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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기획] 포항의 8615명 외국인은 오늘의 도시를 지탱하고, 내일의 한국을 묻는다

‘50만 도시’의 경계에 선 포항. 이 숫자는 단순한 인구 통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도시의 행정 권한과 위상을 가르는 기준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준을 지탱하는 전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올해 10월 기준 포항에 거주하는 외국인 8615명이 없다면 이 도시는 지금의 구조를 유지할 수 있을까. 내국인 감소와 고령화가 누적되는 현실에서 외국인의 존재는 통계를 넘어 도시 지속 가능성과 직결되는 요인으로 부상했다. 포항시는 최근 몇 년간 인구 감소가 고착화되며 50만 명 회복이 점점 더 어려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분석한다. 인구절벽 충격이 현실화하는 지방 중핵도시 포항에서 외국인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짚어본다. <글 싣는 순서> 1. 포항의 8615명 외국인은 오늘의 도시를 지탱하고, 내일의 한국을 묻는다 2. 포항에 산다는 것, 외국인의 하루 3. 환영과 불안 사이, 완벽한 이민은 없다 - 다문화 도시로 넘어가는 포항의 ‘감정 지도’ 4. 정책도 다문화로 - 도시의 변화 속도를 제도가 따라가고 있는가 5. 이민 시대, 지속 가능한 길을 찾다 ◇ ‘8615명’의 존재, 도시를 지탱하다 올해 10월 기준 포항시 총인구는 49만 7578명으로 이 가운데 내국인은 48만 8963명, 외국인과 외국국적동포는 8615명이다. 외국인은 전체의 1.7%에 불과하지만 인구 구조 변화 속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의미는 단순 비율로 설명되기 어렵다. 지난해 말 50만 명에 근접했던 포항의 인구는 1년 새 약 2600명 감소해 49만 명대 중반으로 내려왔으며 자연 감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외국인 인구만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며 전체 감소 폭을 일부 상쇄하고 있다. 세대 구조 역시 변화가 뚜렷하다. 포항의 총 23만 8324세대 가운데 1인 세대는 9만 9719세대로 41.8%를 차지하고 세대당 인구는 2.05명에 머문다. 평균연령은 46세이며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11만 5939명으로 전체의 23.5%를 차지해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이처럼 청년층과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는 구조 속에서 외국인은 일부 노동인구 공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산업 현장에서 외국인의 비중은 더욱 중요하게 나타난다. 수산물 가공업, 제조 하청업체, 항만·물류업, 농축산업, 건설 보조 등에서 외국인 의존도는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으며 현장에서는 “외국인이 빠지면 공정이 지연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실제 수산물 가공업체는 일정 규모의 외국인 인력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도계·선별·가공 라인의 가동률이 즉각 낮아진다고 설명한다. 항만 물류 작업 또한 배정 인력 변화가 처리 속도로 이어지는 만큼 외국인 노동력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다. 외국인은 단순히 부족 인력을 보충하는 수준을 넘어 도시 기능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데 기여하는 실질적 축으로 자리 잡았다. ◇ 외국인이 빠진다면 외국인을 제외한 포항의 모습을 가정하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영역은 도시의 행정적 지위다. ‘지방자치법 시행령’ 제118조는 주민등록인구에 외국인등록과 거소 신고 외국국적동포를 합산해 2년 연속 50만 명 이상을 기록할 때 대도시로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현재 포항은 주민등록 인구만으로는 기준에 미달하며 외국인을 포함하더라도 50만 명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히 외국인 8615명이 제외될 경우 총인구는 48만 명대 중반으로 감소해 향후 50만 회복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대도시 지위는 단순한 명칭을 넘어 도시가 행사할 수 있는 정책 자율성과 직결된다. 행정안전부는 2021년 인구 50만 이상 도시를 대상으로 도시계획시설 결정, 공원녹지 기본계획 수립, 주택건설사업 승인, 노인복지시설 설치 등 27개 사무를 지방정부에 이양했다. 이 기준 충족 여부에 따라 정책 집행 범위가 달라지는 만큼 외국인 인구는 행정 체계의 안정성을 지탱하는 현실적 변수로 작용한다. 산업 현장에서의 영향은 더 직접적이다. 고용노동부 ‘2024년 외국인 고용현황’에 따르면 제조업 외국인 근로자 비중은 전국 10.6%, 경북 12.4%로 나타났다. 철강·가공·물류 산업이 밀집한 포항은 본 공정보다는 협력업체와 연관산업에서 외국인 비중이 높다는 것이 산업계의 공통적인 설명이다. 외국인 인력이 빠질 경우 생산라인 가동률 저하, 항만 물류 지연, 농축산업 계절 작업 차질, 수산 가공량 감소 등 공급망 여러 지점에서 가시적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지역 고용과 소득, 소비에 영향을 미치며 중소 제조업체와 수산업 기반 약화로 이어질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인구 구조 측면에서도 외국인의 역할은 중요하다.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중이 이미 23.5%를 넘는 가운데 외국인은 대부분 20~50대 노동 연령층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이 이탈하면 생산가능인구는 추가로 줄고 고령층 비중은 더 두드러지게 된다. 이는 도시 활력 약화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역 재정 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외국인 인구는 포항의 산업, 인구 구조, 행정 지위를 동시에 떠받치는 핵심적 요소로 기능하고 있다. ◇ 그러나 ‘유입’만으로는 부족하다 외국인 유입은 도시 활력의 중요한 변수지만 단순히 인구가 늘고 줄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인구절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법무부 ‘2024 체류 외국인 통계’에 따르면 전국 체류 외국인은 약 233만 명이며 이 중 60% 이상이 체류 기간 3년 미만으로 분류되는 단기 체류자다. 이는 장기 정착까지 이어지는 비율이 높지 않음을 보여준다. 경상북도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법무부 통계에서 경북 체류 외국인의 52.1%가 고용허가제 근로자(E-9)로 집계되며 E-9 비자의 기본체류 기간은 3년, 연장해도 4년 10개월을 넘지 않는다. 즉, 이 인력은 구조적으로 ‘장기 정착’보다는 ‘기간제 노동력’의 성격을 갖는다. 정착 기반 부족 문제는 삶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여성가족부 ‘2023 다문화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다문화·이주민 가구의 27.8%가 “주민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고 응답했다. 단기 체류 비중이 높고 지역사회와의 접촉면이 제한적일수록 공동체에 편입되는 속도는 늦을 수밖에 없다. 이는 외국인이 지역에 유입된다는 사실만으로는 도시의 인구 구조와 사회적 통합을 동시에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외국인 유입이 산업 현장의 인력난을 일시적으로 완화할 수는 있지만 정착을 뒷받침하는 주거·의료·교육·언어·지역사회 교류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으면 장기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포항이 지속 가능한 도시로 남기 위해서는 외국인이 ‘일하러 오는 도시’를 넘어 ‘살아갈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정착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외국인과 지역사회가 함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될 때에야 비로소 인구절벽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 ◇ 도시의 선택 “49만 7000명 중 외국인 8615명이 없다면”이라는 물음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포항의 현재 인구 구조와 행정적 지위를 동시에 가늠하게 하는 질문이다. 외국인의 존재는 산업 현장의 인력난을 메우는 것을 넘어 고령화와 내국인 감소가 심화하는 포항에서 생산가능인구를 보완하는 현실적 해법이다. 실제로 외국인은 도시가 대도시 기준선을 유지하는 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유입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이후의 정착이다. 법적 지위, 산업 현장, 생활 기반 중 어느 하나라도 취약하면 외국인의 체류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포항이 지속 가능한 도시로 남기 위해서는 ‘일하러 오는 도시’를 넘어 ‘살아갈 수 있는 도시’로 변화해야 한다. 지금 포항은 그 변곡점에 서 있다. 다음 2편에서는 ‘포항에 산다는 것, 외국인의 하루’를 통해 숫자 뒤에 숨은 삶의 얼굴들을 따라가 본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2025-12-07

산란기 수초에 손 넣어 사냥… 신선도 높아 물회로 즐겨

△ 신선도 높아 물회로도 먹을 수 있는 손꽁치 울릉도에는 꽁치를 활용한 요리가 많다. 작은 꽁치 하나로도 참 다양한 요리들을 만들어냈다. 구워 먹고 끓여 먹는 것은 기본이고 날 것은 회로 먹고 물회로도 먹고, 꽁치전도 부처먹었다. 소금에 절여서는 젓갈로도 담가 먹었다. 다양한 꽁치 요리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울릉도를 대표하는 꽁치 요리는 꽁치물회다. 과거 울릉도의 꽁치잡이 풍습은 독특했다. 낚시나 그물이 아니라 맨손으로 잡았다. 어선을 타고 나가 맨손으로 꽁치를 직접 잡았던 것이다. 그렇게 잡은 꽁치는 손꽁치라 했다. 손꽁치는 그물이나 낚시로 잡은 것 보다 신선도가 높아 물회로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탄생한 음식이 꽁치물회다. 보통 비린 맛이 강한 꽁치로는 물회를 만들어 먹기 어렵다. 울릉도 손꽁치니까 가능했던 음식이다. 옛날에는 손꽁치가 잡히는 4-5월에만 맛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냉동시설이 발달해 그물로 잡은 꽁치도 급랭해 두고 오래 맛볼 수 있다. 4~5월에 꽁치들이 산란을 위해 울릉도 해안으로 찾아든다. 꽁치는 공치, 청갈치, 추광어 등으로도 불린다. 꽁치는 일본의 남부 바다에서 겨울을 난 뒤 봄과 여름 사이에 북쪽으로 이동하여 동해에서 산란한다. 꽁치는 산란기가 되면 수초에 몸을 비비며 산란을 하는 특성이 있다. 어부가 수초 사이에 손을 넣으면 꽁치들은 손가락 사이를 콕콕 쑤시고 손가락 사이에도 몸을 비벼대며 산란을 하려 한다. 이때 어부는 그냥 손으로 꽁치를 잡을 수 있다. 이처럼 꽁치가 해조류에 산란하는 특성을 이용해 잡는 것이 손꽁치 어법이다. 어부들은 천연 수초 사이에서도 꽁치를 잡았지만 바닷물 위에 잘피나 몰, 가마니 같은 것을 깔아놓고 잡기도 했다. 이때 잡히는 꽁치를 손꽁치, 햇물꽁치, 몰꽁치 라고 했다. 성질이 급한 꽁치는 낚시에 물려 올라오면서부터 스트레스 때문에 부패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손꽁치는 산란철이라 기름이 오르고 스트레스나 상처가 적어 선도가 아주 뛰어나다. 이 신선한 꽁치를 이용하여 ‘손꽁치 물회’, 손꽁치 무침 등을 만들어 먹었다. △ 울릉도 토속젖갈로 이름높은 꽁치젖갈 꽁치는 암컷이 알을 낳은 뒤 숫컷의 체외수정이 이루어지며 알은 실과 같은 섬유질 조직을 통해 해조류나 부유물에 부착된다. 수명은 약 2년 남짓이다. 한국의 동해와 남해, 아시아, 북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북태평양 해역에 널리 분포한다. 요즈음은 더 이상 손으로 잡지 않고 그물로 잡는데 살아있는 꽁치라도 바로 물회를 하지 않고 급랭해 하루 이상 냉동시킨 후 물회로 만들어 먹는다. 비린 맛이나 세균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냉동해 둔 꽁치는 껍질을 벗기고 포를 뜬 뒤 배, 오이, 당근, 파 등과 적당량의 물을 넣고 물회를 만든다. 꽁치무침은 발라낸 꽁치 살에 무채, 양파, 상추, 당근채, 마늘, 고춧가루, 식초, 오이채를 넣고 무쳐낸다. 생 꽁치 요리를 처음 먹어보는 사람은 간혹 탈이 나기도 하니 장이 나쁜 사람은 주의가 필요하다. 꽁치젓갈은 울릉도 바다에서 잡은 꽁치로 담은 울릉도 토속 젓갈이다. 섬이지만 울릉도는 젓갈 음식이 잘 발달하지 못했다. 소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란 추정도 있다. 천일염을 만들 수 있는 갯벌도 없고 육지에서 유입된 소금 가격은 너무 높아 젓갈용으로 쓸 수 없었다. 울릉도 자체에서는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었지만 아주 소량이었다. 음식에 쓰기도 부족할 정도니 젓갈을 담을 수 없었다. 일부에서는 울릉도에 사철 싱싱한 해산물이 넘치니 젓갈을 담을 필요가 없었다고도 하지만 내륙의 해안가에도 사철 해산물이 넘쳐 나지만 젓갈이나 염장해서 말리는 건정 생선 문화가 발달한 것을 보면 소금이 귀하고 부족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꽁치젓갈은 꽁치와 소금의 비율을 7대 3으로 해서 3개월 정도 숙성한 뒤 먹었다. 5월에 담그면 8월쯤 먹을 수 있었다. 꽁치젓갈은 손으로 찢어 먹어야 제맛이다. 그 자체로도 먹었지만 김치를 담그거나 겉절이 등 각종 음식을 만들 때도 다양하게 활용됐다. 울릉도에서 김치에 멸치젓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 꽁치다대기, 꽁치 시락국수 등 다양하게 변화 포항 지역에서는 꽁치를 뼈째 다져서 만든 완자를 넣고 끓이는 음식을 꽁치 다대기 혹은 꽁치 완자 시락국, 꽁치국, 꽁치 당구국, 꽁치 다대기 추어탕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완자를 넣은 꽁치 시락국수도 인기가 있다. 꽁치 완자 요리는 포항뿐만 아니라 울릉도에서 즐기는 향토 음식이었다. 울릉도에서는 꽁치 완자와 섬엉겅퀴를 넣고 끓이는 꽁치완자 엉겅퀴된장국이 대표 요리다. 꽁치가 많이 나던 시절 싸고 영양가 많은 꽁치를 뼈까지 다져 먹기 위해 꽁치 완자가 만들어졌고 그것이 지금까지 음식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꽁치 완자 요리는 살뿐만 아니라 칼슘이 풍부한 뼈까지 버리지 않고 다져서 완자로 만들어 먹었던 지혜로운 음식이다. 꽁치 완자는 칼등으로 두드려 잘게 다진 뒤 녹말가루를 섞어 적당한 크기로 만든다. 꽁치완자엉겅퀴 된장국은 된장을 푼 물에 섬엉겅퀴와 꽁치 완자를 넣고 끓여낸다. 섬엉겅퀴에 이면수를 넣고 끓이기도 한다. 섬엉겅퀴는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인데 울릉도 자생엉겅퀴다. 울릉도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사는데 다른 엉겅퀴에 비하여 키가 매우 크다. 꽃은 8~10월에 자주색으로 핀다. 한방에서는 대계라고 하며, 뿌리는 가을에 사용하고 잎과 줄기는 꽃이 필 때 채취하여 햇빛에 말려 사용한다. 엉겅퀴에서 나오는 휘발성 기름인 정유, 알칼로이드, 수지, 이눌린 등의 성분이 있어서 옛날에는 지혈, 해열, 소종, 백일해, 고혈압, 장염, 신장염, 토혈, 혈변, 산후조리, 대하증, 종기 치료제로 사용했다. 그만큼 약효가 뛰어났다는 반증이다. 말린 잎은 차로, 어린잎은 나물이나 국거리로 먹는다. 부드러운 잎과 순을 데쳐서 고추장이나 된장에 무쳐 먹기도 하고 된장국이나 해장국을 끓이기도 한다. 육지의 엉겅퀴는 가시가 나서 새잎이 아니면 식용하기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울릉도에서 나는 섬엉겅퀴는 가시가 없어서 봄의 새순은 물론 가을에 나는 끝순까지도 나물로 먹을 수 있다. 섬엉겅퀴는 번식력도 좋은 데다 담백하고 감칠맛도 뛰어나다. 일반적으로 시래기는 많이 끓이면 흐물거리지만 엉겅퀴는 오래 끓여도 흐물거리지 않고 본래 모양을 잃지 않는다. 그래도 부드럽고 맛있다. 울릉도에서 비린 생선으로 꼽히는 생꽁치로 물회나 무침 요리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손으로 직접 잡는 손꽁치잡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기억해야 할 소중한 전통 문화다. 손꽁치 어법은 사라졌어도 손꽁치가 있어서 척박하고 먹거리가 풍성하지 못했던 울릉도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꽁치 요리법을 개발해 냈다. 척박함이 창의적인 요리를 발전시킨 원동력이기도 했던 것이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2-04

전국에서 재봉틀을 가장 오랫동안 돌린 사람

1953년 포항 육거리서 문 연 ‘코주부사’ 마크 ·명찰 제작 가게, 새학기땐 북새통 포항 육거리 시립중앙아트홀 옆에 코주부사라는 아담한 가게가 있다. 상호가 독특해 행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게 되는 곳이다. 이 가게는 명찰과 마크, 휘장 등을 만드는 마크사로 1953년에 개업했으니 원도심의 터줏대감이다. 학생들이 가슴에 명찰을 달고 다니던 시절, 새 학년이 시작될 때면 코주부사는 장사진을 이루었다. 명찰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물론 체육복과 교련복에 학교 마크를 붙여야 했기 때문이다. 한 학교 학생만 몰려도 북새통을 이룰 텐데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으니 그 풍경이 어떠했을까. 하지만 이제는 개점휴업 상태다. 학생 명찰은 사라져버렸고 마크사의 일감도 대부분 컴퓨터로 대체되면서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주부사를 지켜온 박영준 대표는 이제 고령(85세)이어서 더 이상 일하기가 힘들어졌다. 박영준 대표는 1940년 포항 신흥동에서 태어났다. 포항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강이 안 좋아 2년 동안 쉬었다가 동지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 무렵 중앙동 신한은행(구 조흥은행) 뒤편에 인쇄소가 있었고 그 옆에 코주부사가 있었다. 박영준의 친구가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박영준이 친구를 만나러 인쇄소에 갔다가 우연히 당시 김대정 코주부사 대표를 만났다. 손재주 좋고 똑똑했던 박영준 대표 중학생 시절 창업주 김대정 대표 만나 재봉틀 배우며 1978년 가게 이어받아 체육복·태권도복 등 다양한 품목 소화 중학생 때 처음 재봉틀 잡아 김대정 대표는 착하고 똑똑해 보이는 박영준에게 재봉틀을 다뤄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박영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처지였던 박영준은 재봉틀 다루는 일이 괜찮아 보였다. 곧이어 김 대표는 박영준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놓고 재봉틀 다루는 기술을 차근차근 가르쳤다. 슬하에 자녀가 없던 김 대표는 박영준을 양자처럼 여기며 일을 전수했다. 발로 밟는 재봉틀을 다룰 때는 손가락을 다치기가 예사였고 힘이 들었지만 새로운 일을 배우는 재미도 있었다. 박영준은 일을 배우며 자신에게 손재주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크사 일을 원활하게 처리하려면 한문과 영어, 일본어도 웬만큼 알아야 하는데 박영준은 이를 빨리 습득했다. 일제 주키(JUKI) 자동 재봉틀이 들어오면서 일이 조금 쉬워졌다. 박영준 대표는 중학생 때 쓰던 주키 재봉틀을 7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다. 동지중학교를 졸업한 박영준은 동지상고와 포항수산전문대학 야간부를 다녔다. 중학교부터 전문대학까지 8년을 주경야독한 것이다. 동지상고 야간부 1년 선배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초창기 코주부사는 명찰, 마크, 휘장은 물론 체육복, 작업복, 태권도복 등 다양한 품목을 다뤘다. 박 대표는 손님들한테 “가게 이름이 왜 코주부냐”라는 질문을 수없이 들었다. 상호는 김대정 대표가 만들었다. 주고객인 어린 학생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당시 인기 절정의 만화였던 「코주부 삼국지」의 주인공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코주부사는 원도심의 하나뿐인 마크사였기에 일감이 몰려들었고 한창 바쁠 때는 2~3일 철야 근무를 했다. 당시는 체육복이나 작업복을 양복처럼 맞춰 입었기에 학교나 공장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1970년대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호황을 맞았다. 한때는 열 명이 넘는 직원을 두기도 했는데 일감을 소화하지 못할 때는 대구의 기술자를 부르거나 큰 공장에 주문을 넣었다. 다른 한편으로 포항에서 처음으로 등산복과 등산장비를 취급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78년에 코주부사를 물려받아 오지에서 불러도 군말 없이 달려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박영준 대표가 당시를 회상했다. “상옥, 하옥은 시내에서 먼 곳이잖아요. 그쪽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릴 때면 교사용 체육복 치수를 재러 와달라고 해요. 지금도 그곳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데 과거에는 어땠겠어요. 그 멀고 험한 길을 안 갈 수가 없었지요. 그보다 더 먼 분교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어요. 체육복이 겨우 다섯 벌 정도 필요하다고 해도 달려갔습니다. 그런 곳에 다녀오면 하루가 다 갔어요.” 김대정 대표는 1978년 코주부사를 박영준 대표에게 물려주었다. 가게를 넘겨받은 박 대표는 더 부지런히 일했다. 박 대표의 부인이 일화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그때는 돈 쓸 시간도 없었어요. 돈이 들어오면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집 안 장롱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곤 했지요. 대신동 해동아파트에서 살다가 해도동 동아타운으로 이사 갈 때 장롱을 옮기는데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툭 튀어나왔어요. 무언가 싶어 봉지를 뜯어보니 지폐 뭉치가 들어 있어 깜짝 놀랐지요. 곰곰이 생각하니 지폐를 넣어둔 비닐봉지 중에 새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더군요.” 컴퓨터 기술 변화 속 쇠락한 수작업 친구들의 사랑방 ⋯ 가게만 덩그러니 재봉틀과 함께한 70년, 추억 속으로 “몸만 괜찮다면 재봉틀을 돌리고 싶어” 지금도 재봉틀을 돌리고 싶어 1970년대까지는 어느 분야에서든 기술을 가진 사람이 대접받았다. 하지만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많은 기술자가 사라지고 말았다. 재봉틀 기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손으로 하던 자수(刺繡)도 컴퓨터가 대신했다. 작업복이나 체육복을 만드는 기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흐름 속에 코주부사의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다. 코주부사는 박 대표 친구들의 사랑방이었다. 원도심 한복판에 있기에 친구들이 오며 가며 들르기에 좋았다. 친구들이 칠순, 팔순을 넘기며 “누가 먼저 저세상에 갈 것 같냐”고 얘기를 꺼내면 “아무래도 영준이가 먼저 가지 않겠냐”고들 했다. 박 대표가 어릴 때부터 건강이 안 좋은 탓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던 친구들은 하나둘 저세상으로 떠나고 이제는 박 대표만 남았다. “포항이 좋았던 시절을 다 지켜봤지요. 육거리에 남은 노포는 코주부사와 길 건너 로타리냉면밖에 없군요. 전국에서 재봉틀을 저처럼 오래 돌린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도 몸만 아프지 않다면 재봉틀을 돌리고 싶어요.” 박 대표는 필자의 이름을 묻더니 재봉틀을 잡았다. 재봉틀 굉음이 울리면서 파란색 명찰에 이름이 새겨졌다. 50여 년 전, 초등학생인 필자의 명찰을 새기던 박 대표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글 : 김도형(작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2-03

