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해양문화<br/>바다 음식 - ⑤ 밥식해
삭은 혀끝이 거머쥘 감칠맛 어디 있겠냐고/어머니, 할머니, 할머니의 그 할머니/구황하려 매운 손끝으로 버무려 온 물가재미식해/한 젓가락 듬뿍 퍼 올리고 싶다/흔하디흔한 물가재미 큼직큼직 채 썰어/무며 조밥, 마늘, 고춧가루에 비벼 간 맞춘 뒤/오지에 담아 아랫목에 두면 며칠 새/들큰새콤 퀴퀴하게 삭아 있던 밥식해,/왜 오묘함은 가슴과 사귀는 좁쌀 별인지/밤새워 푸득거리는 눈발 한 채여도 안 서럽던!
- 김명인, 「물가재미식해」 전문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게 하고, 앉아서도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공간이 있다. 나에게는 통영의 동피랑이 그런 곳이다. 10년 넘게 살고 있지만 동피랑은 날마다 설레고 날마다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이번 포항 여행에서 그런 공간을 또 하나 발견했다. 포항 여행자들은 바다를 보기 위해 구룡포나 호미곶을 찾지만 솔직히 나는 포항 시내 죽도시장 부근 동빈내항 풍경이 더 매력적이었다.
죽도시장이 가까이 있기도 하지만 동빈내항이 내려다보이는 숙소에서는 주야간 풍경 모두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인공과 자연의 조화로움이 더없이 편안하고 좋았다. 어선이 들고 나는 밤의 항구는 여행자의 노스탤지어를 한껏 자극했고 조명이 들어온 포스코의 풍경은 어느 먼 나라에 와 있는 듯한 흥취를 자아냈다. 그야말로 여권 없는 해외여행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니 아마도 포항 사람들은 동빈내항의 그토록 아름다운 밤 풍경을 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 풍경이 바라다 보이는 숙소에서 묵을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꼭 멀리 가야 여행이 아니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집 떠나면 다 여행이다. 포항 여행자들만이 아니다. 포항 사는 사람들도 동빈내항이 바라다 보이는 숙소로 가끔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동네 여행자. 내가 사는 동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밥·생선 넣어 발효시켜 먹는 향토음식 밥식해
포항서는 가자미·횟대 등에 쌀밥 넣어 만들어
얼큰하게 매우면서도 달착지근하고 산뜻한 맛
모두 즐길 수 있도록 재료에 변화 줘도 좋을 듯
함경도부터 경주까지 동해안 사람들이 즐겨 먹어
포항에서 여러 날 머물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동빈내항과 죽도시장의 풍경이 사무치게 그립다. 아무래도 포항과 사랑에 빠진 듯하다. 언제 또 동빈내항 부근에 방 하나 잡아 놓고 한 열흘쯤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죽도시장으로 출근해 맛난 시장 음식을 안주로 주야장천 술만 마시다 와도 좋을 것 같다. 개복치며 두치며 꽃새우회며 청어회며 말똥성게며 꽁치 다대기며 횟대기 밥식해며 무엇보다 밥식해의 그 쿰쿰하고 아련한 맛이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죽도시장은 맛의 천국이다. 포스코가 포항의 척추라면 죽도시장은 포항의 심장이 아닐까. 죽도시장은 어시장, 농산물시장, 죽도시장 등 세 개의 시장이 동심원을 그리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1만8천760㎡ 면적에 25개 구역, 2천500여 개 점포가 들어서 있는 동해안 최대의 전통 시장이다. 시장 어딜 가나 유혹하는 맛들이 널려 있으니 죽도시장은 미각의 제국이다.
