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지난 들판에 일제히 벼가 팬다. 이곳은 다행히 홍수 비해가 없어 가을 태풍만 무사히 넘기면 풍년이 들 것이다. 작년 가을에는 벼가 익을 때쯤 두 차례나 태풍이 와서 벼가 눕거나 물에 잠겨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 그래도 식량 수급에 큰 지장이 없었던 것은 우리나라엔 그만큼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가뭄이나 홍수로 농사를 망치게 되면 굶어 죽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풍년이 들면 배불리 먹고 흉년이 들면 굶을 수밖에 없는 것이 농경사회 백성들의 애환이었다. 그러니 하늘을 쳐다보면서 살 수밖에 없었고 행여 하늘이 노할 짓은 삼가는 삶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져서 웬만큼 가뭄이나 홍수가 나도 농사를 아주 망치지는 않는다. 이 들녘만 하더라도 인근에 제법 큰 저수가 있고 들판 곳곳에 관정을 뚫어 놓아 지하수를 퍼 올릴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하늘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린 시절에 보릿고개를 넘어온 사람들은 벼가 패는 들판을 바라보는 감회가 무덤덤할 수 없을 것이다. 배를 곯아본 사람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다행한 일이 없다는 걸 잘 안다. 불치의 병이나 큰 사고를 당한 경우가 아니라면 굶지 않고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족할 조건이 된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10억이 넘는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거나 아사하는 실정이고, 우리나라보다 훨씬 자원조건이 나은데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나라도 많다고 하니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얼마나 다행하고 자부심 가질 일인가.
외국인의 눈에 비친 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직전의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더럽고 게으른 나라 중 하나였다고 한다. 민족의 본성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는 당파싸움에다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은 잘 살아 보려는 희망도 의욕도 잃어버린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를 통째로 남의 손에 넘겨주고 말았다. 식민지가 된 것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친일파 타령을 하는 것도 같잖은 정치적 수작일 뿐이다.
올해도 북한의 홍수피해가 심각한 것 같다. 가뜩이나 식량난이 극심한데 곡창지대가 침수되어 또다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란다. 기아에 허덕이는 북녘 동포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 아프고, 핵폭탄을 끌어안고 백성들을 사지로 몰고 가는 김정은 일당에 대한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포악한 독재자는 어떻게든 제거하는 수밖에 달리는 방도가 없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할 수는 없다면, 암암리에 김일성 일가의 마수(魔手)를 종식시키는 일에 모든 지혜와 역량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권은 엉덩이에 뿔난 망아지처럼 거꾸로만 가고 있다. 저들의 이념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북한 주민들의 생존이나 인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김일성 일족의 체제유지를 돕지 못해 안달을 하는 꼴이다. 머지않아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겠지만, 그 때까지 기다리기엔 북녘 동포들의 형편이 너무 참담하고 절박하다. 속절없이 또 가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