가을·겨울에 더 맛있는 ‘오징어 내장탕’ 숙취 해소에 탁월

오징어 내장탕 - 흰색 찾자 중 심장·수란관·맹장·난소 등 재료로 사용 오징어 똥창찌개 - 적갈생 내장 이용 ⋯ 식당서 맛 볼 수 없는 토속요리 오징어 순대·오징어 잡채·오징어 홍합꼬지 등 여행 즐거움 더욱 커져 △ 겨울에 맛있는 오징어 내장탕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그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토속 음식이다. 울릉도에 가야만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오징어 요리들은 울릉도 맛 기행의 백미다. 오징어 내장탕은 오징어 내장 중 흰 창자를 이용해 끓인 울릉도 토속 음식이다. 오징어 내장은 쉽게 부패하고 내장에 기생하는 기생충 아나사키스 때문에 식용으로 잘 쓰지 않는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했던 울릉도에서는 오징어잡이가 시작될 때부터 내장을 버리지 않고 식용했다. 오징어 내장탕은 냉동을 해 두고 사철 먹지만 본격 오징어 철인 가을과 겨울에 먹는 것이 더 맛있다. 울릉도 사람들이 식용하는 오징어의 내장은 하얀 창자와 적갈색 창자 두 종류가 있다. 적갈색은 간장 부위, 흰색은 기타 내장기관이다. 흰색의 내장 가운데 심장, 수란관, 맹장, 난소 등을 내장탕 재료로 쓴다. 내장탕은 계절마다 제철에 나오는 야채를 이용한다. 내장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뒤 호박이나 호박잎, 콩나물, 파, 무, 양파 등을 넣고 끓인다. 호박, 양파는 비린 맛을 잡아 준다. 숙취 해소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울릉도의 일부 노인들은 오징어 내장탕을 ‘이카 창대기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징어의 일본 말인 ‘이카‘(イカ)와 내장의 비속어 ‘창대기‘가 결합한 말이다. 오징어 똥창찌개는 식당에서는 맛볼 수 없는 울릉도 토속 요리다. 적갈색 내장인 간장으로 끓인다. 울진 등 오징어가 많이 나던 동해안 내륙 지역에서도 즐겨 먹던 음식이다. 오징어의 간장을 소금에 절였다가 끓인다. 끓일 때 냄새가 고약해서 일반 식당에서는 팔지 않는다. 오징어의 건조를 위해 내장을 제거할 때 하얀 창자는 급랭하거나 즉석에서 오징어 내장탕을 끓여먹고 적갈색인 간장은 소금에 절여 항아리에 1년 정도 숙성시킨 뒤 끓여 먹는다. 이 음식은 똥창찌개 혹은 오징어 누런창 찌개라고도 한다. 소금에 절여 숙성된 간장에 된장과 마늘을 넣고 달달 볶다가 시래기와 고춧가루, 제피 등을 넣고 졸여서 먹다. 찌개나 탕이라기보다는 조림에 가깝다. 울릉도에서는 1980년대 후반까지도 주민들의 식탁에 자주 오르내리던 소울 푸드 같은 음식이다. △ 오징어 간장, 오징어 순대 등 다양한 요리로 변주 오징어 간장은 쌈장으로 요리해 먹기도 한다. 쌈장은 ‘뽀글장‘ ’빡빡장‘이라 부른다. 빡빡장은 간장과 된장을 냄비에 넣고 볶다가 물을 조금 부은 뒤 고춧가루와 양파, 마늘, 고추 등을 넣고 졸여낸다. 배추 같은 생채소가 나는 철에는 주로 쌈장으로, 생채소가 없을 때는 찌개로 끓여 먹었다. 오징어 간장은 방어 잡이 미끼에도 최고로 친다. 그만큼 맛있다는 뜻이다. 오징어순대는 오징어 몸통 속에 각종 야채를 다져넣고 쩌낸 요리. 오징어순대는 만드는 방법이나 형태가 순대와 비슷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징어순대 만든 법은 어렵지 않다. 먼저 오징어 몸통에서 오징어 다리를 분리한다. 오징어 몸통 속의 내장은 제거한 뒤 소금을 뿌렸다가 물로 씻고 오징어 몸통 속을 전분이나 밀가루로 깨끗이 씻어낸다. 오징어 다리와 당근, 양파, 부추, 숙주 등을 잘게 다진 뒤 찹쌀밥이나 으깬 두부 등을 섞어 양념한 소를 만든다. 오징어 몸통 속에 만들어진 소를 채워 넣고 입구를 꼬치로 봉한다. 오징어 몸통 곳곳을 바늘로 찔러둔다. 내용물이 팽창하면서 오징어가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또 익으면서 생긴 수분이 밖으로 흘러나와 순대 속과 오징어 몸통이 분리되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 순대는 김이 오른 찜통에 15분 정도 쩌 낸다. 울릉도에서는 오징어의 내장으로 순대를 만들기도 했다. 오징어 내장 중에서 먹통만 떼어내고 다른 내장을 남긴 채 뱃속에 고추, 당근, 쪽파, 양파 등을 다져 넣은 뒤 묶어서 쪄냈다. 생오징어로 만든 오징어순대는 강원도 해안이나 울릉도 지방의 향토 음식이지만 생오징어를 구할 수 없었던 옛날 경기도 지방에서는 마른 오징어로 순대를 만들기도 했다. 마른 오징어를 불린 뒤 물기를 없애고 밀가루에 파, 마늘, 참기름, 설탕, 간장을 섞어 반죽한 것을 바른 다음 돌돌 말아 실로 꽁꽁 묶어서 찜통에 쪄냈다. 울릉도에서는 오징어 내장탕뿐만 아니라 오징어의 살과 야채를 넣고 끓인 국도 있다. 오징어국은 생오징어와 마른오징어 모두가 사용된다. 오징어 내장이 주로 국 끓이는 재료로 이용된 것은 몸통은 상품으로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유가 있는 집은 오징어 몸통으로도 국을 끓였다. 울릉도 뿐만 아니라 내륙에서도 옛날부터 건오징어와 생오징어 모두 국으로 끓여 먹었다. 그래서 1809년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말린 오징어는 물에 불려 썰어 닭 속에 깻국을 탕하여 잣 띄워 여름에 쓰면 먹음직스럽다”고 건오징어 요리법을 소개한다. △ 1830년대 농정회요에도 오징어 요리 기록 있어 1830년대에 최한기가 편찬한 ‘농정회요農政會要’에도 “오징어의 흰 살점을 썰어 볶아 국을 만든다. 달궈진 솥에 기름과 술을 두르고 오징어를 재빨리 볶아 5~6할 가량 익혀낸다. 기름, 간장, 물과 재료를 솥에 넣고 끓어오르면 오징어를 넣고 조금 더 끓인다. 역시 참깨즙을 뿌려 올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징어국은 먼저 적당한 양의 물에 무를 넣어 끓인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넓적하게 자른 오징어를 넣는다. 거기에 콩나물, 매운 생고추, 마늘 등 갖은 양념을 하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기호에 따라 고춧가루를 넣기도 한다. 울릉도 토속 오징어 요리 중에는 누구나 좋아할 만한 오징어 잡채도 있다. 내륙에서는 잡채를 만들 때 고명으로 고기를 넣고 만들지만 울릉도에서는 홍합이나 오징어 등 해산물을 이용했다. 그중 가장 흔하고 대중적이면서 비리지 않은 생선인 오징어를 재료로 만들어 먹었던 것이 오징어 잡채다. 오징어 잡채는 일반적인 잡채 재료에 고기 대신 오징어를 주재료로 하고 홍합을 사용하는 점만 다르다. 오징어 2마리 기준으로 잡채를 할 경우 부재료는 조선 홍합 4개, 당면 200g, 풋고추 4개, 당근 1개, 마늘, 파 약간, 식용유, 간장, 설탕, 깨소금, 참기름 등이다. 더러 부추를 넣기도 한다. 오징어는 껍질을 벗기고 끊는 물에 데쳐 4cm정도 길이로 썬다. 홍합은 어슷하게 저민다. 당면은 삶아둔다. 후라이팬에 파, 마늘을 볶다가 오징어, 홍합과 풋고추, 당근 등 야채를 넣어 함께 볶아낸다. 당면은 따로 볶다가 간을 한 다음 오징어, 홍합, 야채 볶음과 섞은 뒤 깨소금, 참기름을 첨가해 완성한다. 오징어홍합 꼬지도 울릉도만의 특별한 토속 음식인데 오징어와 홍합을 꼬챙이에 끼워 구운 산적이다. 각 지역마다 고기나 홍합, 바지락, 대합 등의 조개나 전복, 소라 등을 대나무 꼬챙이에 꽂아서 굽거나 말려서 먹는 꼬지 요리가 있다. 낙지를 꼬챙이에 말아서 구워 먹는 낙지꾸리도 꼬지 요리의 일종이다. 내륙에서는 주로 고기를 이용하는 반면 해안이나 섬 지방은 해산물을 꼬지 요리에 활용했다. 울릉도에서는 옛날에 흔했던 수산물인 오징어와 토종 홍합을 이용해 꼬지 요리를 만들어 명절이나 제사상에 올렸다. 오징어는 생물을 두툼하게 자르고 홍합은 삶아서 껍질과 알을 분리한 뒤 물기를 뺀다. 대나무 꼬챙이에 오징어와 홍합을 번갈아 끼운다. 꼬지가 만들어지면 후라이팬에 참기름을 살짝 두른 뒤 구워내면 완성된다. 단순해 보이는 오징어 하나에도 이토록 많은 요리가 깃들어 있다. 울릉도가 보전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2025-12-03

위기의 식물원 살려낸 은혜 갚는 낙우송 3父子

카톡으로 보내온 이삼우 원장님의 기청산식물원 동영상을 보고 불현듯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 포항 기청산식물원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원장님께서 지난 11월 8일 개통된 포항-영덕 동해안 고속도로 한번 자동차로 달려보고 싶다고 하셨다. 월포․청하 IC를 통하여 영덕 방향으로 향했다. 창밖의 동해 풍경을 즐기도록 천천히 운전했다. 그러자 원장님께서 고속도로는 쾌속의 재미도 있다며 빨리 달리기를 원했다. 영덕에서 되돌아서 고속도로 ‘포항휴게소’에 들려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창밖으로 내다본 동해 뷰는 정말 환상의 풍경이었다. 바다의 경관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과 몸이 힐링 되었다. 식사를 끝내고 곧장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월포, 청화 IC를 빠져나와 기청산식물원에 도착했다. 오늘 함께 기청산식물원을 관람하기로 약속한 진원대 전 구룡포 읍장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기청산식물원을 오늘날까지 꾸미고 가꾸어 온 주인공은 바로 이삼우 원장이다. 그는 온화한 성품으로 서울대학교 농대 임학과를 나온 전문 나무 사랑꾼이다. 졸업 후 바로 소년 시절의 꿈을 찾아 고향으로 내려왔다. 1968년 청하중학교 재단 농장 관리인으로 부임하여 과수 농업을 하면서 독자적으로 농장을 확장하고서 향토 고유 수종 연구개발 보급 테마로 하는 기청산식물농원을 설립하였다. 지금까지 일평생을 나무와 인연을 맺고 나무와 함께 익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 이제 그는 정원의 나무와 닮아 있었다. 나무 백과사전과 같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원장님과 함께 우리는 정원 숲의 가을 정취에 빠졌다. 이삼우 원장은 차향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기청산식물원의 존재 이유를 들려주었다. 식물을 배우는 일은 곧 자연을 이해하는 일이며, 자연을 이해하는 일은 인간이 다시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깨우치는 길이라는 그의 말은 오래된 진리처럼 가슴에 스며들었다. 식물원은 이 땅 고유의 자생종을 연구하고 되살리며, 희귀하고 멸종위기에 놓인 생명들을 서식지 밖에서 보듬어 지키고, 다양한 전시와 문화 행사를 통해 식물의 언어를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묵묵한 시간의 숲이었다. 원장님은 이곳을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한국적이며, 무엇보다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숲”으로 만들고자 했다. 포항시 북구 청하면 청하로 175길 50번지 기청산식물원 울타리 안은 아직도 가을을 붙잡고 있었다. 단풍 든 나뭇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세상과는 달리 아직도 감태나무의 붉은 단풍잎,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잎, 풍향수의 푸른 잎이 어울려 정원의 숲은 아름다운 세계를 연출했다. 아름다움은 모두가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자연 숲의 느낌이었다. 정원 숲은 마음과 몸을 힐링하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나무와 교감은 아픔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힐링의 손길이 가슴을 쓰다듬어준다. 우리의 날숨 공기는 나무가 들숨으로, 나무의 날숨 향기는 우리의 들숨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연인의 입맞춤과 무엇이 다르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나무 특유의 치료 향기를 나누어 준다. 기청산식물원은 토종의 다양한 식물로 구성된 인공 정원이었으나 이제는 그들 스스로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 정원으로 변모했다. 대나무 울타리를 배경으로 언덕배기에 우뚝 서 있는 장엄한 낙우송 3 부자(父子)는 키 15미터, 몸 둘레 3.5미터의 거목으로 식물원의 가장 오래된 존재이었다. 마치 ‘정원의 왕(king tree)’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움은 물론 장중한 품위까지 지녔다. 샘물이 흐르는 골짜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지면 위로 밀어 올려 호흡근을 키운 모습은 하나의 신화적 풍경이다. 땅 위로 솟아난 뿌리들은 오백나한이 수행을 위해 모여든 듯 기묘한 형상을 이루고, 그 앞에 서면 식물의 생명이 얼마나 영묘한 방식으로 뿌리에서부터 호흡하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멀리서는 메타세쿼이아와 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잎이 어긋나고 가지가 수평으로 뻗는 낙우송만의 세계가 드러난다. 미국 미시시피강 습지에서 시작된 그 원형질은 깊고 오래된 생명의 지혜를 품고 있다. 그러나 낙우송 3 부자(父子)는 생태학 이상의 이야기, 인간과 나무가 주고받은 소박한 기적이 숨어 있다. 한때 이곳의 땅은 식물원 소유가 아니었고, 주택단지 공사가 시작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굴착기가 다가오는 모습을 본 원장님은 공사를 멈추게 하고 빚을 내어 토지를 사들였다. 무거운 이자에 지치던 어느 날, 그는 나무 앞에서 넋두리처럼 고단한 속을 털어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가 방송에 소개되면서 뜻밖의 수익이 생겨 1년 치 이자가 모두 해결되었다. 그 후로 원장님은 낙우송을 ‘은혜 갚는 나무’라 부르며 매년 막걸리 한 사발을 올린다. 세월을 견딘 생명의 의지, 생태적 원리, 그리고 인간과 나무 사이에 흐르는 조용한 인연까지, 기청산의 낙우송 3 부자는 그 모든 이야기를 고요한 몸짓으로 품고 서 있다. 정원 숲길에 첫 발을 들이는 순간, 어디선가 흘러나온 새소리가 은은한 경음악처럼 발끝을 따라붙는다. 그 소리는 마치 숲이 오랜 침묵 위에 올려두었던 서곡(序曲) 같아, 한 걸음 한걸음에 부드러운 숨결을 더한다. 나무 사이로 어린 햇살이 비스듬히 흘러내리면, 길 위에 흩어진 낙엽들은 발바닥의 가벼운 압력에 응답하듯 제 나름의 음계를 토해낸다. 높고 낮고, 길고 짧은소리들이 켜켜이 겹쳐, 숲의 자연 화음에 하나의 목관악기가 새로 참여한 듯한 깊이를 만든다. 낙엽을 밟는 소리가 추임새처럼 스며들 때, 새들의 짧은 기척과 바람의 숨결은 다시금 한데 더해져, 숲은 더없이 정교한 즉흥곡으로 변모한다. 정원의 나무들은 그 음악의 무대 뒤에서 천천히 호흡하며, 피톤치드의 향을 내어 마치 악보의 여백처럼 공기를 정화한다. 나뭇잎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숲에서는 하나의 섬세한 악절이 된다. 때로는 물결처럼 멀리서 미묘한 저음을 보내오고, 가지 끝에 잠시 앉았다가 날아오르는 작은 새의 기척은 곡 마지막에 찍히는 가느다란 쉼표처럼 흘러간다. 숲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과 나 사이의 경계가 천천히 풀어지고, 발걸음은 음악의 일부가 되어 숲과 함께 호흡하기 시작한다. 꽃 앞에 멈추면 마음은 꽃의 색채를 닮아 단정해지고, 나무 아래 서면 마음속 오래된 그림자마저 제 자리를 찾아간다. 숲이 들려주는 이 음악은 치유의 이름으로 불리기보다 오히려 존재의 본래 리듬을 되돌려주는 회복의 예술처럼 느껴졌다. 정원의 숲을 빠져나오기까지 여전히 발목을 스치며 따라오는 새소리와 낙엽의 여운 속에서 문득 깨닫는다. 치유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새 한 마리의 노래와 낙엽 한 장의 울림이 한 몸처럼 흐르는 이 숲길 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 몸은 알고 있다. 정원의 낙우송과 숲의 감동 여운을 안고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을 빠져나왔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기청산식물원은… 기청산식물원은 자연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자생식물 중심으로 꾸며진 독특한 식물원으로, ‘쇠솔이 흐르는 천년의 숲’처럼 조성되어 명상과 치유를 위한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환경부가 지정한 서식지 외 보존기관이기도 해서, 울릉도를 비롯해 경상도 지역의 희귀하고 멸종위기 식물을 20년 넘게 조사하고 보전해 왔다. 식물원 내부는 자생식물 전시원, 울릉식물 관찰원, 약용식물원, 수생식물원, 향기식물원, 희귀종 전시원 등 여러 테마별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생식물의 다양성을 사계절 내내 감상할 수 있다. 전화 054-232-4129. 개장 시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겨울철은 5시) 매주 월요일은 휴원. 식물 해설 및 안내 제도 운영.

