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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권위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등록일 2018-08-07 21:20 게재일 2018-08-07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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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희선숙명여대 교수·기초교양대학·정치학 박사
▲ 신희선 숙명여대 교수·기초교양대학·정치학 박사

사법농단 의혹이 커지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정권이 원하는 재판 결과로 뒷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대법원 판결들이 지배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미리 결론을 내놓고, 이를 합리화하는 법리를 찾는 식이었던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청와대에 정치적 코드를 맞추고 국회의원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언론을 활용하고자 전방위로 사법권을 남용하였다. 법의 해석과 판단에서 사법부의 독립성을 스스로 파기했다. 참여연대는 법원행정처를 ‘대법원판 기무사’로 비판했다. 무너진 사법부의 권위를 어찌할 것인가?

대법원은 삼권분립의 가치를 훼손하고 권력의 시녀를 자초하였다. 정무적 판단에 따라 일선 판사들의 개별 사건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정황이 드러나 사법부 판결에 대한 불신이 초래되고 있다. ‘국정운영협력’을 위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KTX 해고승무원 사건 등을 활용했다. 박근혜 정권의 뜻을 받들어 일제강제징용 재판을 고의로 지연하거나,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에 개입하여, 그 댓가로 법관의 해외공관 파견을 늘리고자 하였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는커녕 지배세력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은폐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법은 권위를 부여받은 힘이다. 자크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법을 ‘권위의 신비한 토대’라고 하였다. 법적 판단에 우리가 복종하는 이유가 바로 그 권위에 있다. 전직 대통령, 국회의원, 재벌도 잘못이 있으면 법적으로 구속시키는 것이 사법부의 권위고 힘이다. 정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강자와 약자를 공평하게 바라보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법원의 역할이자 의무다. 이처럼 사법부의 권위는 권력에 편향되지 않고 자유, 평등, 정의의 가치를 판결에서 구현하는데 있다. 정의의 여신 디케(Dike)가 함축하는 법적 공평성이 핵심이다. 살아있는 권력에 밀착하고 추종한 대법원의 정치화는 사법부의 정체성과 권위를 심대하게 훼손하였다.

시민들의 분노에는 법조 엘리트들의 거만한 시선도 한몫을 했다. 상고법원이 필요하다는 문건에서 “일반 국민들은 내 사건은 대법원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이기에, 상고법원이 어떠한 장점이 있는지 일반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여기서 ‘일반 국민’은 사회적 권력과 자본과 거리가 먼 서민들을 지칭한 것이다. 더구나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3심제의 권리를 ‘이기적’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민주적 정당성을 지닌 대법원 재판 청구권을 자신들의 업무과다의 원인으로 본 부박한 인식을 드러냈다. 법에 호소하는 국민을 고려하고 존중하는 공적 책임감을 찾기 어렵다. 마사 누스바움은 재판관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정확하게 상상하여 사려 깊게 측정하는 분별 있는 관찰자여야 한다”고 했는데, 그들은 ‘가면을 쓴 또 다른 권력’이었다.

몽테스키외가 쓴 ‘법의 정신’을 말하지 않더라도,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고 누구도 법 위에 설 수 없다. 그는 “민주정의 원리는 사람들이 평등의 정신을 잃을 때 부패한다”고 지적하였다. 법치가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면 삼권 분립은 이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법과 양심에 따라 제3자적 시각에서 균형감있는 판결로 말하는 존재가 사법부다. 그러기에 법정에서 중요하게 요구되는 덕목이 독립성과 공정성이다. 법은 물 흐르듯이 아래로 흘러가야 한다. 재판관 중심의 제도적 편의주의가 국민들의 권리보다 우선해서는 안된다. 고영한, 김창석, 김신 대법관이 퇴임하고 김선수·이동원·노정희 대법관이 취임하였다. 차제에 법조 엘리트들의 이익에 복무하느라 실종된 사법부의 권위가 바로 세워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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