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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가

등록일 2021-03-09 19:58 게재일 2021-03-1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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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경<br>동화작가
최미경동화작가

3월은 꽃을 볼 일이다. 노오란 풍년화와 복수초를, 솜털 보송한 노루귀와 붉은 매화를 눈에 가득 담을 일이다. 지난겨울 잘 견디고 여린 줄기를 밀어 올려 꽃잎 하나하나를 피워 낸 저 생명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혹여 우리가 무심히 꺾었던 누군가의 말, 누군가의 희망이 아직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시간이다.

4월과 5월은 작은 열매가 맺히는 나무를 심을 일이다. 산사나무와 명자나무를, 앙증 맞은 앵두나무와 올망졸망한 산수유나무를 양지 바른 뜨락에 심을 일이다. 한 두 계절 지나 반드시 찾아올 열매들의 약속에 감사할 일이다. 혹여 오래전 마음에 심어놓고 잊었던 씨앗을 찾게 된다면 그 간절함의 약속을 지켜낼 시간이다.

6월은 아이의 손을 잡고 공원을 거닐 일이다. 아이의 걸음에 폭을 맞추며 아이가 건네는 말과 웃음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말 일이다. 그와 함께 걷는 동안 우리는 분명 우리가 보냈던 지난 시간 안에 아이와 같은 모습이 있음을 알아챌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풀지 못했던 생의 조막만한 비밀상자를 열게 될 시간일 것이다.

7월과 8월은 냇가에 발을 담그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일이다. 잠시 하던 일은 옆으로 미뤄놓고 바람 좋은 그늘에 앉아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와 그 흐름의 방향을 넋을 놓고 볼 일이다. ‘하루’는 늘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그 하루 온전히 나에게 쓰이던 시간은 얼마나 되었던가. 내 마음이 흐르는 소리와 방향에 귀 기울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9월과 10월은 오래 같이 한 사람들과 가을의 밥상에 둘러앉을 일이다. 안타깝고 힘들었던 지난 시간을 버티게 해주었던 것은 바로 사람이고 인연이었을 일이다. 상처로 남아있는 이, 슬픔을 나눌 이가 있다면 초대할 일이다. 그리하여 서로를 채워가며 밥을 나눌 일이다. 함께 먹는 밥상은 마음의 약상이 될 시간일 것이다.

11월은 밤바다에 뜬 별을 셀 일이다. 찬 모래를 맨발로 밟고 밤바다를 바라보면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우주에서 가장 외로운 한 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점을 위해 여태껏 달려왔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주저앉을 수도 있다. 그때 우리가 응시해야 하는 것은 바로 밤바다에 내려온 별이다. 수 천 년을 달려 우리 눈앞에 내려온 그 별을 세어 보며 차고 매서운 바닷바람에 맞선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애틋한지 느껴 볼 시간이다.

12월에는 말이다. 올 한해 누군가 아프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누군가 쓸쓸하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누군가 환하게 웃었음에 기뻐할 일이다. 그리고 우리를 잠시 속상하게 했던 누군가와 우리를 잠시 혼란에 빠뜨렸던 누군가에게도 감사할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스스로 기뻐할 일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바로 3월이 막 시작되는 이 봄의 초입에 올 한 해를 위한 기도를 한다면 말이다. 종교와 피부색, 성별과 나이를 모두 떠나 그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위한 기도를 한다면 작년 한 해 우리가 절망했던 그 순간순간들을 올해는 훌훌 털어버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나는, 지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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