2025-12-03

1970~80년대 전성기 재현 ⋯ 수온 상승에 어장 북상 ‘귀하신 몸’

△ 오적어로 불리던 오징어 어획량 줄어 오징어는 울릉도의 상징이다. 하지만 이제는 동해바다 오징어의 씨가 말라 울릉도에서도 오징어 구경하기가 어렵게 됐다. 2000년대 초반까지 연평균 1만톤을 유지하던 어획량이 최근 4년 동안 연평균 447톤으로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오징어는 한때 명태와 함께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수산물 1-2위를 다투던 수산물이다. 그런데 바다 수면에서는 오징어를 쉽게 볼 수가 없다. 오징어는 낮 동안에는 수심 200~300m 지대에 살다가 밤에만 20m-50m 안팎의 수심으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오징어는 주광성이라 빛을 찾아 모여든다. 오징어 배가 집어등을 걸고 조업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징어는 타우린의 함량이 다른 어패류에 비해 2-3배나 많고 단백질 함량이 수산물 중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오징어의 옛 이름은 오적어(烏賊魚)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그 연유가 나온다. ˝남월지(南越志)에서 이르기를 그 성질이 까마귀를 즐겨 먹어서, 매일 물 위에 떠 있다가 날아가던 까마귀가 이것을 보고 죽은 줄 알고 쪼면 곧 그 까마귀를 감아 잡아가지고 물속에 들어가 먹으므로 오적(烏賊)이라 이름 지었는데, 까마귀를 해치는 도적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오징어는 전 세계에 450~500종. 우리나라 연안에는 8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징어 중 가장 큰 것은 대왕오징어류인 대양대왕오징어(Architheutis harveyi)로 대서양에 사는데 길이가 15.2m에 이르고 가장 작은 종인 애기오징어류는 1.6cm에 불과하다. 그밖에도 살오징어·갑오징어·무늬오징어·반디오징어·쇠오징어·화살오징어·창오징어·흰오징어 등이 있다. 울릉도에서 잡히는 오징어는 살오징어다. 일반적으로 몸속에 석회질의 갑라(甲羅)가 들어 있는 종류는 갑오징어라 부르고 얇고 투명한 연갑(軟甲)이 들어 있는 종류는 오징어라 한다. 참고로 오징어 다리는 10개 문어 다리는 8개다. 울릉도 살오징어는 다리를 포함한 몸통 길이가 보통 30cm 전후인데 성장 속도가 빠르고 붙박이가 아니라 회유성 어종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1만톤 어획 최근 4년 동안 447톤으로 급감 가장 좋은 서식 수온은 12~18℃ △ 울릉도 오징어잡이 가짜 미끼 어업서 기원 오징어의 산란은 여름, 가을, 겨울 여러 차례 이루어지며 주 산란장은 동중국해 중북부 해역이다. 가장 좋은 서식 수온은 12~18℃이다. 수컷은 교접 후, 암컷은 산란 후에 쇠약해져 사망하는 1년생이다. 오징어는 여름, 가을, 겨울에 동중국해 중북부 해역에서 산란 부화 되어 동해 및 대화퇴와 황해로 북상했다가 다시 남하하는 회유 과정에서 계속 성장 소멸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7월에서 다음 해 2월 사이 집중적으로 어장이 형성된다. 오징어는 냉동 보관이 아닐 경우 1~2일 경과하면 나쁜 맛과 냄새를 유발하는 물질인 휘발성 염기질소와 비린내의 주성분인 트리메탈아민 등이 생성되어 향과 맛이 나빠진다. 건오징어의 단백질 함량은 쇠고기의 3배 이상이다. 한때는 울릉도 수산물 판매액의 96%가 오징어였던 적도 있다. 울릉도에서는 1902년부터 본격적인 오징어잡이가 시작됐는데 오징어잡이 전성기였던 1910년대에 일본인들이 울릉도로 대거 이주해왔다가 쇠퇴기인 1930년대에는 대부분 떠났다. 그래서 울릉도 오징어 어업이 일본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울릉도독도연구기지 김윤배 대장의 주장에 따르면 울릉도 오징어잡이는 조선시대 남해안에서 성행하던 가짜 미끼 어업에서 기원한 것이다. 1900년대 이전에는 수온이 너무 차가워 동해안에 오징어 어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때마침 1900년대 들어 일본이 우리 어장을 침략해 조업할 때 마침 수온 조건이 맞아 동해에서도 오징어 조업이 성행했을 뿐이다. 울진군지에도 ”동해안의 선박은 울릉도 출신의 한희원이라는 사람이 조선 선박과 일본 선박의 장점을 결합해 만든 선박“ 이라는 기록이 있다. 울릉도 전통 오징어잡이 어선도 우리의 조선 기술에 일본 어선의 장점을 취해 만들었다. 어법 또한 남해안 오징어 잡이 어법에서 유래했다. 그러니 울릉도 오징어잡이가 일본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하다. 2004년 북중 공동어로 협약후 동해 북쪽 어장의 중국 어선들 연간 10만톤 싹쓸이도 큰 타격 △ 동해 표층 수온 급격한 상승, 울릉도 어장 쇠퇴 오징어가 명태와 함께 다시 전성기를 구가한 것은 1970-1980년대다. 울릉도 또한 이때가 최전성기였다. 그래서 1974년에는 울릉도 인구가 2만9810명이나 됐다. 지금은 3분의 1인 1만여 명 내외로 줄었다. 1970년대 후반 울릉도 인구의 64%가 수산업에 종사했는데 현재는 10% 내외에 불과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오징어잡이 쇠퇴가 시작되어 지금껏 지속되고 있는 것이 인구 감소의 원인 중 하나다. 울릉도 바다에서 오징어는 왜 사라졌을까? 울릉도 오징어의 주어종인 살오징어는 다년생인데 가을에 동중국해와 일본의 동쪽 연안에서 태어나 대마 난류를 타고 동해로 와서 성장한 뒤 산란장으로 되돌아가 산란 직후 일생을 마친다. 그런데 동해 표층 수온의 급격한 상승으로 9월에도 수온이 27~28도에 이르고 있다. 살오징어는 섭씨 12-18도에서 어장을 형성하는데 이 수온대가 울릉도 먼바다로 북상하게 된 것이 울릉도 오징어 어장의 쇠퇴를 가져왔다. 표층과 중층의 온도 차가 커지면 영양염의 순환이 약화되고, 먹이 망 자체가 붕괴된다. 수온 상승으로 먹이가 없어지니 오징어가 오지 않는 것이다. 결국 기후 위기가 울릉도에서 오징어를 사라지게 한 가장 큰 원인이다. 거기에 더해 2004년 북 중 공동어로 협약 이후 동해 북쪽 어장에서 중국 어선들이 연간 10만 톤이 넘는 오징어를 싹쓸이 하는 것도 울릉도 오징어잡이에 심대한 타격을 미치고 있다. 최상품 마른 오징어는 거무스름한 빛깔에 윤기가 흐르고 황금빛이 난다. 또 다리 빨판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당일 잡아 바로 말린 오징어를 당일바리 오징어라 한다. 배에서 잡아 말린 것이라 배오징어라고도 한다. 갓 잡아 펄떡 뛰는 싱싱한 오징어를 내장은 제거한 뒤 물에 씻어 배에서 바로 줄에 걸어 말린 오징어다. 워낙 귀해서 상품으로 만나기는 어렵다. 대부분 어민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줄 선물용으로 말린다. 마른 오징어는 하얀 분이 피어 있는 것은 상품이 아니다. 분이 피었다는 것은 그만큼 공기와 접촉이 많았다는 뜻이다. 즉 말린지 오래됐다는 의미다. 그래서 옛날 냉장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는 공기와 접촉을 줄이기 위해 말린 오징어를 담요 등으로 덮어서 보관하기도 했다. 저동항은 울릉도 오징어잡이 어업 전진기지다. 저동에는 울릉도 오징어잡이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다. 1980년대 초 2기가 설치된 수협 제빙 공장 앞의 펭귄 조형물이다. 촛대바위와 함께 40년 동안 저동의 랜드마크였다. 수협 제빙 공장에서 생산된 얼음을 어선에 공급하는 9m 높이 주탑이다. 과거 울릉도의 전성기 때는 얼음 공급을 받기 위해 이 펭귄 조형물 앞에 길게 줄을 선 어선들 풍경이 울릉도의 풍요를 상징했다. 이 펭귄 구조물이 ‘저동 다기능항 공사’ 예정지에 포함되면서 철거위기를 맞게 됐다는 소식을 독도문방구 김민정 대표의 sns를 통해 알게 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펭귄 조형물은 울릉군수협 소유물이다. 어선에 냉동고가 없던 시절 어선들이 원양 조업할 때 오징어 신선도를 지키기 위해 펭귄 조형물을 통해 얼음을 공급받고 출항했다. 울릉도 오징어잡이 역사가 오롯이 담긴 귀한 조형물이다. 김민정 대표의 공론화 덕에 펭귄 조형물은 보존되는 방향으로 논의되고 있다니 다행스럽다. 포항 해수청은 울릉도 오징어잡이의 상징인 펭귄 조형물을 반드시 보존시켜야 마땅하다. 어항이란 어촌의 현재와 미래 뿐만 아니라 역사도 담아야 한다. 그러니 울릉도 오징어잡이 역사의 상징물을 없애고 만든다면 다기능 어항이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2-02

무침· 김밥·월남쌈까지…다채로운 ‘과메기 요리’

과메기의 재료가 되는 건 꽁치다. 한국의 재래시장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생선. 몸은 가늘고 길며 양턱은 돌출해 새 부리와 비슷하고, 아래턱이 위턱보다 긴 것이 특징이다. 등지느러미는 10~12줄, 뒤쪽에 곁지느러미 6~7개가 있다. 한류성 어류이며 우리나라 인근에선 5~8월쯤 알을 낳는다. 주된 먹이는 동물성 플랑크톤. 싱싱한 꽁치를 굽거나 김치를 넣어 함께 조린 요리는 누구나 좋아하는 반찬이고, 토막을 내 쪄서 통조림으로도 만든다. 꽁치를 반쯤 말려 먹는 게 바로 과메기다. 숙성 과정에서 감칠맛이 더해져 겨울철 별미로 손꼽히는 음식. 과거엔 꽁치나 청어를 반으로 가르지 않고 통째 말려 둘러앉은 식구들이 손으로 쭉쭉 찢어가며 먹었다. 너나없이 가난했던 시절. 추운 계절에 먹는 과메기는 천연 단백질 보충제 역학을 톡톡히 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과메기의 요리법도 다양해졌다. 마늘과 파를 넣어 미역이나 상추에 싸서 초장에 찍어 먹는 ‘클래식한 방식’ 외에도 과메기 섭취 방법은 여러 가지다. 과메기 무침은 푸릇푸릇한 미나리와 각종 양념을 더해 매콤하게 만든다. 입맛 없을 때 밥과 함께 먹으면 더없이 좋은 반찬이 된다. 과메기 김밥은 말 그대로 과메기로 속을 채운 스타일의 김밥이다.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잘 맞추면 괜찮은 일품요리가 된다는 것이 요리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취향에 맞는다면 라이스페이퍼에 과메기와 파프리카 등의 채소를 함께 싸먹는 월남쌈 형태의 요리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추장으로 얼큰하게 비벼낸 국수에 과메기를 섞어 ‘과메기 소면’을 즐기는 사람도 없지 않다고 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02

‘귀한 손님’ 과메기와 함께 포항에 겨울이 왔다

세칭 ‘코로나19 사태’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던 2022년 여름이다. 어렵사리 섭외한 인터뷰를 몇 회에 걸쳐 진행했다. 10대 때부터 뱃일로 잔뼈가 굵은 80대 후반 어르신은 대게, 킹크랩, 오징어, 청어, 거기에 포경선을 타고 고래까지 잡으러 다녔던 이야기를 신명나게 들려줬다. 경상북도 포항 사람들의 겨울철 별미 ‘과메기’도 나와 어르신이 나눈 이야깃거리 중 하나였다. 과메기의 유래에 관해선 원체 여러 가지 설(說)이 중구난방으로 떠도는 탓에 누구도 “이게 맞고, 저건 틀렸다”고 딱 잘라 말하기가 쉽지 않다. 여하튼 아래 그날 들었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옮긴다. “내가 젊을 땐 요 앞 동해에 청어와 꽁치가 넘쳐났다 아이가. 원체 싼 물고기라 그물에서 뗄 때도 신경 안 쓰고 ‘툴툴’ 아무렇게나 털었거든. 그라믄 어떻게 되겠나? 그물에서 튕겨나간 청어나 꽁치가 눈에 잘 안 띄는 배 갑판 구석이나 선장실 지붕에도 몇 마리 떨어질 것 아이겠나. 그 생선이 추운 날 밤에는 얼었다가, 해가 뜨면 녹았다가를 수차례 반복한다 아이가. 어느 날 선원 한 사람이 반쯤 건조된 그걸 먹어보고는 깜짝 놀란 거라. 생각 외로 맛이 꽤 좋았거든. 허허허.” 이상이 어르신이 주장하는 과메기 섭식의 출발점이다. 포항에서 생활한 지 10년. 이외에도 과메기의 유래에 관한 여러 건의 풍문을 거창한 ‘탄생 설화’처럼 들었다. 다 나름대로 일리 있고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그 출발이야 어찌됐건 과메기는 이제 포항을 넘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음식이 됐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과메기 거의 대부분이 건조·숙성되는 구룡포엔 12월이면 말린 꽁치나 청어의 말랑한 식감을 느껴보려는 여행객들이 왁자지껄 몰려든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포항엔 과메기를 안주로 내세운 주점이 적지 않다. 사람에 따라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혹자는 물미역에 과메기 한 점을 넣고 채 썬 마늘과 파를 올린 ‘삼합 스타일’을 최고라 하고, 어떤 이는 산양삼 한 뿌리를 곁들여 먹는 것으로 과메기의 고급화를 도모한다. 드물게는 “과메기는 아무 것도 더하지 않고 본연을 맛을 즐겨야한다”며 말린 꽁치만을 먹기 좋게 찢어 입에 넣는 모주꾼도 존재한다. 관목어(貫目魚)라는 단어가 있다. 예전 과메기는 청어의 눈에 꼬챙이를 꽂아 그을음 피어오르는 재래식 부엌에서 말렸다고 한다. 그래서 뚫을 관(貫), 눈 목(目), 고기 어(魚)자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청어를 말려 먹은 건 수백 년 전에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이규경의 책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엔 ‘연관목(燃貫目)’이 등장한다. 눈을 뚫은 생선은 청어고, 연기를 사용해 부패를 더디게 했다는 제조 방식까지 드러나고 있는 것. 야담(野談)이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水軍)들은 일본과의 전투 이상으로 ‘청어잡이’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당시 바다엔 엄청난 양의 청어가 서식했다. 그걸 잡아 병사들의 주린 배를 채우고, 피난민에게도 나눠 주고, 잡힌 생선의 일부는 팔아서 칼과 창, 화약 등의 무기를 구입했다고. 그러니 16세기 조선 수군은 해군과 어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고난 속에서 살았다고 해야 할까? 세월이 흘렀다. 직접 청어나 꽁치를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가지 않아도 돈만 주면 집에 앉아서 과메기를 먹을 수 있는 21세기가 왔다. 포항엔 과메기와 함께 쌈채소, 물미역, 초장까지를 깔끔하게 포장해 주문 다음날이면 집까지 가져다주는 업체가 흔전만전이다. 지난 주말 저녁. 올해 첫 과메기를 친구와 함께 먹었다. 16가지 재료를 배합해 만든다는 ‘비법 초장’이 맛있는 가게였다. 이건 빼먹은 이야긴데 과메기의 맛은 찍어 먹는 초장에 좌우되기도 한다. 비법 초장 듬뿍 찍은 과메기를 안주로 소주 한 병쯤을 달게 비우고 나니 동해에 겨울이 왔다는 게 실감으로 느껴졌다. 그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청춘시절을 떠올리며 찬바람 부는 영일대 해변을 오래 산책했다. 어디선가 청어 비린내가 풍겨온 듯도 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02

독도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해양영토의 가치를 배우는 학교

△ 5대째 울릉도 토박이가 만든 독도문방구 영화 마케터였던 도시녀가 고향섬 돌아와 세운 독도 문방구 독도의 역사와 이야기를 재미있고 새롭게 다음 세대에 전달 섬시호·섬개야광나무섬말나리 등 36종은 오직 이곳만 자생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섬은 독도다. 그래서 누구나 생에 한번은 독도를 꿈꾼다. 하지만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지켜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고대의 우산국부터 대한민국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소중한 우리 땅 독도를 지켜온 것은 울릉도 사람들이었다. 울릉도 사람들이 조각배를 타고 그 험한 바다를 건너가 독도에 거처하며 해산물을 채취해 살았다. 그래서 독도는 우리 땅이 되었다. 근대에 와서도 독도를 침탈하려는 일본에 총을 들고 맞서 싸워 지켜낸 이들도 울릉도 사람들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안보의 허점이 보이는 틈을 타 일본은 수차례 해상보안청 소속의 무장 순시선을 보내 무력으로 독도를 점령하려 시도했다. 심지어 독도에 오키군 코카무라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五箇村竹島)라는 비석까지 세우기도 했다. 일본의 침략 때마다 한국전쟁 참전 상이용사였던 홍순칠을 비롯한 울릉도 청년들이 독도의용 수비대를 결성해 중무장을 하고 독도를 수비하며 박격포 등을 발사해 격퇴시켰다. 울릉도 주민들이 지켜내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애지중지하는 독도는 그때 이미 일본에 점령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 ‘실미도’를 비롯해 ‘너는 내 운명’,'해변의 여인' 등의 마케터였던 도시녀가 외딴 섬 울릉도의 문방구 주인이 됐다. 문방구 이름은 독도문방구, 주인 이름은 김민정이다. 독도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해양영토의 가치를 배우는 학교다. 울릉도는 독도로 가는 교문이다. 어느 학교마다 교문 앞에는 문방구가 있다. 그래서 독도학교 교문인 울릉도에도 문방구가 있다. 그 문방구가 바로 김민정의 ‘독도문방구’다. 독도문방구 주인 김민정은 5대째 울릉도 토박이다. 누구나처럼 섬을 벗어나고 싶어 육지 생활을 하다 2009년 아직 이른 청년의 나이에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왔고 독도의 가치를 깨달은 뒤 2014년 여름, 우연처럼 필연처럼 독도문방구를 열었다. 그녀는 우리가 기억하고 알려야 할 독도의 역사와 이야기를 보다 재미있고 새롭게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었다. ”울릉도 독도에 자생하는 식물 500여종 중 섬시호, 섬개야광나무, 섬말나리 등 36종은 전 세계에서 오직 울릉도와 독도에서만 자생하는 식물들입니다. 독도 바다에는 점점갯민숭달팽이를 비롯해 169종의 희귀 해양 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독도에 수만마리가 살고 있었다는 독도 강치(가재, 바다사자)는 일본인들의 포획에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독도에 사는 풀 한 포기, 물고기 한 마리 잊지 않고 우리 땅 독도를 지켜나가자는 마음으로 ‘독도문방구’를 엽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여전히 독도문방구 벽에 붙여둔 독도문방구 설립 이유다. 이름은 ‘문방구’이지만 학교 앞 문방구라면 당연히 팔아야 할 실내화나 체육복은 없다. 문방구 앞 뽑기 기계도 없다. 독도문방구는 독도와 울릉도를 기념할 만한 문구류부터 패션용품, 디자인 상품을 직접 제작해서 판매한다. 독도문방구는 멸종된 독도 바다사자(강치, 가재)부터 독도의 역사, 태고의 자연을 품은 섬 울릉도의 풍경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알리는 우리나라 최초 독도 편집숍이다. 또 기억하고 지켜야 할 독도와 울릉도의 이야기를 트렌디하게 전하는 로컬브랜드이기도 하다. △ 울릉도 관광생태계에 신선한 바람 일으켜 독도문방구가 울릉도의 소중한 자산인 것은 관광 식당과 숙박 시설, 오징어, 호박엿, 산나물 등 오래된 상품으로 수십년 동안 정체되어 있던 울릉도 관광 생태계에 청년의 안목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시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도문방구를 시발점으로 떠나기만 하던 청년들이 울릉도로 돌아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고 마침내 울릉도 청년소상공인포럼(회장:김민정 독도문방구 대표)까지 만들어졌다. 어찌 의미가 작다 하겠는가? 김민정은 힘들 때마다 번번이 ‘여기서는 못살겠다, 떠나야겠다’고 마음먹다가도 가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동창들과 만나 술 한잔하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러다 만난 남편과 짧은 연애 끝에 바로 결혼했으니 울릉도를 떠나기는커녕 제대로 눌러앉아 버리고 만 것이다! 스물셋부터 10년간 영화 마케터로 일한 도시녀였던 그녀가 이제는 섬 남자와 결혼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고향 섬에서 독도, 울릉도 굿즈를 제작, 큐레이션을 하며 살아간다. 김민정의 울릉도 귀향과 독도문방구 창업부터 12년간의 이야기가 최근에 책으로 나왔다. ‘웰컴 투 독도문방구’(남해의 봄날)다. 책은 ‘힙하고 핫한’ 로컬브랜드 독도문방구의 고군분투기다. 그 치열하고 열정 가득한 생존기다. △ 울릉도 살면서 겪은 우여곡절 책으로 펴내 김민정은 사업이라고는 1도 모르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독도문방구를 열어놓고 카드 단말기 구입부터 세금계산서 끊는 법 하나하나를 인터넷에 검색해가며 배웠다. 그러다가 멘탈이 붕괴되면 열심히 책을 들춰봤다. 태어나 한 번도 읽은 적 없던 자기계발서까지 찾아 읽었다. 그러던 중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남해의 봄날)라는 책에 크게 공감했다. 그 책은 마치 그녀를 위해 쓴 책 같았다.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는 도시 대기업에 다니다 연고도 없는 섬으로 들어가 성공을 일궈낸 일본 청년들의 사업 이야기다. 그렇게 알게 된 통영의 출판사 ‘남해의 봄날’에 울릉도 사는 다른 사람의 출간을 돕고 싶어 제안서를 보냈다가, 오히려 역제안을 받았고 8년 만에 책을 펴냈다. 아이들 방학이 되면 한 자도 못쓰다가 또 성수기가 되면 노트북을 닫았다가 오랜 채찍과 당근 끝에 8년 만에야 마침표를 찍었다. 출간 제안을 받았을 때는 둘째 아이가 걷지도 못했었는데 아이는 벌써 초등학교 2학년으로 자랐다. 귀향 후에 겪은 파란만장 우여곡절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을까? 섬은 지구와는 또 다른 행성이 아닌가? 외계 행성 정착이 어디 쉽겠는가? 사업은 고사하고 생존부터가 온갖 장애물 투성이였다. ”울릉도에서는 배가 뜨지 않는 날이 사흘만 이어져도 비상이 걸린다. 분유와 우유가 동나고, 먹거리가 바닥 날 수 있으니 날씨가 나빠진다 하면 미리 식료품 사재기를 하는 것이 울릉도 생활의 기본 철학이다.“ (웰컴 투 독도문방구 58p) “자연과 날씨 앞에서는 ‘대체 왜?‘가 중요하지 않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지는 날은 집 구석구석을 단단히 단속하고 문을 정비하고 그저 이 바람과 파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웰컴 투 독도문방구 59p) 그럼에도 그녀의 꿈은 할머니가 될 때까지 독도문방구를 지키는 것이다. 소박하지만 소중한 그 꿈이 부디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2-01

