모의 저녁밥 심부름을 가끔 하였다. 이 어린 소년이 1950년 6·25 전쟁기의 나의 자화상이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소년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에 바빴다. 동네의 논밭, 도로 변에는 탄피가 이곳저곳에 늘려 있었다. 집안에 엿으로 바꿔 먹고 남은 탄피가 광주리에는 가득하였다. 동네 아이들은 마당에서 탄피 따 먹기 놀이를 즐겨 하였다. 약이라곤 없던 그 시절 배가 아플 때는 실탄을 분해하여 얻은 탄약을 조금씩 먹기도 하였다. 신기하게도 약효가 있었다. 아이들은 땅 위에 지도를 그려 놓고 사금파리를 손가락으로 3번 튕겨 땅 따먹는 놀이도 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흉내 내어 전쟁놀이도 했다. 요즘의 아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놀이 문화가 유행했다.
1953년 정전이 되고 부상당한 아저씨들이 전선에서 돌아왔다.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안고 우는 어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당시 행방불명된 아들이 돌아왔기에 어머니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전후 우리 동네에는 북에서 온 인민군 한 명이 정이 들어 북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그가 자진해서 남았는지 갑자기 떠나는 소속 부대에 합류하지 못했는지 알 길이 없다. 함경도 북부 회령이 자기 고향이라는 소리만 들었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당시 서울 공대 추가 졸업을 하려고 떠난 집안의 아저씨는 아직도 소식이 없다. 이제 나이가 구순을 넘었으니 운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6·25 전쟁 시 흥남부두에서 마지막 군함을 타고 남하한 피란민들이 거제도에 정착했다. 그 가난한 피란민의 아들이 대한민국의 19대 대통령이 되었다. 세계화 시대 국경마저 의미 없는 시대에 북한 김정은 정권은 아직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한반도에는 아직도 긴장과 대립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남북이 화해하고 교류하고 협력하면서 통일의 길을 찾을 때 전쟁의 상처도 아물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전향적인 노력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