동해안 사람들의 소울 푸드인 밥식해. 울진 태생의 김명인 시인에게도 식해는 영혼을 따뜻하게 배불리는 음식이었다. 밥과 생선을 넣고 발효시켜 먹는 요리인 식해는 가장 토속적인 동해안 음식이다. 식해는 함경도 북청부터 강원도 속초, 경북 울진, 포항, 경주 감포까지 동해안 사람들이 두루 즐긴다. 밥을 넣고 발효시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밥식해라고도 부른다. 함경도나 강원도에서는 조밥을, 경상도에서는 쌀밥을 주로 넣어 발효시킨다. 포항에서는 쌀밥을 넣어 만든다. 포항의 밥식해는 대체로 흰살 생선인 가자미, 횟대, 오징어 등을 넣어 만들지만 전갱이나 꽁치 같은 등 푸른 생선으로 만들기도 한다. 백고동으로 만든 식해도 있다. 밥식해는 젓갈처럼 장기간 발효시켜 먹는 음식이 아니다. 그래서 젓갈 해(醢)자를 쓰지만 실제로는 그리 짜지 않다.
간성현감을 지냈던 택당 이식이 쓴 ‘간성지(杆城志)’에는 연어, 황어, 은구어(은어), 전복, 홍합식해도 등장한다. 요즘은 바다에만 서식하는 어류를 주로 쓰지만 과거에는 강과 바다를 오가는 어류가 풍부해 식해의 재료가 됐던 것이다. 이 식해들은 왕실로 진상되기도 했다. ‘간성지’에 따르면 동해안에서 젓갈은 주로 생선알로 담았고 생선살은 주로 식해를 담아 먹었다. 식해 담는 법은 동해안 어느 지역이나 엇비슷하다. 먼저 막 잡은 생선의 내장을 제거하고 물기를 쪽 뺀 뒤 잘게 썰어 소금으로 간을 하고 엿기름을 넣어 하루쯤 1차 발효시킨다. 여기에 쌀을 쪄서 고두밥을 만든 뒤 식힌다. 무는 채 썰어서 소금에 절인다. 절인 무채의 물기를 짜낸 다음 고춧가루, 마늘 등의 양념을 만들어 가자미에 넣고 버무린다. 양념된 가자미와 고두밥을 섞어서 비빈다. 그런 다음 따뜻한 방에서 2∼3일 발효시키면 먹을 수 있다.
포항의 원조 밥식해는 횟대기 밥식해
17세기 초 이 땅에 고추가 처음 들어오기 전까지는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밥식해를 만들었다. 제사 음식에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이유는 귀신이 붉은색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 조상들은 귀신이 붉은색을 싫어하다는 속설을 믿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 과거에는 어떤 음식에도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고춧가루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제사를 모셨고, 제사 음식에는 당연히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 제사 음식에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것은 귀신 때문이라기보다 그 오랜 전통을 따른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포항 지역 제사상에도 여전히 흰 밥식해가 올라간다. 식해는 여름에 담글 때는 무를 넣지 않는다. 그래야 물이 생기지 않는다. 빨리 삭히려면 엿기름을 넣지만 천천히 삭혀 먹으려면 엿기름을 넣지 않는다.
포항의 원조 밥식해는 횟대기 밥식해다. 횟대기의 학명은 대구횟대다. 포항에서는 홋대기라고도 부른다. 횟대기는 성대(달갱이)처럼 날개 같은 옆지느러미가 달려 있다. 횟대기는 대구횟대, 가시횟대, 빨간횟대(홍치) 등이 있는데 최고로 치는 것은 대구횟대다. 횟대기는 생선살이 유난히 찰지고 쫄깃한 식감이 좋지만 요즘은 값이 비싸 쉽게 접하기 어렵다. 그래서 죽도시장에서도 근래는 가자미식해가 더 많이 만들어진다. 과거에는 애경사에도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지금도 추석이나 설 명절에는 집집마다 밥식해를 만든다.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향토 음식 편’(1984)에는 가자미식해를 동해안 향토 음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가자미식해는 얼큰하게 매우면서도 달착지근하고 산뜻한 맛이 일품인데, 12월부터 3월 초에 나는 가자미로 담아야 맛이 좋고, 꼬리 쪽에 가느다란 노란 줄이 있는 참가자미로 담그면 더욱 좋다”고 했다. 조선 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가자미, 청어, 잉어, 밴댕이, 크고 작은 새우, 오징어, 문어, 꼴뚜기, 각종 조개와 굴, 홍합, 가자미, 북어, 멸치 등 모든 생선들로 젓갈을 담글 수 있다고 소개되는데 ‘생선식해[諸魚食醢’ 항목의 가자미식해 만드는 법은 이렇다.