포항에서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네 곳만 남아

어느 일요일 오후 1시쯤 길성관에 들렀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인데 테이블 여섯 개 중 빈 테이블은 하나만 남아 있었다. 길성관은 포항 원도심의 하나뿐인 중화요리점인 데다 SNS에 맛집으로 소개되면서 장사가 잘되는 편이다. 포항 손님이 대부분이지만 주말에는 외지에서도 많이 온다. 필자가 자리를 잡은 후에도 손님이 계속 들어오며 “짜장면 됩니까”라고 물었다. 카운터를 보는 분이 “짜장면은 다 떨어졌습니다”라고 답하자 손님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사가 안 돼 빈 점포가 수두룩한 원도심에서는 낯선 풍경이다. 지금 길성관은 강봉기 전 대표의 동생 가족이 운영하고 있다. 강봉곤 현 대표가 주방, 아들이 주방 보조, 부인이 서빙과 카운터를 맡고 있다. 길성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짜장면과 짬뽕이다. 짜장면은 6000원, 짬뽕은 7000원으로 요즘 고물가를 고려하면 ‘착한 가격’이다. 짜장면을 만드는 방법이 화교 1세대와는 달라졌다고 한다. 과거에는 돼지기름을 프라이팬에 두른 다음 돼지비계와 양파, 무말랭이, 늙은 호박 등을 넣고 볶았는데, 지금은 콩기름 식용유를 프라이팬에 두른 후 돼지고기 살코기와 양파, 생강, 마늘 등을 넣고 볶는다. 달걀지단에 버섯·양파 등 볶은 채소 넣고 말아서 튀긴 ‘겉바속촉’ 대표메뉴 짜춘결 솜씨 뛰어나 ‘생활의 달인’에 소개될 정도 강봉곤 대표 중국문화대학교서 비법 전수 길성관의 대표 메뉴 짜춘결 중화요리는 불맛이라고 한다. 짜장면도 재료를 고온에서 적당한 시간 볶아서 향을 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가정에서 짜장면을 만들기 힘든 것은 강한 불에서 재료를 볶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짬뽕도 강한 불로 가열해야 특유의 매콤한 맛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고온에서 고춧가루를 볶아 향을 낸 다음 채소와 해물을 볶고 육수를 섞는다. 이때 채소와 해물을 볶는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한다. 육수는 닭고기와 다시마, 돼지 뼈를 오랜 시간 끓여서 만든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정통 짬뽕의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수돗물을 끓여서 조미료로 간을 맞추면 짬뽕 흉내만 내는 것이다. 과거에 연탄불로 요리할 때는 주방장이 불을 다루기 힘들어 고생을 많이 했다. 가스불로 바뀐 뒤에야 주방장이 원하는 대로 불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면을 뽑는 방식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수타식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기계로 뽑아낸다. 드물게 수타식 짜장면을 만드는 곳이 있는데, 그런 곳에서는 주방에 에어컨을 설치해야 한다.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해서 땀과 열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길성관의 대표 메뉴는 짜춘결이다. 짜춘결은 달걀지단에 버섯, 양파 등 볶은 채소를 넣고 말아서 튀긴 요리로 껍질은 바삭하고 고소하며 속은 부드럽다. 강봉곤 대표는 SBS의 <생활의 달인>에 소개될 정도로 이 별미를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강 대표가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중국문화대학교 음식조리학과에 다닐 때 짜춘결 비법을 전수받은 것이다. 길성관은 과거에 신선한 닭요리를 내놓기 위해 닭을 키우기도 했다. 깐풍기 같은 닭요리 주문이 들어오면 곧바로 닭을 잡아서 요리했으니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길성관은 지금도 매일 죽도시장에 가서 신선한 채소와 해물을 구입해 좋은 요리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예전엔 신선한 닭요리 위해 직접 키우기도 지금도 매일 죽도시장서 채소·해물 공수 중화요리 배우려고 문 두드렸던 젊은이들 철가방부터 시작 훗날 독립해 요리점 운영 중화요리점의 문을 두드렸던 젊은이들 길성관은 과거에 손님이 많고 종업원도 여럿 있을 때는 코스 요리와 출장 요리를 했다. 지금은 손님이 줄어 종업원을 채용할 형편이 안 돼 코스와 출장 요리를 접었고 메뉴도 간소해졌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종업원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일 좀 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중화요리점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급여를 얼마 받고 싶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사장이 주는 대로 군말 없이 받았다. 세끼를 해결하며 중화요리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가출한 청소년이 중화요리점 문을 두드리는 경우도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처지에 숙식을 해결하고 일을 배우며 내일을 도모해보자는 각오로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사연이야 어떻든 중화요리점을 제 발로 찾아온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철가방 배달부터 시작해 주방 보조를 거치며 차근차근 중화요리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훗날 독립하기도 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화교가 운영하는 곳에서 배워서 독립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1970년대 포항에서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서른 곳 정도였고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열 곳도 안 되었다. 지금은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은 네 곳(길성관, 부산각, 동순관, 동해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한국 사람이 운영하고 있다. “중화요리점도 변해야 살아 남을 수 있어 신세대 맞는 새로운 메뉴 개발하려 애써" 중화요리점도 변해야 살아남아 길성관에는 중국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이 곳곳에 놓여 있다. 그중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관우상, 여러 아이가 노는 장면을 그린 백자도(百子圖)가 눈길을 끈다.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는 서빙 로봇을 바라보던 강봉기 전 대표가 말을 꺼냈다. “중화요리점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옛날 메뉴만 고집하면 손님들이 좋아하겠습니까. 하나둘 떨어져 나가겠지요. 그래서 신세대에 맞는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짜장면, 짬뽕, 탕수육만 익숙한 사람에게 신세대에 맞는 새로운 중화요리가 무엇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화교 3세대의 몫이 아닐까 싶다. 중앙상가에 길성관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노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시민제과(1949년 개업), 시정당(1953년 개업한 금은방), 코주부사(1953년 개업한 마크사)가 아직 간판을 달고 있을 뿐이다. 이 중에서 중앙상가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은 강봉기 전 대표뿐이다. 음식에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중국에는 없고 한국에만 있는 중화요리 짜장면. 오랜 세월 숱하게 삼킨 그 검은 면 속에 우리의 빛바랜 추억이 스며 있다. 그 특별한 맛을 간직한 중화요리점이 우리 곁에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란다. 〈끝〉 글 : 김도형(작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30

초지에서 딴 돌배 나무 과실 ⋯ 단단하고 달아 갈증·허기 해소

1883년 첫 개척민 54명 입도 ⋯ 암수 한 마리씩 소도 실어와 번식 초대 도장에 임명된 선주민 전석규, 일본인과 쌀 거래하다 파면 사람들은 추락을 두려워 하지만 실상 누구나 바닥에서 태어나 오늘은 소등어리 아래 초지의 돌배나무에서 돌배 몇 개를 따 갈증과 허기를 채운다. 돌배는 작지만 과육이 단단하고 달다. 크기만 크고 푸석한 배 맛에 고개를 돌리곤 했는데 오늘 진짜 배를 만났다. 이 돌배즙이 술병에는 명약이다. 여기는 마치 작은 나리 분지 같다. 깃대봉 이후 두 번째로 떠나기 싫은 장소를 만났다. 하지만 다시 두리봉 고갯길로 접어든다. 고갯마루를 오르자 갈림길이다. 오른쪽은 소등어리 방향, 왼쪽은 윗통구미다. 이 길은 곳곳이 허물어져 위험천만하다. 나무 말뚝이나 가드레일이 비바람에 파손된 듯하다. 조심스레 길을 간다. 윗통구미 고개에 내려서니 다시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가면 통구미 마을, 오른쪽이 남양이다. 다시 시멘트 도로가 30분 남짓 이어진다. 길은 남양교 부근에서 끝난다. 남양에는 두 개의 계곡이 있다. 태하령길은 남서천교를 따라 가야 하고 남양-옥천 길은 남양교 계곡을 따라 가야한다. 옥천으로 방향을 잡는다. 조선 왕조 5백년 내내 주민 거주가 금지됐던 울릉도에 개척령이 반포된 것은 1882년(고종19)이다. 개척령과 동시에 몰래 숨어 살던 울릉도 선주민들에 대한 조선 조정의 쇄환 정책도 철폐됐다. 조정의 개척민 응모로 1883년 공식적인 첫 이주민들이 들어왔고 개척이 시작됐다. 하지만 개척령 이전에도 울릉도에는 선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개척령 반포 후 공식 입주가 허가된 뒤 울릉도 주민들의 지도자격인 초대 도장으로 임명된 이도 선주민인 전석규(全錫奎)였다. 전석규는 그때 이미 울릉도에 입도한 지 10년이 넘었다. 해마다 해류를 타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들 말고도 붙박이로 울릉도에 눌러살던 주민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다. 첫 공식 입주민 수는 이들 선주민들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 울릉도 개척위한 도장제 시행 1883년 7월 16일 허가를 받고 입도한 개척민은 16가구 54명이었다. 대황토포(태하), 곡포(남양), 추봉(송곳산), 현포 등지에 정착했다. 이들은 곡식 종자로 벼 20석, 콩 5석, 조 2석, 팥 1석과 철물 40근, 가마솥 2개, 사기그릇 6죽, 수저 30개, 돗자리 3죽, 무명베 5필, 삼 신발 5죽, 항아리 5좌 등을 이민선에 싣고 울릉도로 입도했다. 목수 2명과 대장장이 2명도 동승했다. 암수 한 마리씩 소도 실어와 종자 소로 이용했다. 개척민들은 이주 3개월 만에 310두락(약 3.3ha)의 농토를 개간했다. 그만큼 자기 땅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이다. 오늘날 울릉도는 경상도에 속하지만 그 뿌리는 전라도 섬 출신 선주민들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개척민들이니 울릉도는 융복합의 신세계였다. 도장제(島長制)는 조선 정부가 울릉도 개척을 주관하기 위해 현지 관리인을 임명해 운영한 제도다. 1882년 8월 말 울릉도의 첫 도장에 임명된 전석규는 이규원(李奎遠)과 필담을 나눌 정도로 학식이 깊고 이규원이 울릉도를 검찰(조사)할 때 동행한 인물이었다. 공식 입도 허가 10년 전부터 울릉도에 거주했으니 전석규는 누구보다 울릉도 현지 사정에 밝아 첫 도장에 임명됐던 것이다. 도장제가 실시되면서 울릉도는 지방 관제상 울진현(蔚珍縣)에서 평해현(平海縣)으로 이속됐고 도장이 개척 사무를 관장했다. 하지만 전석규는 1884년(고종 21) 조정의 허락도 없이 일본 천수환(天壽丸) 선장에게 삼림 벌채 허가 증표를 써주고 쌀을 받은 죄목으로 파면되어 한양의 형조로 압송됐다.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道開拓使) 김옥균(金玉均)의 장계(狀啓)에 의하면, “울릉도의 목재를 일본 사람들이 몰래 실어간다고 하여 목재를 실어가는 배들을 잡아 사유를 따졌더니, 이 섬 도장의 표빙(票憑)을 가지고 돈과 쌀을 교환하기 위해 왔다고 하였다. 이 섬은 통상하는 항구가 아닌 만큼 국경을 넘어와 몰래 나무를 베는 것은 공례에 어긋나는 일이다. 해당 도장 전석규로 말하면, 금지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이익을 탐내어 법을 위반한 만큼 응당 중한 형벌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의 죄상을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하였다. 전석규는 곡식이 부족한 울릉도에서 나무와 쌀을 교환한 죄목으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전석규의 파면 후 삼척영장, 평해군수, 월송만호 등이 울릉도 첨사를 겸해 개척 사무를 관장했다. 1895년에는 월송만호의 울릉도첨사 겸직 제도를 폐지하고 다시 전임 도장을 두었다. 그해 8월에 도장의 명칭을 도감(島監)으로 고쳐 불렀다. 1900년 울릉도가 강원도 울진현에서 독립된 군으로 개편될 때, 초대 군수는 배계주였다. 울릉도 주민 배계주는 1895년 9월 20일 울릉도 도감으로 임명됐는데 1900년 10월 27일 울릉도가 울도군이 되어 정식 지방 관제로 편입될 때 초대 울도군 군수가 됐다. 일제의 조선 강점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배계주는 일본의 불법 벌목에 대해 적극 항의했다고 전해진다. 옥천 초등학교 앞 도로를 따라 걷는다. 일주도로 개통 전 도동과 사동 사이를 이어주던 옛길이다. 무릉교통 차고지 바로 아래 우산가스 앞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안평전 방향이다. 그대로 직진하면 남양으로 넘어가는 옛길이다. 안평전 방향으로 오른다. 이 길은 새각단을 지나고 안평전 마을 아랫길을 따라 도동에 이르는 산길이다. 우산가스를 조금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편 샛길로 가면 안된다. 해담길은 그대로 직진해서 가파른 길을 쭉 걸어야 한다. 계속되는 시멘트길 오르막은 결코 쉽지 않다. 약간은 지루한 시멘트 길을 가다가 옥천교 1.3km 지점에 갑자기 멋진 집 한 채를 만난다. △ 안평전과 중평전 마을의 서정적 풍경 산속에 웬 별장 같은 건물일까 싶은 집인데 사람이 사는 주택이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집 앞 풍경이 장관이다. 사동 앞바다 일몰 풍경을 나무 그늘에 앉아서 볼 수 있다. 동해바다를 온몸으로 품은 집. 집의 뒤쪽은 나물 밭이고 앞쪽은 조그만 텃밭이다. 집 앞에는 두 대의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다. 트럭이 안 보이는 것을 보니 나물 재배가 본업은 아닌 듯하다. 출퇴근하며 숲속에 사는 걸까? 이런 집에서 사는 이는 복되다. 도동 시내에서 자동차로 20분여분 거리나 될까. 그런데 주변에는 방해할 아무것도 없는 숲속의 집. 이런 위치에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안목은 혜안이다. 눈이 쌓인 겨울이면 내내 꼼짝없이 갇혀야만 하는 집. 그렇다면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가진 이가 사는 걸까? 때로는 실체를 몰라야 더 좋을 수도 있다. 굳이 문 두드리고 찾아가 물어보지 않고 싶은 집. 상상만으로 행복해지는 집이다. 도로를 따라 20여분을 걸으니 드넓은 초원이 나타난다. 집도 몇 채 있다. 중평전 마을이다. 불이 켜진 어느 집 마당에서는 노인 한 분이 장작을 패고 있다. 난방용 장작일 것이다. 산속의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 마을을 벗어나자 다시 갈림길이다. 산 위쪽으로 직직 하면 60m 쯤에 안평전이 있다. 안평전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성인봉이다. 도동으로 넘어가는 길은 여기서 우회전이다. 울릉 마리나 관광호텔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산불 감시초소 앞에서 다시 갈림길이다. 좌회전이 도동으로 가는 하산 길이다. 길의 끝자락에 서니 터널이다. 오른쪽은 사동 가는 길. 터널을 지나면 도동으로 통한다. 터널 안에는 인도가 있으니 그대로 통과하면 된다. 이렇게 울릉도를 온전히 한 바퀴 걸어서 일주했다. 굴곡이 많은 섬길. 그 높은 봉우리와 고갯길들을 걸었지만 이제 다시 가장 낮은 땅, 처음 그 자리다. 사람들은 추락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아무리 높은 곳에 있다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해도 처음 그 자리다. 사람들은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30

[군사 과학] 전투기 한 대를 만드는데 희토류가 얼마나 들어갈까?

희토류는 땅속 깊은 곳에서 오랜 세월 잠들어 있다가 인류 문명에 불을 켜기 위해 깨어난 ‘보이지 않는 보석’이다. 양은 적지만 쓰임은 거대하다. 스마트폰의 진동 모터, 전기차 구동 장치, 풍력발전 터빈, 우주항공과 국방기술까지—현대 기술문명의 숨은 근육이 바로 희토류다. 작은 원소 하나가 첨단 기술의 정밀성을 가능하게 하고, 한 줌의 자석이 거대한 산업을 움직인다. 희토류 광석은 실제 희토류 원소 함량이 매우 낮아 8톤 트럭 한 대분에서도 추출량은 제한적이다. 일반적으로 광석 1~7%만이 희토류로 전환되므로, 8톤 트럭 한대에 약 80~560kg 의 이 ‘보석’이 겨우 얻어진다고 한다. 최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불거진 희토류 분쟁은 이 자원이 단순한 광물이 아니라 ‘지정학적 힘’이라는 사실을 다시 증명한다. 세계 희토류의 정제·가공의 대부분을 장악한 중국이 수출 통제와 기술 규제를 강화하자, 일본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드러내며 해저 희토류 채굴과 다변화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갈등은 공급망의 한 축이 흔들릴 경우 글로벌 기술 산업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희토류는 이제 석유보다 더 전략적인 자원으로 평가받는다. 희토류의 주요 용처를 보면 왜 경쟁이 치열한지 쉽게 이해된다. 전체 사용량의 30~40%는 네오디뮴·디스프로슘 등으로 만든 영구자석이 차지한다. 이는 전기차 모터, 풍력발전기, 스마트폰 모터, 드론과 미사일 액추에이터 등 고효율·고성능 장치에 필수적이다. 자동차 배기가스 정화 촉매, 석유정제용 촉매에도 희토류가 쓰이며, 제트엔진이나 로켓에 들어가는 초내열합금에도 포함된다. LED·레이저·광학렌즈·디스플레이 등을 만드는 정밀 광학 재료 역시 희토류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첨단’이라는 이름이 붙는 거의 모든 산업의 핵심 원료가 된다. 특히 방위산업에서의 의존도는 매우 높다. 최신 5세대 전투기 한 대에는 약 300~450kg, 보통 400kg 내외의 희토류가 사용된다. 참고로 KF-21의 자체 중량은 약 1만2000kg(12톤)이다. 레이더, 통신장비, 유도장치, 비행제어 시스템, 전기식 액추에이터, 엔진 합금, 광학·센서 장비 등 수백 개 부품에 희토류가 들어간다. 기종마다 수치가 다소 다르지만, 희토류가 없으면 전투기 생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래서 희토류 공급망의 흔들림은 곧바로 국가 안보와도 연결된다. 이처럼 희토류는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힘’을 지닌 자원이다. 중일 갈등은 앞으로 이 자원을 둘러싼 패권 경쟁이 더욱 심화될 것임을 예고한다. 세계 각국이 자체 공급망 구축, 재활용 기술 고도화, 비(非)중국 공급원 확보에 뛰어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희토류는 인류 문명의 보석이자, 미래 기술 경쟁의 무대에서 국가 간 힘의 균형을 바꾸는 조용한 게임체인저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5-11-29

