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밤하늘
제주의 밤하늘은 장막과도 같아서 바람이 불면 별빛과 함께 흔들린다. 바람이 셀 때는 별빛이 한 뼘씩 흔들려 밤하늘이 검은 장막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확신하게 된다. 나는 둥근 의자에 누워 오래도록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은 바람에 쓸리듯 조금씩 조금씩 오른쪽으로 흐른다. 나는 간만에 찾아온 느긋한 휴가를 이 의자에서 모두 탕진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용운은 어떤 시에서 밤을 ‘올 없는 검은 비단’이라고 했는데(“이별은 미의 창조”), 그의 이런 시를 읽으며 질투를 할 때도 있었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의 조선을 어둠이라고 인식했던 사람이고, 그 어둠에 대항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밤을 ‘올 없는 검은 비단’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순히 밤에 대한 수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올’이란 비단의 끝을 이르는 말일 것인데, 검은 비단에 끝이 없다면 검은 비단을 걷어낼 방법은 없다. 그런 밤에 항거할 수 있는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고흐와 사이프러스 나무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1889.7)에는 바람과 별 사이로 바람이 흐른다. 별은 바람보다 더 깊은 곳에서도, 바람보다 더 얕은 곳에서도 빛나지만, 그 사이를 떠도는 바람은 별이 빛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 바람이 별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왼쪽에서 저렇게 크게 불어온 바람인 데도 어쩐지 사이프러스를 흔들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다.
고흐는 말년에 사이프러스를 자주 그렸다. 1888년 고갱과의 공동생활을 하던 고흐는 돌연 귀를 자르는 발작을 일으킨다. 이후 정신병 발작으로 입원과 퇴원을 번갈아 하던 고흐는 1889년 동생 테오에게 “나는 사이프러스의 매력에 푹 빠졌다. 나의 해바라기 그림처럼 지금까지 시도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의 그림을 창조해 낼 것 같기도 하구나.”라고 썼다. 고흐는 실제로 “별이 빛나는 밤에”를 비롯하여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 “두 여인과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등과 같은 제목의 작품을 수 점 그렸다.
사이프러스는 우리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는데 굳이 비슷한 나무를 찾자면, 식물학적으로는 측백나무에 가까우며, 잎은 향나무에, 전체적인 모양은 노간주나무를 닮았다고 한다. 사이프러스는 지중해와 같이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데, 사이프러스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로는 미국의 낙우송, 일본의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있다. 하지만 고흐의 사이프러스는 가지가 옆으로 퍼지지 않고 위로 솟구치는 나무다.
고흐는 이 나무를 ‘뾰족탑’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런지 고흐의 그림에서 이 나무는 교회의 첨탑보다 높고, 하늘보다 높다. 고흐의 사이프러스는 그가 그린 거의 모든 그림에서 화폭을 뚫고 자란다.
고흐가 이 나무에 집착한 이유는 어쩌면 해바라기처럼 하늘을 향해 자라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향해 정열을 불태우는 해바라기처럼 사이프러스 역시 하늘을 향해 불타듯 솟구쳐 오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고흐에게 하늘은 무엇이었을까. 해도, 달도, 별도 저렇게 둥근 빛을 회오리처럼 뿜어대는 저 하늘은 고흐에게 무엇이었을까.
△나무들
그러고 보니 하늘은 어디에든 있고, 하늘 아래 어디에서든 나무는 자란다. 사계리에서 서귀포의 유명한 빵집을 찾아가는 동안 빨간 열매를 단 저 나무도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저 나무는 무슨 나무지? 응, 먼나무! 저 나무는 뭔 나문데 저렇게 예뻐? 그래서 먼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썰’이고. 나무껍질이나 가지가 먹처럼 검다고 해서 ‘먹낭’이라 불리다가 ‘먼나무’가 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들을 만한 유래긴 하지만 글쎄?
