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자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선생은 명문의 후예답게 선비로서의 기상이 높았다. 이승만 정권의 국정농단을 보다 못한 그는 1951년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한 뒤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홀연히 권부를 떠났다.
이시영의 성명서는 신랄하다. “정부 수립 이래 지금까지 고위 직위에 적재적소 인재가 등용된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탐관오리가 가는 곳마다 날뛰어 국민 신망을 상실하고 정부의 위신을 훼손하고 국가의 존엄을 잃어 신생 민국의 장래에 암영을 던지고 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나랏일이 틀려도 시비를 거는 자조차 없다”
권력 핵심을 향해 촌철살인의 명검(名劍)을 휘두르고 있는 진보 논객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와 살아있는 권력에 예리한 법치의 창끝을 들이밀다가 코너에 몰린 윤석열 검찰총장의 고난이 깊다. 좌파 인사들은 대체로 두 사람에게 ‘배신자’ 이미지를 덧칠하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 역사 속에서 자신을 발탁한 임금을 향해 ‘곧은 소리’를 펼치다가 수난을 당한 참 선비는 드물지 않다. 때로 그들은 역적으로 몰리기도 하지만, 역사는 그 인물에 결코 ‘배신자’ 딱지를 붙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나라에 충성했기 때문이다. 선비의 길, 공직의 길이 어찌해야 하는지는 역사에 다 나와 있는 셈이다.
진영을 불문하고 진중권의 한마디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그의 말에는 뭇 지식인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엄정한 선비의식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에는 천박한 패거리 의식에 찌들어 자기가 신봉하는 진영에 맞춤식 궤변을 줄기차게 상납하는 비겁한 곡학아세(曲學阿世) 무리와는 확연히 다른 뭔가가 있다.
법을 집행하는 검사 윤석열을 향한 진보 진영의 ‘배신자’ 논리는 사람에 충성해온 케케묵은 구시대적 폐습의 시궁창에 인식의 뿌리를 드리우고 있음을 스스로 반증한다. 현직 검찰총장 윤석열이 대권후보 여론조사에서 2위를 했다는 뉴스는 착잡하다. 구상유취한 진영논리 뻘밭 속에서 얼마나 우리 국민이 답답하고 갑갑했으면 그를 대안으로 떠올렸을까 짠한 심정마저 든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와 대니얼 지블렛 교수의 베스트셀러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 나오는 거의 모든 참상이 나라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시절에 진중권과 윤석열을 함부로 ‘배신자’로 낙인찍는 일은 가당치 않다. 비난하는 자들이야말로 비겁한 지식인이요, 민주주의의 배신자요, 역사의 죄인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신봉해온 사상이 오류로 판명 날 때, 소속한 집단이 끔찍하게 오염될 때, 제왕적 권력을 청산하기는커녕 오히려 황제적 권력을 휘두를 때 ‘좌충우돌’하면서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역사는 결코 ‘배덕(背德)’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법을 수호하려는 검찰총장이 매일 지하 주차장을 통해 출퇴근해야 하는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