숨어 살던 조선인만 141명… 대부분 전복 채취·산삼 채약

115명이 전라도 출신으로 압도적… 강원도 14명·경상도 11명 불과 루이 16세 당시 라페루즈 백작, 울릉도 지나며 선박 건조 장면 목격 옥천 3교 드넓은 초지엔 산나물 운반 모노레일 산등성이까지 깔려 △ 옥천에서 출발한 산길 구간 해담길 남양에서 옥천으로 넘어가는 산길 구간은 1991년 남양과 통구미 마을을 이어주는 통구미 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 자동차가 다니던 울릉도 순환도로의 일부다. 이제 자동차가 지나는 일은 거의 없다. 이 길은 서면의 남양에서 울릉읍의 옥천, 혹은 옥천에서 남양 어느 방향으로 넘어가도 무방하다. 난이도 역시 비슷하다. 오늘은 옥천에서 출발한다. 옥천 계곡을 따라 산으로 거슬러 오른다. 무릉 1교, 2교 두 개의 다리를 건너가면 무릉교통 차고지다. 울릉도의 시내버스들이 여기서 출발한다. 이 부근에서 안평전 방향으로 가면 해담길의 옥천- 의료원길 코스로도 이어진다. 차고지를 지나 옥천호텔 앞의 옥천 3교를 건넌다. 다들 작은 다리다. 이길 또한 이정표를 찾기 어려워 마을 어르신에게 여쭈니 돌아오는 대답. “이리 실렁실렁 올라가면 소 멕이는 데가 있고 그래요. 물어서 찾아가소.” 계속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사동 정수장. 이 일대의 식수 공급원이다. 정수장 입구에 고욤나무 한그루가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다. 몇 개를 따서 맛보니 달디 달다. 일종의 애기 감이다. 고욤나무는 고양나무 혹은 소시(小枾)라고도 한다. 한방에서는 열매를 따서 말린 것을 군천자(君遷子)라 해서 소갈·번열증(煩熱症) 등에 약재로 쓴다. 씨를 뿌려서 자란 고욤나무는 흔히 감나무를 접목할 때 대목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다시 길을 가는데 누군가 죽은 나무뿌리 하나를 길가의 바위 위에 올려놨다. 언뜻 보니 날아가는 용의 형상이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나무들도 저처럼 땅속에서는 용 한 마리씩 키우고 있구나! 옥천 3교를 지나면 갈림길, 여기서는 그냥 직진이다. 고갯마루까지는 오르막길 1.4km다.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서 갑자기 드넓은 초지가 나타난다. 소등어리 아래 초지다. 외딴 집 한 채가 초지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초지뿐만 아니라 산등성이까지 모노레일이 깔렸다. 밭에 기르는 산나물과 야산에 자라는 산나물을 채취해 운반하는 모노레일이다. 나물 철에만 와서 지내다 가는 집일까? 집안에는 인기척이 없다. 그런데 고양이 한 마리가 집 앞에 앉아 있다. 집고양이 같다. 주인이 잠시 외출 중일까? 아니면 가끔씩 들르는 것일까? 집 앞 초지에는 돌배나무 한그루가 돌배를 잔뜩 매달고 서 있다. 돌배나무 아래는 두기의 무덤이 있다. 필시 이 집에서 살다가 이승을 떠나신 분들이리라. 산속에서 나서 산속에 살다가 산속에 묻힌 이들. 삶은 어쩌면 그다지 넓은 영토가 필요치 않다. 평생을 마을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사람이나 세계 곳곳을 떠돌며 살다간 사람이나 무엇이 다를까. 모두 지구라는 행성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 가는 것을. 이 초원은 산 중이지만 바다 전망도 빼어나다. 사동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맑은 날은 머나먼 육지도 보일 것이다. 산중에서도 세상을 드넓게 보며 살 수 있는 곳. 밤이면 더 많은 우주의 별들을 보고 살아가리라. 그러니 대도시에 사는 삶보다 이 섬의 삶이 어찌 더 좁다고 할 것인가. 내륙의 도시인들이 밤거리 불빛 속을 유영할 때 이 섬 집의 주인은 은하계의 별들 사이를 유영할 것이다. 그야말로 우주적인 삶이니 대체 누가 더 넓은 세상을 사는 것이겠는가! △ 울릉도 숨어 살던 조선인 전라도 출신이 압도적 아마도 이런 평원이 있는 산 중이라면 울릉도 개척령 반포 이전에도 안무사들의 토벌을 피해 숨어살기 딱 좋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이렇다 할 길도 없었을 터이니 감시의 눈은 피할 수 있고 농사지을 땅도 충분하고 따뜻하여 숨어 살기에 최고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개척을 위해 고종의 명을 받고 울릉도를 조사한 이규원의 검찰 일기에 따르면 공식 입주가 금지됐던 당시 울릉도를 조사한 결과 이미 조선인 141명과 일본인 78명이 울릉도에 살고 있었다. 드러난 이가 그 정도였으니 이런 곳에 숨어 살던 이까지 포함하면 숫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당시 울릉도에 숨어 살던 조선인의 출신지는 전라도가 압도적이었다. 141명 중 무려 115명이 전라도 출신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전라도 흥양과 삼도 출신이었다. 흥양은 고흥, 삼도는 거문도를 말한다. 삼도 출신은 김재근, 이경화, 김내윤 등이었으며 바로 옆의 여수 초도 출신은 김내인, 김근서 등이었고 이경칠 등 순천 낙안 출신도 있었다. 강원도 출신은 14명, 경상도 출신은 11명에 불과했다. 당시 울릉도는 이미 작은 전라도였다. 특히 전라도 출신들은 해마다 지속적으로 울릉도를 찾아와 살다 가는 이들도 다수였다. 그래서 울릉도 지명들 대부분은 전라도 말에서 왔다. 141명의 직업은 채곽(전복채취) 129명, 산삼 채약 9명, 대나무 베기 2명 등이었다. 대다수가 어업을 위해 울릉도에 입도해 살았다. 울릉도는 이들에게 삶의 터전이자 직장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고향을 떠나 봄에 울릉도로 들어와 막사를 짓고 살면서 벌목을 해서 배를 짓는 틈틈이 전복과 물고기를 잡아서 말렸다. △ 울릉도를 기어코 지켜낸 백성들 가을철 새 배의 건조가 끝나면 배에 해산물을 가득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수백년 동안 반복했다. 조정의 처벌이 두려웠지만 그래도 어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울릉도를 찾아들었다. 조선 조정이 버린 섬, 그럼에도 기어코 울릉도를 지켜낸 것은 백성들이었다. 이때의 상황은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명을 받고 세계를 탐험하다 울릉도를 발견한 탐험가 라페루즈 백작의 저서에도 기록으로 남았다. 라페루즈(La Perouse) 백작은 프랑스의 해군제독 출신 해양탐험가였다. 1741년 남프랑스 귀오(Guo)성에서 태어나 1788년 남태평양 바니코로(Vani koro)섬에서 사망했는데 세계 탐험 항해 도중 1787년(정조 11년) 5월 27일 울릉도를 지나가며 주민들이 배 짓는 작업을 목격했다.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기 100년 전부터 울릉도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던 사실이 외국의 문서로 확인된 것이다. “나는 이 섬을 제일 먼저 발견한 천문학자의 이름을 따서 이 섬을 다줄레라 명명했다. 우리는 이 내포들에서 건조중에 있는 중국 배와 똑같이 생긴 배들을 보았다. 포의 사정거리 정도에 있는 우리 함정들이 일꾼들을 놀라게 한 듯했고, 그들은 작업장에서 50보 정도 떨어진 숲속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우리가 본 것은 몇 채의 움막집 뿐이었고, 촌락과 경작물은 없었다. 따라서 다줄레 섬에서 불과 110km 밖에 안 되는 육지에 사는 조선인 목수들이 식량을 가지고 이 섬에 와서 여름 동안 배를 건조하여, 이를 육지에 가져다 파는 것으로 보였다. 이 생각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의 서부 첨단부로 돌아왔을 때, 이 첨단부에 가려서 우리 선박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다른 한 작업장의 일꾼들이, 선박 건조 작업을 하고있는 중이었는데, 우리를 보자 그들은 놀랐다. 그들 중 우리를 조금도 겁내지 않는 것 같은 2~3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숲으로 도망하는 것을 보았다.” (라페루즈 탐험대의 ‘세계 탐험기’중) 1787년, 조선 조정이 바다와 섬을 등한시 하고 있을 때 프랑스 탐험가들이 울릉도까지 찾아왔었다. 그들이 섬에서 본 것은 조선의 병사들이 아니라 조정의 눈을 피해 숨어 살던 울릉도 선주민들이었다. 이렇게 또 프랑스인들에 의해 울릉도를 지킨 것은 수토사들이 아니라 백성들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27

포항제철 덕분에 전성기 열리지만 포항을 떠나는 화교들

길성관 - 부산각·중흥관, 일식집 승리식당은 그들이 즐겨 찾는 맛집 연말엔 예약 않으면 자리가 없어 ⋯ ‘쇼’ 마친 인기스타들도 애용해 부동산 소유 제한 등 한국 정부 차별 정책 지역 떠나가는 원인으로 1967년 10월 3일 포항제철 기공식이 열릴 즈음 포항제철과 관련된 기업의 많은 직원이 포항에 몰려왔다. 하지만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숙소와 식당은 태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포항을 대표하는 중화요리점인 길성관, 부산각, 중흥관 그리고 일식집 승리식당은 그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었다. 미쓰비시, 이토추 같은 일본 기업의 포항 파견직원들도 이 식당들의 단골손님이었다. 연말에는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붐볐다. 포항제철이 기공되면서 길성관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길성관 가까이에 시민극장이 있었다. 당시 시민극장에서는 쇼도 열렸는데, 남진, 나훈아, 문주란 같은 인기 스타들이 오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시민극장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인기 스타들도 가까운 길성관을 애용했다. 시민극장과 포항극장에서는 길성관에 주문을 자주 했다. 당시 극장에서는 명절 때 한꺼번에 결제하는 것이 관행이어서 길성관은 극장의 주문이 마냥 반갑지는 않았다. 어떤 날에는 재료가 소진되었다는 핑계를 대고 주문을 받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또 하나 다른 이유가 재미있다. 극장에 배달을 보낸 배달원이 영화를 보느라고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배달이 밀린 시간에 배달원이 한가하게 영화나 보고 있는 장면을 생각하면 길성관 대표는 열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등으로 떠나는 화교 장사가 잘되니 돈을 많이 벌었을 테고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화교의 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 정부의 차별 정책 때문에 심한 속앓이를 했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부동산 소유 제한이었다. 한국 정부는 1961년 외국인토지법을 공포하고, 공공의 목적에 필요한 구역의 토지에 대해 외국인의 토지 취득을 금지 혹은 제약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 한국 정부는 1962년 외국인토지법시행령을 공포하고 외국인의 토지 취득을 금지하거나 제한의 구역을 제시했다. (중략) 한국 정부는 1968년 7월 외국인토지법의 개정안을 공포하고, 거주를 목적으로 한 200평 이하의 토지와 상업용 50평 이하의 토지는 사용 신고만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해당 평수를 초과할 경우는 엄격히 규제했기 때문에 사실상 소유가 불가능했다. - 이정희, 『화교가 없는 나라』, 동아시아, 2018, 205∼206쪽. 부동산 소유 제한은 한국 화교에게 치명적이었다. 돈을 벌어도 투자할 길이 없었고, 이는 생존기반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IMF 외환금융위기 직후인 1998년에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이 해제되어 화교도 일정 규모의 상점과 토지의 소유가 가능해졌다. 거주 자격과 출입국에 관한 규제도 화교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국 정부는 1949년 11월 17일 「외국인의 입국출국과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외국인의 출입국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 법률은 화교에게 1년마다 거주 허가의 연장을 받도록 규정했지만, 1963년의 출입국관리법은 3년으로 연장했다. 화교는 출국할 때에도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지만, 새로운 출입국관리법의 규정에 따라 신고의 의무는 사라진 대신 재입국 허가를 받도록 했다. (중략) 화교에 대한 거주 허가 기간은 1995년에 5년으로 연장되고, 2002년에 영주권이 부여되면서 신고의 의무는 사라졌다. - 이정희, 앞의 책, 206쪽. 한국 정부는 화교의 경제적 영향력을 차단하는 등의 이유로 이런 정책을 시행했다. 이 상황을 견디다 못한 한국 화교는 대만을 비롯해 미국, 호주, 동남아시아로 나가야 했다. “바닷물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고 하지만 한국 화교처럼 거주국에 뿌리를 내린 화교가 드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화교에 대한 편견과 법률적 제약으로 인해 한국 화교의 숫자가 2만 명 아래로 내려가 한국에서 화교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중화권의 대표적 영자지인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3일 온라인 톱으로 보도했다. - 「전 세계에서 화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곳은 한국뿐」, 『동아일보』, 2019년 4월 3일. 귀화를 거부하는 화교 2세대, 귀화하는 3세대 강성모의 장남 강봉기 전 길성관 대표(이하 강 대표)는 포항 화교의 역사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부친이 포항 화교 1세대이고 본인은 2세대에 해당한다. 강 대표는 부산에 있는 화교학교를 다녔다. 화교학교는 서울과 부산, 대구에 있는데 강 대표는 이모가 있는 부산을 택했다. 부산 서면의 화교소학교와 초량의 화교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강 대표는 대만으로 건너가 대학교에 다녔고 군복무를 마쳤다. 한국의 대학교에 입학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왠지 대만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가친척 없는 대만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1985년에 포항으로 돌아왔다. 동생과 함께 일할 때는 동생이 요리를 하고 강 대표는 경영을 했다. 그렇다고 강 대표가 요리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부친 밑에서 요리를 배웠고 대만에 가서도 식당에서 요리하며 돈을 벌었다. 동생이 자리를 비울 때면 강 대표가 주방을 맡기도 했다. 강 대표와 같은 화교 2세대가 어느덧 70대에 이르렀다. 귀화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화교 2세대는 귀화에 소극적이다. 한국 정부의 차별 정책으로 인한 거부감 탓이다. 특히 화교의 부동산 소유를 사실상 막아버린 것은 가장 치명적이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차명으로 해도의 땅을 샀어요. 그런데 혹시라도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모르쇠로 잡아떼면 어쩌나 하고 밤잠을 못 자는 겁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다행히 그 땅을 한 기업에서 매수했고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돈을 돌려준 덕분에 걱정을 내려놓았지요. 그 후로 아버지는 차명 거래를 다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포항 화교도 다른 도시의 화교들처럼 상당수가 해외로 나갔고 포항에는 25가구 정도 남아 있다. “화교 2세대는 포항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니 포항이 고향이지요. 해외에 나간 분들도 한 번씩 포항에 와서 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눕니다. 화교 3세대는 아무래도 2세대와는 정서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3세대는 한국으로 귀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 대표의 외동딸도, 강 대표 동생의 아들딸도 한국으로 귀화했다. 글 : 김도형(작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27

이사부 장군, 나무 사자로 협박… 지증왕 3년 우산국 복속

서면 남양마을 랜드마크인 투구바위, 항복한 우해왕의 투구가 변해 왕비 풍미녀는 대마도주의 딸… 사치·보물 좋아해 망국 자초 전설도 사신 통해 조공 형태로 독자성 유지… 12세기 고려 인종때 정식 편입 △ 울릉군 서면의 중심지 남양 해담길 6구간 수토사길의 끝은 학포마을이다. 수토사길 다음은 7구간 태하령 길. 하지만 수토사길과 태하령길은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태하령길을 걷기 위해서는 다시 태하 삼거리로 돌아가 울릉공설운동장 옆길을 따라 오르거나 남양으로 가서 태하령을 넘는 방법이 있다. 학포에서 양방향의 태하령 길로 진입하려면 어느 쪽이든 도로를 한 시간쯤 걷거나 순환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 시간은 거의 두 시간 간격이어서 불편하다. 마침 버스 시간이 맞아 남양으로 넘어왔다. 태하령 길은 시멘트 도로가 많은데다 경사가 심하다. 그나마 남양에서 태하령을 넘어 공설운동장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이 조금은 덜 고달프다. 남양은 울릉군 서면의 중심지다. 서면사무소,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이 모여 있다. 남양(南陽)은 이름처럼 밝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랜드마크는 마을 뒤 안에 우뚝 선 투구바위다. 우산국의 마지막 왕 우해왕이 이사부에게 항복하기 위해 벗어놨던 투구가 바위로 변했다는 슬픈 전설이 스며있다.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싣고 왔던 나무 사자는 사자 바위로 변했다. 우산국 패망의 전설이 깃든 땅이 남양이다. 삼국사기 지증왕 13년(512년) 6월 기사에 우산국 패망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된 뒤 우산국을 복속시켰다. 우산국의 면적은 사방 백리. 지세가 험했다. 무력으로 복속시키는 것이 어려울 듯하여. 계략을 써서 복속시키기로 하고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해안에 이르러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모두 밟아 죽일 것이다. ” 협박하자 곧 항복했다는 것이 대략의 내용이다. 나무 사자는 단지 나무 사자였을까? 신라가 두려워할 정도의 무장력을 가졌고, 소국이지만 나라의 형식까지 가진 우산국 사람들이 그토록 무지했을 까닭은 없다. 나무 사자는 장갑차 같은 신무기였거나 어떤 상징일 것이다. 정복했다고 하지만 실상 싸움도 없었고 저항도 없었다. 우산국으로서도 굳이 무력으로 싸워서 얻을 이득이 없으니 항복하는 형식을 취하고 독자성을 보장받았던 것은 아닐까? 우해왕이 잡혀갔다거나 죽임을 당했다거나 그의 자녀들이 인질로 갔다거나 그런 내용도 없는 것을 보면 그 추측이 타당해 보인다. 게다가 이후에도 신라나 고려의 한 지방으로 편입되지 않고 독자성을 인정받으며 사신을 통해 조공한 것을 보면 우산국은 신라 복속 이후에도 멸망하지 않고 오랜 세월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대마도주 둘째딸 풍미녀 우산국 패망에 일조 우산국의 패망과 관련해서는 그의 왕비 풍미녀 탓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풍미녀는 대마도주의 셋째 딸이었다. 대마도 왜구들이 우산국까지 노략질을 다녔다. 우해왕이 군사들을 이끌고 대마도까지 찾아가 도주와 담판을 했고 항복 문서를 받은 뒤 풍미녀와 혼인을 하고 우산국으로 함께 돌아왔다. 대마도와 울릉도가 혼인 동맹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풍미녀는 사치스럽고 보물을 좋아했다. 그래서 우해왕은 보물을 구하기 위해 부하들을 시켜 신라까지 노략질했다. 신하와 백성들은 이를 걱정하고 그러지 말 것을 간청했지만 우해왕은 듣지 않았고 그러다 마침내 신라에 점령당했다. 후일담의 진위야 알 길이 없지만 우산국이 대마도를 대등할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가졌고 신라를 침범할 정도로 대담한 해적 국가였음을 추론케 하는 이야기다. 고려 때까지도 독자적인 지배세력이 있었고 독자성을 인정받았던 우산국이 멸망한 이유는 실상 신라나 고려 때문이 아니었다. 여진족의 침략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 현종 때 여진족의 약탈로 농사를 못 짓게 된 우산국에 이원구를 파견하여 농기구를 희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진족의 침략을 받은 우산국 사람들이 고려로 도망 왔다는 기록도 그 사실을 뒷받침 한다. 우산국이 고려의 정식 지방기구로 편입된 것은 12세기 중엽 인종 때다. 이는 어떤 형태로든 12세기까지 우산국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이후 울릉도는 주로 고려나 원나라가 목재를 징발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울릉도의 원시림 거목들은 고려대장경 판목의 재료가 됐고 원나라의 선박 건조용 목재가 되기도 했다. 어느 때는 10여 척의 배에 목재를 가득 싣고 갈 때도 있었다고 하니 원 간섭기에 울릉도의 원시림이 상당 부분 파괴됐을 것이다. 역사에서 우산국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고 만 나라다. 여전히 미스터리한 왕국이다. △ 남양에 다양한 고분군 울릉도에 대한 조선시대 기록은 태종 3년부터 시작된다. “강원도 무릉도 거주민들에게 육지에 나오도록 명령하였는데 이것은 감사의 품계에 따른 것이다.”(태종실록 3년8월 병진) 태종 12년에는 보다 구체적인 울릉도 현황 보고가 등장한다. 강원도 관찰사가 울릉도 유산국의 섬사람에 대해 보고하다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유산국도(流山國島) 사람을 처치하는 방법을 의논하였다. 강원도 관찰사가 보고하였다. “유산국도(流山國島) 사람 백가물(白加勿) 등 12명이 고성(高城) 어라진(於羅津)에 와서 정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무릉도(武陵島)에서 생장하였는데, 그 섬 안의 인호(人戶)가 11호이고, 남녀가 모두 60여 명인데, 지금은 본도(本島)로 옮겨 와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이 동에서 서까지 남에서 북까지가 모두 2식(息) 거리이고, 둘레가 8식(息) 거리입니다. 우마(牛馬)와 논이 없으나, 오직 콩 한 말만 심으면 20석 혹은 30석이 나고, 보리 1석을 심으면 50여 석이 납니다. 대[竹]가 큰 서까래 같고, 해착(海錯))과 과목(果木)이 모두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하여 갈까 염려하여, 아직 통주(通州)·고성(高城)·간성(杆城)에 나누어 두었습니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4월 15일 기사 3번째기사) 남양에도 현포처럼 고분들이 많다. 남양천을 따라 산 쪽으로 올라가다 친환경 사료 공장을 지나면 남서동고분군 이정표가 나온다. 주민 한 분이 나물 밭을 일구고 있다. 약간의 계단을 오르면 집 뒤 안에 고분들이 있다. 고분은 덤불 속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현포 고분과 거의 흡사하다. 무덤을 머리 위에 두고 들어선 집. 생사가 나란히 이웃지간이다. 저승과 이승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대문 밖이 황천이란 말이야말로 삶의 진실이다. 고분을 내려와 다시 이승으로 진입한다. 발전소 지나 남양천 좌측 고갯길이 태하령으로 가는 길이다. 1.5km 가량의 숲속 오솔길. 옛사람들이 오가던 삶의 통로다. 두 발 만이 유일한 이동 수단이던 시절의 울릉도. 이 옛길은 울릉도 옛사람들의 걸음걸음을 다 기억하고 있을까? 남양에서 한 시간 반쯤 걸으니 태하령 고갯마루 부근이다. 산마루에 오르니 다시 갈래 길. 좌측은 구암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오른쪽이 태하마을로 가는 길이다. 이 숲길은 천연기념물들이 살고 있는 귀한 길이다. 내내 솔가지와 솔방울들이 바닥에 깔려있다. 무얼까? 그냥 솔방울 같지는 않은데. 이 솔방울들은 솔송나무와 섬잣나무 열매들이다. 일본에는 흔하지만 한국에서는 울릉도에만 유일하게 자생하는 나무들이다. 길가에는 너도밤나무도 문득문득 서 있다. 이 또한 울릉도에만 사는 귀하신 몸들이다. 숲은 천연기념물 50호로 보호받고 있다. 이렇게 또 귀하디 귀한 길을 걸었다. /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26

AI·SMR 등 미래 경주 위해 전문가들 집결… 경주의 선택은?