‘낭’이야 나무라는 뜻의 제주도의 방언이니 ‘먹나무’가 ‘먼나무’로 바뀌었다는 것인데, ‘먹’이 ‘먼’으로 바뀐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니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감탕나무과인 이 나무의 껍질이나 잎을 보고 검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먼나무가 무슨 일로 먼나무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이 나무는 제주도 곳곳에서 자라며 꽃은 5~6월에 피고, 가을부터 겨울까지 붉은 열매가 맺힌다.
지난 주엔 학생들과 함께 공원에서 숲 학교를 열었다. 전문가를 초빙해서 공원에 있는 나무들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1시간 가량 수업을 진행하면서 우리가 본 나무의 종류는 스무 가지가 넘는다. 참누릅나무, 자귀나무, 은행나무, 자작나무, 계수나무, 스트로브 잣나무, 소나무, 칠엽수(마로니에), 신나무, 산딸나무, 물푸레, 능수버들, 감나무, 잣나무, 양버즘나무, 아카시아, 박태귀나무, 백당나무, 화살나무, 회양목, 측백나무 등등.
이렇게나 많은 나무들이 있다. 이름을 알기 전까지 나무는 그저 나무였으나 그 개별적 이름을 알고부터 나무는 통칭되지 않고 개별화된다. 그리하여 자작나무의 검은 수피나 화살나무의 날개와도 같은 수피를 보고 나무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하나의 눈에서 소나무 잎의 개수가 두 개인지 세 개인지에 따라 토종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으며, 계수나무의 열매 껍질을 보고 암나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나무를 감각하게 된다.
이러한 것 역시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르는 정치의 일종일 것이다. 이름을 알기 전엔 그냥 ‘몸짓’이었다고, 이름을 안 이후에는 ‘나에게로 와서’ 나의 ‘꽃’이 되는 것처럼(김춘수, “꽃”), 정치란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그저 그러한 알아챔과 알아채임이며, 이를 우리의 몸으로 감각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정치인이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 혹은 여론도 미치지 못한 것에까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이런 것들이 모두 ‘감성의 분할’과 궤를 같이한다.
△그녀와 나와 열무
이렇게 한가로운 여행은 처음이다. 여행을 할 때면 갈 곳이 많았다. 여기도 저기도 가야 했는데 이번 여행은 모든 것이 느긋했다. 렌터카 빌려 밥을 먹은 것이 오후 네 시께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망설이다 애월 해안 도로를 따라 달렸고, 숙소로 가기 전 ‘최마담네 빵다방’이라는 곳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보다도 빵보다도 좋았던 건 그곳에서 기르는 시베리안 허스키와 진돗개였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가방을 풀고 근처 ‘춘미향’이라는 곳에서 식사를 했다. 돌아와서는 “바흐 이전의 침묵”이라는 영화를 보고 잠들었다.
다음 날에는 늦게 일어나 숙소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올라와서 쉬었다가 오후에는 송악산엘 들렀다가 국수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서귀포시에 있는 ‘시스터즈’라는 빵집에서 크로와상을 몇 종류 샀다. 다섯 시에 숙소로 돌아와서 음악을 듣고, 늦은 저녁을 먹고,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를 봤다.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라는 책을 읽었다. 말 그대로 길을 잃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고, 길을 잃은 사람들이 길을 잃은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까지 읽었다. 이런 책은 내가 쓰고 싶은 책이었는데, 라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며 사온 빵과 귤을 먹었다. 빵과 귤은 그녀가 키우는 열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내가 열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있는데 열무만 없다고 하자, 그녀가 웃다가 말고, 올해로 열여섯 살인 열무가 죽어 정말 그런 상황이 오면 얼마나 슬플까라고 했다. 나는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자, 라고 했고, 그녀는 그래야지, 라고 말하며 나도 죽을 텐데. 라고 덤덤하게 덧붙였다.
죽음과 가까운 그녀의 말이 뼈를 때렸다. 정말 그녀가 죽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길을 잃은 것처럼 살겠지. 여행의 끝자락에서 슬펐다. 그녀가 오래도록 살아 나와 함께 이 삶을 헤쳐나가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