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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에 생각하는 일본 그리고 우리

등록일 2017-08-14 20:35 게재일 2017-08-14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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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또 한 번 광복절을 맞이한다.

올해는 정부가 바뀌어 일본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과거사 문제에 대한 시각 조정, 방향 전환은 시급해 보인다. 과거에 얽매인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기억의 동물이고 역사적 존재다.

올해도, 앞으로도 과거사 문제는 한일 관계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1997년 2월의 경험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때 필자는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초청을 받고 여행길에 올랐다. 가이코 다케시라는 일본 르포 작가를 기념하기 위한 초청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1994년 비평가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무명에 책 한 권 내지 못한 상태였다. 젊어서였는지, 혈기 왕성해서였는지, 현실을 직시하는 문학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했고, 때문에 비평의 비판적 기능을 중시하고 있던 게 그때의 필자였다.

첫 일본 여행은 그런 필자를 바꿔 놓았다. 초청여행은 12박13일로 꽤나 길었고 후쿠오카, 교토, 오사카, 도쿄를 신칸센으로 이어가며 강연과 좌담 등 다양한 행사를 벌이게 돼있었다. 신인에게 과분하고 화려한 여행이었지만, 그때 필자는 한 가지 생각이 미치는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 것이라면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고 가꾸더라는 것이었다. 절이면 절, 거리면 거리, 책이면 책, 그들은 필자가 대학생 때까지 미워해 마지않던 침략자, 억압자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고 일신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교토의 절과 신사들을 보며 생각했다. 필자의 문학과 비평에 관해. `나는 등단 이래 작품들을 비판적으로 읽고, 우상을 해체한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해체·비판해야 할 전통이 있는지 탐구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도쿄의 한 신사는 아름드리 나무숲에 그윽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필자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크거나 우거지지 못했던 서울의 나무들을 생각했다. 도쿄의 나무들은 마치 문화적 전통을 가꾸는 데 있어 일본과 한국의 `격차`를 보여주는 듯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필자는 스스로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실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나 문학적 비판은 물론 의미가 있다. 그러나 비판의 토대를 점검하고,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을 먼저 세우고 가꾸는 작업이 더 필요하다. 내가 국문학자라면 한국 현대문학에서 가치 있는 것을 새롭게 찾고 다듬는 일부터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자 비평이라는 것의 의미부터 필자에게서 달라졌다. 비평은 비판이 주가 되는 평가 작업이 아니라 그것이 작품이든 작가든 “이것은 무엇이냐”고 묻고 그에 관해 생각하는 행위, 대상에 관한 이해를 높여가는 행위가 되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지, 어떤 관계를 수립해 나가야 하는지, 과거에 대해 그들이 옳지 못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슬기로운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일본이 나쁘다느니 그르다거니 따지는 중에도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그들의 실력은 놀라운 데가 있음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이에 착목하여 우리들의 삶과 문화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할 때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현재의 일본은 몇 가지 점에서 아직도 우리보다 앞서 있다.

첫째, 그들은 시민적 권리, 시민적 삶을 보장하는 데 있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공적인 권력은 시민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며, 노동3권 등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지 않는다. 어떤 정책을 시행하고자 할 때는 오랜 기간에 걸쳐 여론에 묻고, 외국에서의 자국민 보호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둘째, 그들은 개인과 개인, 시민과 시민 사이의 간격을 지키는데 철두철미하다 싶을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다. 예를 들어 어떤 가게에서든, 음식점에서든 손님과 점원은 서로 철저히 공대를 하며 예의를 지킨다. 철도역에서는 어떤 직원도 시민들의 요청이나 물음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 대학에서는 교수와 교직원이 서로를 향해 `최선의` 예절을 지킨다. 적어도 겉으로는 상하가 없고 갑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가 바로 일본이다.

어떤 사회든 겉과 속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들은 “일본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 “교활하다”고, “속이기 잘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은 원래 표면과 다른 이면을 갖게 마련이다. 개인들, 시민들이 서로의 간격을 지키고 예우하고 공대할 때 그 사회는 불필요한 불화, 증오, 적대를 가라앉힐 수 있다.

필자가 처음 일본에 가던 1990년대 후반과 비교하면 오늘날 한국은 많은 것이 달라지고 좋아졌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 한때 `극일`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일본의 자기 이해는 아직도 산 넘어 산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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