천년고도 경주시가 2025 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전 세계에 ‘경주’라는 도시브랜드가치가 크게 높아졌다. 경주시는 그동안 역사문화 관광도시로만 알려지고 있었으나 기후 변화 대응과 관련한 국가 에너지안보를 책임지는 한국수력원자력의 총본산이 자리한 이후 점차 대한민국 원자력산업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기에다 경주는 자동차산업의 철강소재(포항)와 완성차(울산)를 연결하는 해오름동맹의 중심 산업도시(자동차부품제조)의 면모를 갖춘지 오래다. 경주시는 역사문화 유산은 물론 자동차부품제조업, 원자력산업, 양성자가속기 등 첨단과학기술 등을 적극 활용해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원자력산업의 중심 도시 경주의 미래를 위한 선택의 기로에서 ‘2025 경북 원자력포럼’이 열렸다. 26일 경주 강동리조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이번 포럼에는 각계 전문가들이 현시대의 화두인 SMR·AI·수소환원제철 등을 주제로 경주가 어떠한 선택을 할지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 UNIST 연구부총장인 안현실 바른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상임대표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김준우 교수, 우상익 한국원자력연구원 단장, 손병수 포스코홀딩스 상무, 양희창 원자력산업정책연구원 본부장이 주제발표를 각각 진행했다. “초광역권서 규모화·특성화 두 토끼 잡아야” / 기조강연 안현실 UNIST 연구부총장 미래를 미리 가보는 세계 3대전시회, 즉 CES, MWC, 하노버 메세가 똑 같은 세쌍둥이로 가고 있다. AI전환과 탄소중립이 공통점이다. 자본주의 운동 법칙이 원래 그렇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과 에너지로 혁신해왔다. 지금은 AI전환을 통한 새로운 시장 창출과 이를 뒷받침할 탄소중립 에너지가 새로운 자본주의의 시대정신이다. 이는 인류의 진화 법칙, 새로운 먹이와 이를 찾기 위한 용이한 이동(인류가 사족 보행에서 이족 보행으로 진화했듯이)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자본주의 진화는 인류진화의 방향과 일치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AI시대 미래산업도 이 맥락에서 이해하고 찾아나가야 살아남는다. AI전환과 에너지 사이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벡터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AI시대 국가간 산업전쟁의 본질이다. AI 시대 최후의 산업전쟁이라고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기본적으로 지금까지의 산업전쟁이 인구증가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AI시대 산업전쟁은 인구감소 시대에 해당한다. 마지막 생산성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지난 250년간은 인류 발전사에서 특이점이나 다름없는 성장의 역사였다. AI는 이 특이점 기간의 마지막 산업혁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즉, 육체노동을 절약하는 기술혁신이 지식노동을 절약하는 기술혁신으로 드디어 산업혁명이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 최후의 산업전쟁 시대에 지역혁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역혁신의 두 축은 특성화와 규모화다. 지금까지는 잘게 쪼갠 지역혁신으로 규모화가 방해받아왔다. 말이 지역혁신생태계이지 임계규모가 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초광역권으로 규모화와 특성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게 지역혁신의 돌파구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 정부의 5극 3특 지역혁신 전략은 실험해 볼 만한 시대적 가치가 있다. 경주도 대구와 경북, 즉 대경권이라는 초광역권에서 미래산업을 찾아야한다. 경주는 지리적 위치상 또 다른 초광역권인 동남권(부산·울산·경남)과도 연결이 된다. 어쩌면 대경권과 동남권 다 묶어 그 속에서 경주의 미래산업을 찾아갈 전략을 세우는 게 가장 전략적인 방향이 될 수 있다. 경주가 이른바 남부경제권 창출의 중심으로 들어와 수도권으로(대륙으로), 바다로(해양으로) 연결되어 웅비하는 구도를 꿈꾸지 못할 이유가 없다. 3국 시대와 통일 대업이라는 역사적 개척정신을 되살릴수 있지 않겠는가. AI와 에너지는 경제와 안보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국가의 전략산업 분야다. 지역이 이런 분야를 공략해야 살아남는다. AI의 지정학, 에너지의 지정학에시 경주의 미래를 찾아야 한다. “명실상부한 원자력산업 메카로 자리매김” / 주낙영 경주시장 환영사 이번 포럼은 매우 뜻 깊은 해에 열렸다. 경주는 원자력의 A에서 Z까지 전주기가 모인 도시다. 경주는 원자력발전소부터 한수원 본사, 중저준위방사성폐기장, 원자력 인력 양성기관, 중수로 폐기물 처리 등 다양한 기관, 시설 들이 집적돼 있다. 이렇게 경주가 원자력의 중심도시가 된 계기는 20년전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을 유치할 당시 시민의 89.7%가 찬성해 다른 지역과의 경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경주에서 이 시설을 유치함으로써 이후 원자력 관련 시설들이 하나씩 둘씩 모이게 된 것이다. 지난 10년간 경주시는 2조5000억 원의 지원을 받았으며, 앞으로도 1조 원 정도는 더 지원을 받게 될 것이어서 경주는 원자력산업의 메카로서 발전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 오늘의 주제는 매우 큰 의미있는 내용을 다룬다. 전 세계적으로 AI시대의 열풍을 맞이하고 있다. 경주APEC 정상회담에서도 경주선언, AI이니셔티브 등 중요한 합의가 있었다. 지금 우리는 AI가 세계를 그리고 미래의 경주를 바꾸게 될 패러다임 변화의 중심에 서있다. 지금 포항과 울산에 AI의 데이터센터들이 유치되고 있다. 여기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산업은 경주로도, 또 원자력산업과도 긴밀히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오늘의 이 포럼에서는 주옥같은 주제들이 논의된다. 오늘 시민들께서 많이 참석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미래산업 선도 도시 도약 위해 노력할 것” / 이동협 경주시의회 의장 축사 원자력포럼을 이렇게 성대하게 개최하게 된 데 대해 주낙영 경주시장님과 지역 문화창달에 힘써 오신 경북매일신문 최윤채 대표이사님, 그리고 참석해 주신 내외귀빈 여러분과 기조강연 및 주제발표를 맡아주신 전문가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최근 AI를 비롯한 첨단기술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번 포럼이 경주시민을 비롯한 각계가 최신 기술을 공유하고 함께 미래를 모색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리라 생각한다. 오늘 포럼을 계기로 경주가 미래 산업을 선도하는 도시로 도약하는 중요한 발판이 마련되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 경주시의회도 미래 경주의 올바른 선택을 위해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 “원자력산업의 새로운 비전과 기회 기대” / 권원택 월성원자력본부장 축사 경주시가 2025 APEC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에 대해 축하드린다. 지금 전 세계는 디지털전환(DX)이나 인공지능(AI)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와 관련 각 분야별 산업계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경주의 미래 에너지 전략에 대해 논의하는 이번 포럼은 매우 뜻깊은 자리다. 월성원자력본부는 경주시민과 국민들로부터 받아 온 신뢰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경주시가 지속가능한 에너지산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이번 포럼이 경주시가 원자력산업의 새로운 비전을 그리고 또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진홍경제에디터·황성호기자

2025-11-26

하늘 높이 뻗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팽나무’

작은 돌산으로 된 반달 모형의 동산이지만, 이곳은 낙동강과 넓은 평야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같은 곳이다. 돌산 주변은 아기자기한 농촌 주택이 둘러싸고 있어 이 또한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 정상에는 푸른 가지를 하늘 높이 사방으로 펼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팽나무’가 가을 햇살을 품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풍경은 마을에 높이 꽂은 희망의 푸른 깃발이며, 낙동강 홍수의 범람을 막는 제방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500년이라는 반세기의 오랜 세월을 묵묵히 낙동강 하류 홍수의 범람을 막고 마을의 평화와 평야의 안전을 지키며 살고 있다. 그러던 중 2022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종편 드라마에 출연함으로 그는 ‘우영우 팽나무’란 이름으로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드라마 출연 유명 인사 ‘우영우 팽나무’ 500살, 키 16m·가슴둘레 6.8m의 거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마을의 수호목’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터전 주남저수지 낙동강 물줄기가 만들어낸 배후습지 위 사람의 손으로 제방 쌓이며 지금의 모습 때마침 공직자 출신의 모임인 ‘문경회(文卿會)’가 창원에서 열리게 되어 ‘우영우 팽나무’ 노거수를 한번 보고 싶다고 제안하자 유사인 창원의 원촌 선생께서 흔쾌히 이를 받아드려 ‘우영우 팽나무 노거수’와 ‘주남저수지’를 일정에 넣어 특별한 생태 문화 체험을 누렸다. 거기에 우리 일행을 안내까지 해 주어 더 없는 즐거운 가을 여행이 되었다. 그는 모임의 분위기를 웃음꽃으로 피우는 남다른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공직에 있을 때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높은 직위까지 올랐다. ‘우영우 팽나무’는 창원 의창구 대산면 북부리 102-1번지, 동부마을 언덕 위에 주소를 둔 나이 500살, 키 16m, 가슴둘레 6.8m, 앉은 자리 27m의 거인이다. 그는 낙동강과 평야가 어우러진 경관 속에서 마을의 상징으로 2022년 10월 7일 천연기념물 제673호로 지정되었다. 마을의 수호목으로 주민들은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있다. 그 우람하고 장엄한 모습에 압도되어 우리 일행은 경외감을 표하고 그와 함께 기념 촬영도 하고 노래로 재롱도 떨었다. 창원의 화정 선생과 원촌 선생께서 가곡을 한 곡 멋지게 뽑았다. 노래는 황혼의 심금을 울리고 낙동강 물 따라 남해로, 갈바람 따라 높고 푸른 하늘로 울려 퍼져나갔다. 이곳 언덕의 작은 고갯마루에 살고 있는 화정 선생의 집안 동생 집에 초대되어 다과를 즐기면서 동생은 ‘우영우 팽나무’를 늘 볼 수 있고 사계절 주변 농촌 경관이 아름다워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가까이 낙동강 둔치에는 요즘 가장 핫하게 떠오르는 파크 골프를 많은 시민이 즐기는 모습은 나에게는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핵심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천재 변호사 우영우가 대형 로펌 ‘한바다’에 입사하여 다양한 사건을 맡으며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사회가 규정한 정상의 틀과 다르지만, 그 다름의 속에서 진실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과 순수한 정의감을 지니고 있다. 작품은 법정 드라마의 외형을 띠지만, 실은 장애와 편견, 인간의 다양성과 사회 정의 그리고 공감의 회복이라는 깊은 주제를 담고 있다. 대사 한 줄 한 줄이 따뜻한 철학처럼 남는다. 우영우가 말하는 “고래는 혼자 다니지 않아요. 고래는 함께 헤엄쳐요.”라는 대사는, 혼자이지만 결코, 고립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팽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 민속에서 마을의 수호신, 정령이 깃든 나무, 바람과 기억의 나무로 여겨 왔다. 그 아래에는 당산제를 지내고, 마을회의를 하는 등 공동체의 중심이자 역사의 목격자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이 전통적 의미를 현대적으로 되살려, 팽나무를 법과 인간, 자연과 문명, 정의와 생명의 경계에 세워 놓았다. 그것은 문학과 철학이 만나 하나의 숲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드라마는 인간의 다름과 정의의 본질을 다루었고, 팽나무는 그 철학을 시각적, 상징적으로 구현한 생명의 상징이었다. 둘의 만남은 자연 속의 정의와 생명으로서의 인간을 일깨운 감동의 장면이 되었다. 이렇게 마을의 노거수는 얼마든지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여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나무와 함께 익어가는 삶을 실천할 수 있다. 바로 ‘우영우 팽나무’는 이러한 사례의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도로 확장 공사로 잘려 나갈 위기에 처한 한 그루의 팽나무는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비바람과 세월을 함께 견디며 마을 사람들에게 그늘과 쉼을 내어준 나무이다. 한 편의 드라마가 이 고요한 마을의 팽나무 노거수를 세상에 알렸다. 멀리서 많은 사람이 찾아와 조용한 마을은 순례지처럼 변했다. 팽나무는 여전히 말이 없지만, 그 침묵 속에는 세월의 이야기가 흐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소원 기도, 마을 어른들의 숨결이 바람결에 얹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다. 팽나무의 뿌리는 땅속 깊이 생명의 맥을 잇고, 그 가지는 하늘로 뻗어 다음 세대를 품는다. 그 모습은 마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정의의 형상 같다. 나무가 그랬듯이 우리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세상을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생명과 정의의 변론이 아닐까. 생명과 정의의 변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이 감동을 안고 우리는 이웃에 있는 생명의 물결이 머무는 곳, 주남저수지로 향했다.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과 동읍 일대에 자리한 주남저수지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 빚어낸 생명의 터전이다. 낙동강의 물줄기가 만들어낸 배후습지 위에 1920년대 사람의 손으로 제방이 쌓이며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농업용수 공급과 홍수 조절을 위한 인공 저수지였지만, 세월이 흐르며 이곳은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갈대밭과 연꽃, 마름, 가시연꽃이 뒤섞여 물 위에 작은 숲을 이루고, 해마다 겨울이면 수만 마리의 철새가 하늘을 덮는다. 가창오리, 재두루미, 저어새, 흰꼬리수리 등 멸종위기 새들이 이곳을 찾아와 쉼을 얻는다. 주남의 하늘은 새들의 노래로 가득하고, 물빛은 계절의 숨결로 반짝인다. 이곳은 생명이 머무는 하나의 세계이다. 사계절이 또렷한 온대의 기후 속에서 주남저수지는 언제나 변화하며 살아 있다. 봄이면 백로와 쇠오리들이 산란을 준비하고, 여름에는 연꽃이 만발해 수면 위에 붉은 마음을 띄운다. 가을이면 들판에는 황금빛으로 물들고 제방에는 물억새로 수놓는다, 겨울에는 하얀 두루미를 비롯하여 철새들이 하늘을 덮는다. 사람들은 철새를 보러 오고, 아이들은 생태학습관에서 생명의 순환을 배운다. 도시와 가까운 거리지만, 이곳에 서면 문명의 소음이 멎고 자연의 숨소리만 들린다. 주남저수지는 인간이 잃어버린 공존의 질서를 되찾게 하는 거울이다. 수많은 생명이 서로의 자리를 내어주며 살아가는 이 호수에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다는 뜻을 배운다. 제방의 억새꽃이 가을 낙조에 고개 숙이고 윤슬에 반짝이는 둥근 해를 품은 저수지의 생명체는 평온한 저녁을 맞이한다. 우리는 뚝방의 산책길을 걸으면서 조용히 황혼에 물들어간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주남저수지는… 저수지: 주남, 산남, 동판 저수지 총 926.5ha. 제방 9km 조류: 겨울철에 큰고니, 노랑부리저어새, 큰기러기, 물꿩, 물총새, 원앙 등 철새가 월동하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철새 도래지 수생 식물: 33목 69과 233종, 연꽃, 자라풀, 통발, 물억새, 생이가래, 마름, 개구리밥 등 수서 곤충: 170여 종, 소금쟁이, 잠자리, 게아재비, 물자라 등 어류: 가물치, 잉어, 붕어, 메기, 동자개 등이 서식한다

2025-11-26

“행정이 먼저 움직인다” 문경시, 적극행정이 만든 ‘6가지 혁신’

문경시가 ‘적극행정’을 조직문화 핵심 가치로 선포하며 실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 전 부서에 배포된 ‘문경시 적극행정 안내서’는 공직자들이 능동적인 행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실천형 지침서로, △적극행정 개념 △추진 체계 △면책제도 △우수사례 △소극행정 예방 기준 등을 상세히 담았다. 현장 중심의 사례 위주로 구성해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명확히 제시한 것이 특징이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적극행정은 시민이 체감하는 변화를 만드는 출발점”이라며 “행정이 먼저 움직이고 먼저 도와주는 문경시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실제 문경시는 최근 수년간 분야별로 눈에 띄는 적극행정 성과를 내며 ‘변화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아래는 문경시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6가지 적극행정 사례다. 관광 특화·스포츠대회 유치 공로 申 시장 ‘소비자 평가’ 인물대상 지적 민원 혁신, 타지서 벤치마킹 빈점포 방치 아자개장터 명소로 ‘박서진 닻별거리’ 전국 팬들 러시 □ 적극행정 리더십의 성과 — ‘대한민국 소비자 평가 우수대상’ 수상 2022년 ‘대한민국 소비자 평가 우수대상’에서 인물 부문 대상을 받은 신현국 시장의 수상은 단순한 개인 수상이 아니다. 취임 후 문경시는 항공테마파크·패러글라이딩·영상기반 산업 등 특화관광의 새 축을 세우고, 전국장사씨름대회·전국 유소년 농구대회·스포츠클라이밍 등 전국 단위 스포츠대회를 유치해 ‘전지훈련 1번지’라는 명성을 굳혔다. 또한 매주 수요일을 ‘민원인의 날’로 운영해 시민 의견을 직접 듣는 실천형 리더십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적극행정의 방향은 결국 시민 속에서 찾는 것”이라는 시장의 철학을 보여주는 사례다. □ ‘토지분할허가 사전검토제·통합위임장’ — 민원 병목을 뚫은 혁신행정 가장 시민 체감도가 높은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지적민원 혁신이다. 문경시가 도입한 토지분할허가 사전검토제는 민원인이 허가 가능 여부를 미리 확인함으로써 불필요한 측량비·서류 준비 비용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게 만든 제도다. 문경읍 A씨는 “이전에는 허가가 불가해도 측량비를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사전검토제는 실질적인 ‘민원 보호막’이 됐다”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통합위임장 제도는 여러 종류의 위임장을 하나로 묶어 문서 부담을 대폭 줄였다. 지적업무 대행자 B씨는 “민원인도 공무원도 모두 편해진 대표적인 적극행정”이라고 평가했다. 해당 정책은 경북도 ‘적극행정 우수사례’로 선정되며 도내 지자체의 벤치마킹 사례가 됐다. □ 식어가는 전통시장에 새 생명 — ‘가은아자개장터 외식창업 테마파크’ 개장 인구감소 지역을 되살리기 위한 적극행정도 눈에 띈다. 가은아자개장터는 오랜 기간 빈 점포로 방치됐지만, 문경시는 18억 원의 예산과 민·관 협력 모델을 통해 이를 ‘외식창업 테마파크’로 재탄생시켰다. 특히 연탄빵·떡린느·약돌돈가스·문경국수 등 10명의 청년 창업팀을 육성해 지역 특산물 기반의 메뉴로 시장을 활성화했다. 개장 행사에는 이틀 동안 2만 명의 방문객이 몰려 시장이 ‘관광형 먹거리 명소’로 변신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신현국 시장은 “먹거리와 관광을 연결해 폐광지역에 새로운 성장모델을 만들겠다”며 “청년 창업 생태계도 함께 키우겠다”고 말했다. □ 스타마케팅과 지역 상권 재생 — ‘박서진 닻별거리’ 조성 문화의거리가 10년 넘게 활성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문경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바로 트로트 스타이자 문경시 홍보대사 박서진을 중심으로 한 ‘닻별거리’ 프로젝트다. 신현국 시장이 ‘현역가왕2, 박서진 우승’을 먼저 예측하며 화제를 모았고, 박서진 팬덤 ‘닻별’이 문경에서 대규모 체육대회를 개최하면서 거리 재생 사업은 스스로 동력을 얻었다. 이는 스타마케팅을 도시 브랜딩에 적용한 전국 최초의 시도로 평가받는다. 시민들은 “문화의거리가 드디어 살아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반긴다. □ 세계대회·아시아대회·전국대회 잇따라 유치 — 스포츠도시 문경의 적극행정 문경은 ‘경북의 체육 심장’으로 불릴 만큼 스포츠 인프라가 강력한 도시다. 문경시는 전국규모 씨름대회·전국 유소년 농구대회·클라이밍 대회 등을 잇따라 유치하며 지역 경제 파급효과를 극대화했다. 전지훈련 인구 증가, 숙박·식음업 활성화, 지역 브랜드 이미지 상승 등 ‘보이지 않는 효과’까지 포함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 문경새재 케이블카 조성 — 관광의 지형을 바꿀 공격행정 문경새재 케이블카 사업은 단순한 관광 인프라 확충이 아니다. 새재의 경관·숭실대-문경대 캠퍼스타운 조성과 연계해 ‘머무르는 관광지’로 전환시키는 핵심 프로젝트로 추진되고 있다. 환경·문화재 규제 검토, 노선 최적화, 지역주민 의견 수렴 등 복잡한 절차 속에서도 문경시는 적극행정 전담 체계를 가동해 사업 추진력을 확보했다. 적극행정은 결국 ‘사람’을 향한다. 문경시가 최근 선보인 6가지 사례는 분야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바로 ‘행정이 먼저 움직였다’는 것, 그리고 ‘시민이 체감하는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문경시는 앞으로도 교육·홍보·사례 공유·우수공무원 인센티브 등 다양한 정책을 통해 적극행정 문화를 조직 전반에 정착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오늘도 문경시는 적극행정 중입니다.” 이 문장은 이제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도시의 변화와 시민의 삶 속에서 확인되는 실제 문경의 표어가 되고 있다. /고성환기자 hihero2025@kbmaeil.com