“흰 멥쌀밥에 엿기름과 누룩가루를 넣어 잘 섞고 물도 몇 종지 넣어 발효시킨다. 그런 다음 가자미를 꺼내 물기를 제거하고 햇볕과 바람에 잘 말렸다가 잘게 썰어서 다시 소금에 버무려 두었다가 익은 다음에 먹는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조리법이다. 또 청어나 잉어를 이용해 식해 만드는 법도 등장한다.
“청어 혹은 잉어를 세 손가락 너비로 잘라 깨끗이 씻는다. 생선 5근에 볶은 소금 4냥, 끓인 기름 4냥, 생강과 귤껍질 채 0.5냥, 고춧가루 1분, 술 1잔, 식초 반잔, 파 채 2줌, 밥을 조금 섞어 함께 골고루 잘 섞은 후 도자기병에 단단히 눌러 넣는다. 다음은 대나무 잎으로 입구를 촘촘하게 덮고 대나무 꼬챙이를 꽂아 고정시킨다. 5~7일이면 숙성된다.”
1680년경에 저술된 조리서 ‘요록(要錄)’은 식해에 산초를 넣으면 맛이 좋다고 전한다.
“물고기에 소금을 좀 짜게 쳐서 2~3일 밤 재운 후, 깨끗하게 씻은 다음 눌러서 짠 물을 뺀다. 현미 쌀로 죽을 쑤고 절인 생선에 섞어서 항아리에 담아 놓고 삭힌 후에 죽을 씻어낸다. 다시 백미로 밥을 지어서 섞어 담가 놓으면 색이 변하지 않고, 산초를 넣으면 맛이 좋다.”
여기서는 향신료인 산초를 넣어 식해를 더욱 고급화했음을 알 수 있다.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도 식해 만드는 법이 등장한다.
“큰 생선 1근을 토막으로 잘라서 물에 닿지 않게 깨끗한 천으로 닦아 물기를 말린다. 여름철에는 소금 1냥 반을 쓰고 겨울철에는 소금 1냥을 써서 절인다. 한동안 지나서 절인 생선에서 소금물이 흘러나오면 다시 물기를 닦아낸 다음 생강 채, 귤피 채, 시라, 홍국, 찐밥과 파기름을 한데 넣고 골고루 섞어서 자기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고 대나무 잎으로 덮고 대꼬챙이를 꽂아둔다. 항아리를 뒤집어 봤을 때 소금물이 모두 없어졌으면 생선이 숙성된 것이다. 또한 본래 생선을 절였던 소금물에 담그면 고기가 쫄깃하고 부드럽다.”
요즘 식해는 동해안의 음식 문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식해 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고 해산물뿐만 아니라 돼지, 꿩 등 육류나 식물을 이용한 식해도 많았다. 의관 전순의가 1459년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요리책이다. 이 책에는 생선, 양, 돼지껍질, 도라지, 죽순, 꿩, 원미(쌀을 굵게 갈아 쑨 죽) 등 식해 조리법이 일곱 가지나 소개되어 있다. 포항이 식해 문화를 더욱 널리 계승하려면 생선 식해에 한정하지 말고 육류와 식물을 이용한 식해도 개발해 보는 것이 어떨까. 채식주의자들이 많아진 시대이니 포항의 농산물로 만든 식해 또한 널리 사랑받게 되지 않을까 싶다.
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