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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언어는 또 다른 감옥인가

등록일 2021-03-22 19:49 게재일 2021-03-2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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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로빈슨 크루소’는 다니엘 디포가 1719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이 김춘수의 시 ‘꽃’은 ‘이름’이라는 언어를 매개로 인간이 외부 세계의 대상을 어떻게 의미로 바꾸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철학적인 시다. 내가 언어를 통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이미 ‘몸짓’으로 존재했던 그는 내가 이름을 불러줄 때, 나에게로 와서 의미가 된다.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살아가면서 언어를 매개로 사고를 형성하고, 그 언어를 매개로 외부 세계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가진 인간의 유일한 특권일지도 모른다. 오랜 기간 동안 인간에게 언어와 문학이 중요했던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눈앞에 단지 실체를 가진 대상들의 모음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언어를 통해 그 대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인지하게 될 때야 비로소 자기 세계를 대하는 주체이자 주인이 될 수 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아이가 자기 눈에 들어오는 대상들을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며,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새롭게 이름 붙이기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어엿한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미 모든 대상들에 붙여진 이름만을 알게 되는 것이 그러한 과정이 아니다. 인간은 언어를 배우면서 또 언어를 통해 눈앞의 대상을 그 언어 속에 가둔다.

다니엘 디포(1660~1731)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는 유럽의 세계 저편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 알아내기 위해, 모험을 떠나고 돌아와 여행기를 썼던, 서구인의 세계 인식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영국인인 크루소는 모험을 떠났다가 바다에서 난파되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아메리카 대륙 오리노코 강 부근 무인도에서 홀로 살다가 극적으로 구출해 돌아온다. 세계의 전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던 시대, 서구 유럽인들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대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는 바로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을 추동한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든 알아내고, 결국 그 대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는 그 공포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식인종에게 먹힐 뻔한 원주민을 구해주고, 그를 만난 날이 금요일이었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에게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다니엘 디포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1719년 ‘로빈슨 크루소’를 써서 명성을 얻었다.
다니엘 디포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1719년 ‘로빈슨 크루소’를 써서 명성을 얻었다.

인간이 언어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대상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그저 단순하고도 당연하며, 절박한 인식의 논리는 그 이름을 붙여준 대상을 언어의 감옥에 가둔다. 로빈슨 크루소가 붙인 ‘프라이데이’는 과연 그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것이었을까. 아니, 맞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가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그를 구속하는 행위는 아닐 것인가.

인간이 사회에서 한 명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언어를 통해 대상의 의미를 인식하고, 새롭게 드러나는 대상의 의미를 규정해나가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과정일 터이지만, 모두가 서로를 규정해나가기 시작한다면,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의 언어의 감옥에 갇히게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우리에게는 서로의 언어가 쌓이고 소통하는 공론장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언어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희소한 특권이던 시대에서 이제 모두가 언어를 능숙하게 다루고, 자기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에, 이러한 대상을 규정하는 언어의 윤리는 더욱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린다.

디포우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분명 흥미로운 모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언어를 가진 인간 주체의 자기 확인의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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