2025-11-26

안용복 납치 계기… 조정에서 2~3년마다 왜구 수색 토벌

불법 어로·벌목 일본인 축출 공적 기념 2017년 4층 규모 완공 1882년 이규원 검찰사 학포에 입도, 지도·복명서 조정에 올려 고종, 울릉도 개척령 선포… 16가구 54명 들어와 개척시대 열어 △ 수토 역사 담긴 수토역사전시관 태하마을 해변 끝자락에는 수토역사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수토(搜討)란 무슨 뜻일까? 전시관에서는 “수토사는 조선시대 울릉도와 독도에서 불법 어로와 벌목을 일삼는 일본인을 수색하고 토벌하기 위해 조정에서 2∼3년마다 파견한 관리를 일컫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전시관은 수토사들의 수토 활동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수토역사전시관은 2011년부터 사업비 192억원으로 공사를 시작해 2017년 11월 28일 옛 울릉중학교 태하분교 터(5234㎡)에 4층 규모로 완공됐다. 전시관에는 수토사들의 임무를 소개한 문헌, 수토사들이 조정에 올린 울릉도 지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수토사들이 타고 왔던 수토선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곳곳에는 또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정보, 수토 역사에 대한 정보나 자생식물 및 해양식물 등에 대한 정보를 수록한 미디어 시설도 마련되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다. 수토사가 울릉도를 순찰한 후 일행들의 이름을 남긴 각석문 주변에는 휴게 공간과 전망대도 있다. 전시관에서는 상설 전시 외에도 ‘수토사‘와 관련한 다양한 전시가 이루어진다. 전시관은 울릉도 수토가 안용복(安龍福) 도일 사건을 계기로 시행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1693년(숙종 19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안용복을 비롯한 어부 40명이 울릉도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일본 어부들과 충돌했고 그 과정에서 안용복 등은 일본 어부들에 의해 오키시마[隱岐島]로 납치됐다. 안용복 사건 이후 조선 정부는 한두 해 간격으로 강원도 월송만호(越松萬戶)와 삼척첨사(영장)를 울릉도에 보내 국법을 어기고 주민들이 몰래 거주하는지 감시하고 수색하여 토벌하게 했다. 실상 수토사들은 왜인들보다 조선인들에 대한 수토가 주된 목적이었다. 과도한 조세 수탈과 각종 노역을 피해 울릉도로 도망간 주민들은 수토사들에 의해 다시 육지로 잡혀 나가 처벌을 받고 각종 역역(力役) 동원됐다. 하지만 수토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강원도 영동 지역 백성들에게 부담시키는 바람에 폐해가 컸다. 결국 1894년(고종 31) 12월에 울릉도 수토 정책은 폐지되었다. △ 울릉도 숨어사는 백성들 왜구 취급하기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수토 정책을 수행했던 관리를 수토관이라 칭하고 있다. 수(搜)는 찾다, 뒤지다, 토(討)는 공격하다, 죄를 물어 벌하다, 찾는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수토란 우리 섬들을 침범한 왜구들을 수색하고 토벌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본도의 병사와 좌·우도의 수사로 길을 나누어 수토(搜討)하여 모든 왜인을 쏘아 죽일 만하면 죽이고 생포할 만하면 생포하여 형세를 보아 조치하되 한편으로 변방의 위엄을 보이고, 한편으로 행선(行船)을 익히는 것이 편할 것 같습니다. 경상도에서는 삼포 왜인이 있으므로, 만일 행선을 잘못하면 도리어 왜노(倭奴)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니 함께 거행하지 마옵소서. 그리고 도주(島主)에게 통문하는 일은 전의 논의에서 이미 정하였습니다.“(연산군일기22권, 연산 3년 3월 6일 무신 1번째기사) 그런데 안용복 사건 이후부터는 왜구들에게 해당하던 수토가 울릉도에 숨어 살던 조선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실상 울릉도에 숨어 살던 백성들을 왜구들과 다름없이 본 것이다. 1893년 이전까지 울릉도는 공도 정책으로 주민 거주가 금지됐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주기적으로 안무사나 ‘수토관’을 보내 주민들을 쇄환(刷還)하는 정책을 폈다. 주민들이 일군 터전이 왜구의 근거지가 되거나 주민들이 왜구와 결탁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군역과 부역을 피해 도망친 주민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런 ‘쇄환 정책’의 역사를 아카이빙 한 것이 수토역사전시관이다. 수토역사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섬의 역사는 여전히 섬사람들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마음이 아리다. 관의 수탈을 피해 또 먹고 살기 위해 섬으로 숨어 들어가 살았던 사람들. 그들을 ‘수색하고 조사'해서 잡아들여 형벌을 받게 한 이들이 수토사, 수토관, 안무사들이다. 토벌대장들인 것이다. 또 울릉도를, 독도를 지키겠다고 일본까지 가서 독도가 우리 땅이란 문서를 받아내고 돌아온 안용복에게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유배형에 처한 것이 조선왕조였다. 섬을, 울릉도를, 독도를 지킨 것은 결국 왕조가 아니었다. 좌수영의 천한 노꾼 출신 안용복 같은 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울릉도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해산물을 채취해 먹고 살던 백성들이었다. 그런데 울릉도를 지킨 백성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아니라 이들을 잡아들인 토벌대장을 기리는 역사관이라니. 섬은, 섬사람들은 여전히 천대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 섬에 대한 왜곡된 역사관을 바꿔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수토역사전시관은 울릉도를 지켜온 백성들을 기려온 역사관으로 바뀌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독도가 우리 땅이란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독도를 지킨 것은 처벌을 각오하고 울릉도에 숨어들어와 살던 울릉도 선주민들, 조선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 마을 뒷산이 학처럼 생겼다 하여 학포로 명명 수토 역사관을 둘러보고 다시 버스 정류장 쪽으로 되돌아와 삼도사 옆을 지나면 학포로 넘어가는 옛날 산길이 나온다. 사전 지식이 없으면 찾기 어렵다. 길가에 이정표가 있으면 좋을 듯하다. 옛길은 가파르다. 이런 깎아지른 산길을 걸을 때마다 새삼 지구가 둥글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멀리서 보면 수직에 가까운 이 길도 실상은 수직이 아니다. 둥글게 굽어져 있다. 지구상에 직선은 없다. 직선처럼 보일 뿐 모두가 곡선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가파른 수직의 길에서도 중력의 도움을 받아 두려움 없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아무리 높은 곳도 지구 반대편에서 보면 가장 낮은 곳이다. 높다고 생각하지만 높은 곳은 없다. 낮은 곳도 없다. 직선도 없고 높은 곳도 없으니 우리는 그저 공처럼 둥근 길을 끊임없이 돌고 돌 뿐이다. 높은 곳이라 환호할 일도 낮은 곳에 추락했다 절망할 일도 아닌 것은 그 때문이다. 20분 남짓 가파르더니 길은 다시 산의 허리를 감싸고도는 평탄한 길이다. 태하마을에서 고갯마루까지 30분 남짓 걸렸다. 학포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평탄하다. 산길을 내려서니 또 갈림길이다. 오른쪽 해변 외딴집 쪽으로 가면 포구로 이어진 도로가 나온다. 태하에서 학포항까지는 1시간 거리. 마을 뒷산이 학의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학포라 했다 한다. 작은 황토기미라고도 한다. 1882년 이규원 검찰사가 울릉도에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지 현황 파악을 해보라는 조정의 명을 받고 첫발을 디뎠던 곳이 바로 이 학포다. 학포 선창가 바위에도 각석문이 있어서 당시 상황을 전해준다. ‘임오명각석문’이다. 임오년에 이규원이 울릉도를 답사한 뒤 새긴 각석문이란 뜻이다. 이규원은 수행원 102명을 거느리고 1882년 4월28일 강원도 평해군 구산포를 출발해 다음 날 이곳 학포로 입도했다. 이규원은 학포를 출발해 태하, 나리분지, 성인봉, 저동, 도동 등을 거처 다시 학포로 돌아와 지도와 복명서를 작성했고 암각을 새겼다.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고종은 울릉도 개척령을 선포했고 1883년 4월부터 7월 사이 공식적인 입주민 16가구 54명이 울릉도로 들어와 개척시대를 열었다. 공식 입도 140여년, 울릉도는 여전히 개척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25

시대의 비극, 음악의 비극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서울대 일본연구소 이경분의 추천사다. 이런 내용이다. “정추의 초기 교향악은 서구 연주회장에 오르는 교향곡처럼 형이상학적이고 엘리트적인 것이 아니라, 농민들도 향유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가 쉽고 접근이 용이한 음악 장르가 될 수 있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되는 정추(鄭樞·1923~2013)는 누구인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주와 평양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유학했고, 이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활동한 작곡가다. 정철훈 작가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 평전’ 출간… 흩어진 선대 예술가 3형제의 삶과 예술 완성 南·北·소련·카자흐스탄 잇는 정추의 생애 고스란히… “한민족 문화의 정체성 연구 길 열어준 선구자” ▲소련 유학 중 김일성 비판하고 카자흐스탄으로 망명 1945년 1월 오사카로 징병돼 노동부대원으로 있다가 일제가 패망한 직후인 1945년 8월 31일 현해탄을 건너 귀향하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한국 현대사의 거친 파도 속에서 북한으로 건너가 평양국립영화촬영소 음악과장, 평양음대 교수로 활동한 정추. 1952년 1월엔 모스크바 유학 7기생으로 선발돼 ‘차이코프스키 명칭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소련의 저명 작곡가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 박사의 지도 아래 6년간 작곡을 공부했다. 1956년 그가 작곡한 첫 오케스트라 교향곡 ‘조선적 주제에 의한 교향조곡’은 그를 소련 음악계의 신성으로 발돋움시켰다. 그러나, 마치 영화와 같았던 정추의 삶에 다시 비극이 닥쳤다. 1956년 2월 스탈린 사후 3년 만에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 제1서기가 스탈린의 독재와 개인 숭배 청산을 위한 비판을 하고 이어 큰 파장이 발생한 것. 흐루쇼프에 의해 찾아온 ‘모스크바의 봄’을 계기로 정추는 1957년 10월 모스크바 광산대학에서 열린 재소련 북한유학생 동향회에서 ‘김일성 우상화 반대’ 발언을 하고는 소련으로 망명했다.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도 정추는 1958년 8월 모스크바음악원의 졸업 작품발표회에서 하차투랸 등 심사위원 전원에게 만점을 받고 음악원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해 9월 정추는 모스크바를 떠나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정치적 망명을 한다. 알마티에 정착한 1961년 4월 그는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유리 가가린을 기념하는 공연에서 자작곡 ‘뗏목의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해 소련 연방 전역을 매료시켰다. ▲저자 정철훈, 시와 소설, 평전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 바로 그 정추의 생애를 고스란히 담아낸 책이 출간됐다. 이름하여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 평전’(작가)이다. 남과 북, 그리고 카자흐스탄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선대 예술가, 3형제의 파란만장한 삶과 예술 세계를 조명한 작가 정철훈이 썼다. 자그마치 원고지 3500매 분량의 방대한 저작이다. 저자인 정철훈은 러시아 외무성 외교아카데미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계간 문예지 ‘창작과비평’에 ‘백야’ 등을 발표하며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살고 싶은 아침’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개 같은 신념’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 ‘만주만리’ ‘릴리와 들장미’ 등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다. 장르를 넓혀 소설로 건너간 정 작가는 ‘인간의 악보’ ‘카인의 정원’ ‘소설 김알렉산드라’ ‘모든 복은 소년에게’ 등의 작품을 펴내기도 했다. 전직 문학기자인 그는 평전과 르포 형태의 글을 쓰는데도 빼어난 재능을 보였다. ‘북한 영화의 대부 정준채 평전’ ‘정근 전집’(전3권) ‘오빠 이상 누이 옥희’ ‘백석을 찾아서’ ‘내가 만난 손창섭’ ‘김알렉산드라 평전’ ‘뒤집어져야 문학이다’ ‘소련은 살아있다’ ‘옐찐과 21세기 러시아’ 등의 책이 그 재능으로 집필된 것들이다. 2024년엔 ‘박인환상’ 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추의 조카이기도 한 정철훈은 “선친인 동요작곡가 정근의 전집과 백부(伯父)인 정준채의 평전에 이어 이번에 정추 평전을 출간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그리고 카자흐스탄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던 선대(先代) 예술가 3형제의 삶과 예술 세계를 조망하고자 했던 오랜 숙원을 이뤘다”고 말했다. ▲국적 4번 바뀐 디아스포라 정추의 삶 면밀하게 추적 한양대학교 세계지역문화연구소 김보희는 정추를 “카자흐스탄의 작곡가이자 음악인류학자로서 20세기 한민족 문화예술을 기록하고 보존하여 한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선구자”라고 평가한다. 정추는 그의 90년 삶 중 22년은 남한의 국민으로, 13년은 북한에서, 17년은 무국적자로, 16년은 소련 공민으로, 22년은 카자흐스탄 공민으로 떠도는 삶을 살았다. 국적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는 사실은 그가 냉전의 20세기 현대사가 낳은 ‘비극적 디아스포라’란 걸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책을 쓴 정철훈은 사반세기 동안 한국과 카자흐스탄을 오가며 정추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에세이 형식으로 쓴 ‘프롤로그’― 알마티에서 온 편지, 첫 방문, 모스크바의 밤, 24시간만의 장례식, 죽음의 징후, 네 번째 희생양 등의 챕터를 완성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통상의 평전과는 다소 다른 형태를 보이는 문체와 서술 구조 등은 정철훈이 다수의 시와 소설을 완성해본 경험에서 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책에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은 또 있다. 정추의 친형인 북한의 영화감독 정준채(1917~1980)의 서신을 통해 1950년대 북한 예술계의 동향과 두 형제의 예술을 향한 여정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펴낸 출판사는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 평전’을 “시인이자 소설가, 탐사작가 정철훈이 완성한 필생의 역작이며,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의 삶과 예술 세계를 분단과 이산의 가족사를 넘어 민족사 전체의 차원으로 복원해냈다”고 소개하고 있다. 출판사의 설명이 책을 펴든 사람들에게도 설득력을 가진 문장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이제 책에 대한 평가와 감상은 고스란히 독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역사와 예술, 분단과 떠도는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25

섬사람 샅샅이 붙잡아 출항… 풍랑 재우려 소년·소녀 제물로

조선 태종 16년 전함 2척 이끌고 황토구미에 정박한 전 삼척만호 바람 멈추지 않자 꿈에 나타난 해신의 명에 따라 아이들 섬에 버려 양심 가책에 동상 모신 사당 건립… 해마다 삼월 삼짓날이면 당제 △ 명나라를 모방해서 공도 정책 시행 고려 말에 시작된 공도 정책이 조선조 들어와서는 더욱 강화됐다. 중국에 새로 들어선 명나라의 영향과 왕의 통치력이 미치는 곳만을 왕국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성리학의 이념 때문이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신왕조 수립 직후인 홍무4년(1371년) 연해 주민의 출해를 엄금하는 해금정책을 발표했다. “단 한 조각의 판자도 바다에 떨어뜨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이는 명나라 초의 군사적 불안 때문이었다. 명나라가 들어섰지만 당시 절강성과 복건성 연안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경사성과 방국진 같은 해상 세력이 왜구와 결탁해 명 왕조를 부단히도 괴롭히고 있었다. 이들이 더 큰 반란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주원장은 해금 정책을 실행했다. 반란세력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상업 활동을 막기 위해 해상 활동을 금지시킨 것이었다. 명나라를 사대했던 조선왕조가 명나라의 정책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조선 또한 신생 국가라 섬들까지 방위할 군사,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왕조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섬들과 해안가에서의 거주나 활동을 금지하는 공도, 해금 정책을 편 것이다. 허락 없이 섬에 들어가거나 거주하게 되면 반역죄로 다스렸다. 국가를 탈출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 공도 어긴 거주민들 토벌한 사례도 있어 공도정책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대부분 풀렸다. 전쟁으로 피폐한 국가의 재정 확보를 위해 섬의 개간을 통한 세수 확보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울릉도, 욕지도, 금오도 같이 왜와 가까운 섬들은 19세기 후반까지도 공도정책이 이어졌다. 공도정책을 어기고 울릉도에 거주하던 거주민들을 토벌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또 있다.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9월 2일 경인 1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김인우를 무릉도 등지의 안무사로 삼아 파견하다 김인우(金麟雨)를 무릉(武陵) 등지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박습(朴習)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로 있을 때에 들었는데, 무릉도(武陵島)의 주회(周回)가 7식(息)이고, 곁에 소도(小島)가 있고, 전지가 50여 결(結)이 되는데, 들어가는 길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하고 나란히 가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옛날에 방지용(方之用)이란 자가 있어 15가(家)를 거느리고 입거(入居)하여 혹은 때로는 가왜(假倭:왜구를 가장하여 중국이나 조선 해변을 약탈하던 가짜 왜구. 당시 해변에 살던 불한당이 간혹 무리를 지어 가왜구 행세를 함)로서 도둑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섬을 아는 자가 삼척(三陟)에 있으니, 청컨대, 그 사람을 시켜서 가서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여기어 삼척 사람 전 만호(萬戶) 김인우(金麟雨)를 불러 무릉도의 일을 물었다. 김인우가 말하기를, “삼척 사람 이만(李萬)이 일찍이 무릉(武陵)에 갔다가 돌아와서 그 섬의 일을 자세히 압니다.“ 하니, 곧 이만을 불렀다. 김인우가 또 아뢰기를, “무릉도가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어 사람이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가 혹 도망하여 들어갑니다. 만일 이 섬에 주접(住接)하는 사람이 많으면 왜적이 끝내는 반드시 들어와 도둑질하여, 이로 인하여 강원도를 침노할 것입니다.“ 임금이 옳게 여기어 김인우를 무릉 등지 안무사로 삼고 이만(李萬)을 반인(伴人)으로 삼아, 병선(兵船) 2척, 초공(抄工) 2명, 인해(引海) 2명, 화통(火通)·화약(火藥)과 양식을 주어 그 섬에 가서 그 두목(頭目)에게 일러서 오게 하고, 김인우와 이만에게 옷[衣]·입(笠)·화(靴)를 주었다. 태종 16년(1416), 울릉도 안무사로 임명된 전 삼척만호 김인우는 전함 두 척을 이끌고 울릉도 황토구미에 정박한 뒤 섬사람들을 샅샅이 잡아들였다. 뭍으로 귀항하기 전날 밤, 안무사의 꿈에 동해의 해신이 나타나 “어린 소년과 소녀 한명 씩을 두고 가라” 명했다. 하지만 안무사는 해신의 명을 무시하고 배를 출항시켰다. 유학을 신봉하던 안무사에게 해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배가 돛을 올리자 거센 풍랑이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 동자와 동녀신 모신 성하신당 그러던 어느 날 안무사는 문득 소년 소녀를 두고 가라던 꿈이 생각났다. 안무사는 섬사람들을 배에 태운 뒤 어린 소년과 소녀 한명씩을 뽑아 심부름 보내며 자신이 머물던 집으로 가서 필묵을 가져오도록 했다. 아이들이 배에서 내리자 안무사는 돛을 올리고 출항을 명했다. 바람은 이내 잠잠해 졌다. 뭍으로 돌아온 뒤에도 김인우는 늘 그때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몇 해 뒤 조정에서 다시 그에게 안무사를 명했다. 안무사는 울릉도에 도착해 전에 그가 머물던 거처를 찾았다. 그곳에는 서로 꼭 껴안고 죽은 소년 소녀의 백골이 놓여 있었다. 안무사는 그곳에 사당을 짓고 소년 소녀의 동상을 모셨다. 울릉도 황토구미에 있는 성하신당의 내력이다. 성하신당에 깃든 이야기는 실화와 전설이 뒤섞여 있다. 신당 안에는 섬에서 흔히 보는 장군신이나 용왕신이 아니라 동자와 동녀 신이 모셔져 있다. 성하신당의 비극적 설화는 제주 마라도 할망당의 애기업개 설화나 흑산도 진리당의 피리 부는 소년 설화와 유사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 설화 모두 뱃길을 막는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소년이나 소녀를 제물로 바친다. 재물로 바치기 위해 어른들은 모두 동일한 간계를 부린다. 두고 온 물건을 가져오도록 심부름을 보낸 뒤 배를 몰고 떠나버리는 것이다. 마라도의 소녀와 흑산도의 소년, 울릉도의 소년, 소녀는 모두 외로움과 굶주림에 지쳐 숨을 거두고 사후에는 신당에 신으로 모셔진다. 설화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인신공양 풍속이 일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인신 공양 과정에서 직접적인 폭력이 행사되지 않고 간계가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신 공양은 암암리에 지속되었고 범죄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죄의식을 씻어버리기 위해 희생자들을 신격화 시킨다. 희생자들이 신의 세계에 들어간 이상 현세에서의 범죄는 더이상 죄악이 아니게 된다. 희생자들의 신격화를 통해 범죄자들은 면죄부를 받는다. 성하신당, 밀랍으로 빚어진 동남 동녀상은 실물처럼 생생하다. 마치 그들의 원혼이 상에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황토구미 해안가에 바람이 분다. 억울하게 죽은 소년 소녀는 죽어 신이 됐어도 그들이 살던 땅에 끝내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조선시대, 섬은 뭍에서 벗어난 도피와 은둔의 땅이었지만 삶의 풍파는 섬이라고 비껴가지 않았다. 울릉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마음 편히 살 땅은 어디에도 없다. 조선의 공도정책에 따라 울릉도는 500년 동안이나 금(禁)섬이었다. 지킬 힘이 없으니 조정은 울릉도를 방치해 버렸다. 그래도 백성들은 기어코 섬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자리 잡을만하면 조정에서 보낸 군사들에게 붙들려 다시 뭍으로 쫓겨나길 반복했다. 그래도 백성들은 끊임없이 울릉도를 찾아들었다. 조선 조정이 방치한 울릉도와 독도를 끝끝내 지켜낸 것은 백성들이었다. 울릉도의 공식적인 주민 거주는 1882년부터 허락됐다. 오랜 세월 태하마을 주민들은 매년 삼월 삼짓날이면 성하신당에서 당제를 모셨다.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거기에 더해 근래에는 울릉군청 주도의 당제도 따로 모셔지고 있다. 주민들은 아직도 신당을 두려워한다. “지금도 무서워요.” 가끔씩 무속인들이 찾아와서 기도 드리고 간다. 소위 ‘신빨’을 받기 위해서다. 성하신당이 그만큼 영험하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일 터다. 울릉도는 그렇게 신화의 땅이 됐다. /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24

섬에 산다는 것 만으로 국법 어긴 중죄인… 주동자는 극형에

육지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은 가혹한 처벌에도 섬으로 숨어 들어 1893년 바위에 글 새긴 ‘각석문’ 흉년 넘긴 개척민 고난의 삶 웅변 황토를 나라에 상납한 태하마을, 한때 강원도 울도군 군청 소재지 △ 각석문에 기록된 울릉도 역사 현포마을 해담,길 노인의 나물 농장 끝 지점 오르막에 당도하면 순환도로와 이어지는 곳에 전망대가 있다. 현포항, 노인봉, 추산, 대풍감까지 탁 트인 전망을 선사한다. 여기서 태하삼거리까지는 2.68km다. 시멘트 길이지만 경사가 급하지 않고 내내 바다를 보며 가는 길이니 힘들지 않다. 현포령 고갯길 풍력 발전기 있는 곳이 북면과 서면의 경계다. 고개를 넘으면 내리막이 가파르다. 다행히 차도와 별도로 계단을 만들어 사람이 통행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내리막길의 끝은 삼거리다. 왼쪽은 일주도로, 오른쪽이 태하마을 가는 길이다. 차도 옆 샛길에 태하리 ‘광서명각석문(光緖銘刻石文)’ 안내판이 있다. 바위에 글을 새겼다는 뜻의 각석문은 울릉도 개척기의 기록이다. 1890년과 1893년에 새겨진 글인데 내용은 울릉도 개척기 서경수, 심순택, 이규원, 민종성 등의 공적을 기리는 것이다. 영의정 심순택은 1889년 쥐와 새들 때문에 농사 피해가 큰 울릉도에 양곡 지원을 건의해 조정에서 삼척, 울진, 평해의 환곡 중 300석을 지원토록 했다. 이 양곡 덕분에 울릉도 개척민들은 흉년을 넘기고 살아남았다. 개척기 울릉도 주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태하는 황토기미라고도 한다. 황토가 많이 나서 황토를 나라에 상납했는데 그래서 황토기미란 이름을 얻었다. 태하는 큰 황토기미, 고개 넘어 학포는 작은 황토기미다. 태하 해변에는 황토를 파냈던 흔적이 남아있다. 태하는 울릉도가 공도정책으로 주민 거주가 금지됐다가 공식 거주가 허락된 뒤 강원도 울도군(울릉군)이 처음 신설됐을 때 군청 소재지가 있던 마을이다. 1900년 10월25일 반포된 울도군 설치에 대한 칙령은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 석도로 관할해야 할 일”이라 했다. 독도를 그 당시에는 석도(石島)라 했다. 지금은 홀로 독을 써서 홀로 섬이 됐지만 당시에 독도의 이름은 독섬이었다. '그래서 한자도 석도다. 독은 돌의 전라도 지방 말인데 독도란 이름 또한 당시 울릉도, 독도를 누비며 살았던 거문도 등의 전라도 출신 선주민들이 남긴 유산이다. 홀로 섬이 아니라 돌뿐인 바위섬이라 독도라 불렀던 것이다. △ 울릉도 가장 오래된 신당, 성하신당 1883년 공식 입주한 개척민은 16호 54명이었다. 공식 입도 전에 살았던 선주민을 뺀 숫자다. 1896년 9월, 울릉도 도감(島監) 배계주(裵季周)의 보고에 의하면 주민은 277호 1,134명으로 늘었다. 울릉도는 우산국 이후 1500년 만에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태하는 조선 초기부터 조정의 관리들이 숨어 사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드나들던 마을이다. 버스 정류장과 서면사무소 태하 출장소 사이 작은 솔숲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울릉도의 가장 오래된 신당인 성하 신당이 그것이다. 신당 주변에는 9그루의 소나무가 경비병처럼 신당을 호위하고 서 있다. 선주민들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신당. 넉살 좋은 고양이 한 마리가 신당 안까지 따라와 비벼댄다. 신당 한쪽 귀퉁이에는 약수가 있어 나그네의 갈증을 풀어준다. 조선 시대 초기 국가의 섬에 대한 정책은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정책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독도 영유권 문제에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조선이 공도 정책을 시행한 적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근거가 빈약하다. 울릉도, 금오도, 욕지도 등 조선시대 말까지 공식적으로 입도가 금지된 섬들은 말할 것 없고 조선 초기부터 조정은 대부분의 섬에 사람이 사는 것을 금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여타 기록들이 이를 증거 한다. 또 현재 섬에 사는 주민들의 입도조(최초로 섬에 정착한 조상)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정착한 사실이 또한 이를 증명한다. 공도가 없었다면 그 이전 고려나 삼국시대부터 정착한 입도조가 있어야겠지만 아쉽게도 극소수 섬을 제외 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정 기간 섬의 역사가 단절됐다는 증거다. 우리가 공도 정책을 인정한다 해서 독도 영유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주민 거주를 금지 시켰을 뿐이지 영토를 포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조정이 거주를 금지시킨 울릉도에 백성들이 기를 쓰고 들어와 살면서 울릉도와 독도를 지킨 명백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왕조사만 역사가 아니다. 백성의 역사가 진짜 역사다. 또 공도정책은 왜구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민 거주를 금지시킨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섬이 왜구들의 근거지가 되거나 주민들이 왜구와 결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 그 진짜 목적이었다. △ 삼별초의 난 진압후 공도정책 시작 조선 순조 시대(1808년)에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 등이 왕명에 의해 찬진(撰進)한 책 만기요람에도 울릉도 공도의 목적이 적시되어 있다. 만기요람은 18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조선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들이 집약된 국가의 공식문서다 “이 섬은 가지도(可之島)로서 본래는 우산국이었는데, 신라 때 쳐서 빼앗았다가 뒤에 그들이 왜인들을 끌어들여 도적질을 할까 두려워서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몰아내고 그 땅을 비워 두었다.” (만기요람. 1808년) 울릉도로 숨어 들어가 산 사람들은 중죄인으로 다스렸다는 기록도 전한다. 공도정책은 섬에 사는 이들 중 주동자는 사형을 시킬 정도로 가혹했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김안(金安)이 수모(首謀)가 되어서 무릉도(茂陵島)로 도망해 들어갔사오니, 율이 마땅히 교형에 처하는 데에 해당하옵고, 그 밖의 종범(從犯)은 모두 경성(鏡城)으로 옮길 것을 청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 11월 25일 을사 1번째기사 1438년) > 주동자는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는 경성으로 옮겨 처벌을 받은 것이다. 섬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던 시절을 울릉도는 지나왔다. 육지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그 머나먼 섬으로 들어가 살았을까. 섬에 사는 것에 대한 처벌이 가혹했지만 그래도 뭍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은 목숨 걸고 섬으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섬에 사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국법을 어긴 중죄인이 됐다. 조선은 섬을 오래도록 버렸다. 조선의 섬에 대한 정책이 그러하였다. 공도정책의 시작은 고려 말 삼별초의 난 진압 이후부터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진도로 이주해 왕실 종친이었던 왕온을 옹립, 왕으로 삼은 뒤 왕궁을 건설하고 8개월 남짓 삼별초 왕국을 유지했다. 삼별초 왕국에 호응해서 안면도부터 진도, 흑산도, 남해도까지 서남해의 수많은 섬들이 반란에 가담했다. 섬에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토착 해상 세력들이 있었고 이들이 삼별초와 뜻을 같이 했다. 하지만 여몽 연합군에 의해 반란은 곧 진압됐다. 이후 고려 정부는 진도와 흑산도, 남해도, 거제도 등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 시키는 공도 정책을 감행했다. 대외적인 이유는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 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섬들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왜구와 섬 해상 세력들이 손잡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진도 사람들은 고려 충정왕 때인 1350년에 영암과 해남 등지로 강제 이주당해 디아스포라로 떠돌다 87년만인 조선 세종 19년(1437년)에야 비로소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조선은 그 뒤를 따라 전면 공도 정책을 시행했다. 그렇게 우리 섬의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23

이산가족이 된 화교가 운영해온 74년 역사의 중화요리점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에 먹는 짜장면은 몇 그릇이나 될까.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적게는 150만 그릇에서 많게는 700만 그릇 정도 된다. 이 통계를 보면, 사람들의 입맛이 변했다 해도 짜장면은 여전히 한국을 대표하는 외식이라 할 수 있다. 지역마다 대표적인 중화요리점이 있기 마련인데 포항을 대표하는 곳은 어디일까. 길성관(吉星館)과 부산각(富山閣)을 꼽을 수 있다. 두 곳은 화교인 진가현(1915년생)과 강성모(1922년생)가 1951년 중앙상가 롯데시네마 맞은편에 개업한 동순관(同順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쟁이 한창일 때 화교가 어떻게 포항에서 중화요리점을 개업하게 되었을까. 짜장면 면발처럼 이어지는 기나긴 이야기 타래를 펼쳐본다. 동서지간인 진가현과 강성모는 우리나라와 가까운 지역인 중국 산둥(山東)반도에서 살았다. 진가현은 잡화상에서 서기를 했고 강성모는 장사를 했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치열한 내전을 벌이던 1948년에 두 사람은 바다를 건너 인천으로 온다. 내전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인천행 여객선에 몸을 실은 것이다. 당시 중국에는 두 사람처럼 나라를 떠나는 사람이 꽤 많았다. 아편전쟁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될 때까지 전쟁과 경제적 궁핍을 피해 많은 사람이 해외로 나갔는데 그 수가 1000만 명에 달했다(정성호, 『화교』, 살림, 2003, 6쪽 참조). 두 사람은 인천 차이나타운의 중화루(中華樓)에서 곁꾼으로 일하게 되었다. 1918년에 문을 연 중화루는 1970년대 후반까지 국내 3대 중화요리점으로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중국 산둥 출신 화교 진가현·강성모씨 1948년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건너와 인천 중화루에서 요리 일을 처음 배워 서울 아서원 등서 전문 요리사로 성장 1951년 포항 중앙상가에 동순관 개업 지역 최초 전통 중화요리점으로 화제 1967년 동순관을 매각하고 각자 독립 강성모 ‘길성관’·진가현 ‘부산각’ 운영 세대를 이어 현재까지 전통 맛 이어가 인천, 서울, 대구를 거쳐 포항에 오다 1949년 10월 1일 두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 두 사람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두 사람은 일단 한국에서 삶의 뿌리를 내려야 했다. 중화루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두 사람은 서울 명동의 아서원(雅敍苑)으로 옮겨 정식 직원이 되었다. 지금의 롯데호텔 부지에 있던 아서원은 1907년에 문을 연 국내 대표 중화요리점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두 사람은 또다시 전쟁의 화마를 피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자전거를 구해 남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중화요리점 직원이라는 신분이 피난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식당을 찾아 요리를 해주고 숙식을 제공받으며 계속 남쪽으로 향했다. 대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많은 화교를 만났다. 당시 화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국에 정착하는 사람들과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은 부산에 많이 모였다. 1950년에 부산 화교 자치구가 자치정부로 인정받았고, 영주동, 서면, 황령산 일대에 화교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다. 진가현과 강성모는 포항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인이 있을 리 없는 포항으로 온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평양에서 살다가 서울을 거쳐 1948년 가을 포항에 정착한 문인 한흑구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감안할 때 항구도시 포항의 개방적인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일본, 만주 등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섞여 살기가 힘들지 않은 것 같았다. 한국 속의 ‘뉴욕’과 같았다고 당시 포항 분위기를 살폈다. - 『영남일보』, 1948년 1월. 1951년 롯데시네마 맞은편에 동순관 개업 두 사람이 포항에 도착하니 항구동에 덕성관(德成館)이라는 중화요리점이 있었다. 덕성관 주인은 포항에 정착한 화교의 원조인 셈인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두 사람은 1951년 지금 롯데시네마 맞은편에 동순관을 개업했다. 행인들의 눈길을 끄는 번듯한 중화요리점이었다. 서울에 있는 화교의 투자를 받아 요리사 두 명, 홀 두 명으로 시작했다. 포항에서 중화요리를 제대로 하는 곳이 드물 때여서 동순관의 개업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동순관의 단골손님으로 초대 영일군수이자 제2대 국회의원(영일군 갑구)인 최원수, 문인 한흑구가 있다. 최원수 의원은 중국에서 장기간 독립운동을 한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과 가까운 사이여서 이 총리와 중화요리를 자주 먹었고 그 덕분에 중화요리에 해박했다. 최원수 의원은 집에서 큰손님을 대접할 때 동순관 요리사를 불렀다. 한흑구도 명절에 동순관의 비싼 중국 술과 과자를 선물로 받을 정도로 ‘우수 고객’이었다. 해병대 장성과 장교들도 동순관에 자주 들렀고, 1960년대에 김종필도 해병대에 온 길에 동순관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 한국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독신으로 계속 살아가기는 힘들었던 탓이다. 결혼 후 강성모의 장모 명의로 중앙상가 ABC마트 자리에 주택이 딸린 200평 규모의 건물을 매입해 동순관을 그곳으로 옮겼다. 규모가 훨씬 커졌고 종업원도 여덟 명으로 늘어났다. 길성관, 부산각, 중흥관의 역사 1967년 동순관에 큰 변화가 있었다. 동순관을 상호(商號)와 함께 왕금옥이라는 화교에게 매각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왕금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순관을 임대했으며, 지금 대도동 종합운동장 맞은편에 있는 동순관이 그 맥을 잇고 있는 셈이다. 강성모는 중앙상가 수협 건너편의 건물을 매입해 길성관을 개업했다. 길성관은 처음에 단층 건물이었는데 1972년에 2층 건물로 신축했다. 잠시 일을 내려놓았던 진가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중화요리점을 운영하게 된다. 진가현의 일가 사람이 옛 아카데미극장 앞에 있던 여관을 사들여 부산각이라는 중화요리점을 개업했는데 장사가 신통치 않자 진가현이 인수한 것이다. 길성관은 강성모의 장남 강봉기(68)가 화성반점(華晟飯店)으로 상호를 바꿔서 운영하다가 동생 강봉곤(66)이 길성관으로 이름을 다시 바꿔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강봉곤의 아들 강태우(32)가 아버지 밑에서 요리 수업을 받고 있으니 3대째 이어지는 셈이다. 부산각은 진가현의 아들이 상도동에서 운영하고 있다. 부산각 간판에 ‘50년’이라 붙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1953년 중앙상가에 중흥관(中興館)이 문을 연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화교 왕문오가 주인이었는데 고급스러운 실내장식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중흥관은 왕문오의 아들 왕수동이 이어받았고 후일 종합터미널 옆에 태원성(太苑城)으로 상호를 바꿔 2000년 초까지 운영했다. 정리하자면,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포항에서 계속 운영해온 중화요리점은 길성관과 부산각만 남아 있고, 그 역사는 올해로 74년이 된다. 글 : 김도형(작가)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23

길에서 깨닫는 ‘한 목숨’ 죽어야 ‘한 목숨’ 살아지는 생의 이치

△ 대풍감 대한민국 10대 비경으로 꼽힌 곳 울릉도 독도 과학 연구기지를 지나 고개 하나를 넘으니 대풍감이 수호 신장처럼 떡 버티고 서있다. 그 위용이 압도적이다. 대풍감은 산악 잡지인 ‘월간 산’에서 대한민국 10대 비경으로 손꼽기도 했던 곳이다. 대풍감 해안 절벽의 향나무 자생지는 천연기념물 49호다. 대풍감이란 이름은 항해하던 돛단배가 바람이 멈추자 바람을 기다리며 정박하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기다릴 대(待) 바람 풍(風), 대풍감. 감은 작은 만이다. 바다나 강, 냇물, 들판 등이 산과 산 사이로 굽이쳐 들어가서 형성된 작은 만이나 골짜기, 여울 등을 구미, 기미, 꾸미, 금, 금미라 한다. 선창구미, 샘기미, 따순기미 등도 다 여기에서 파생된 이름들이다. 대풍감은 대풍기미 혹은 대풍구미, 대풍금 등에서 변형된 것이다. 기미의 어원은 여진어에서 왔다. 수변을 뜻하는 여진어 kueima에서 유래했다. 아이누어 kume, 공고어 komig도 같은 뜻이다. 대풍감은 바람을 피하기도 바람을 기다리기도 좋은 지형이다. 떡 버티고 선 해안 절벽 향나무 자생지 천연기념물 49호 지정 육지에서 재배 안되는 특산물 부지깽이, 눈 속에서 새순 올려 평상시는 상주 인구 8000여명… 나물철이면 1만2000명 북적 그런데 대풍감을 앞에 두고 길이 끊겼다.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대체 길은 어디로 이어질까? 오는 길에 이정표가 없었다. 울릉군청에 전화로 해담길 ‘현포 태하 수토사길’ 코스에 대해 물은 뒤 다시 되돌아 나간다. 길은 과학기지 건물 뒤편 숙소동 옆에서 이어진다. 기지 뒤로 가니 안내판이 서 있다. 길가에서는 보이지 않아 지리를 잘 아는 이가 아니고는 찾기 힘들다. 해변 도로가에 이정표가 세워져야 할 듯하다. 과학기지가 들어서 있는 지역은 웅포다. 움푹하게 들어간 곳에 모퉁이가 이어졌다고 해서 웅퉁구미라 부르다 웅포가 됐다. 웅퉁개라고도 부른다. 과학기지 옆으로 몇 채의 민가가 있고 과학기지 안의 작은 공원에는 전마선 두 척이 전시되어 있다. 노를 저어가며 조업을 하던 울릉도 옛날 어선이다. 전마선에는 노뿐만 아니라 키도 있다. 키가 있다는 것은 저 배가 돛을 달고도 다녔다는 뜻이다. 돛을 달지 않으면 키가 따로 필요치 않다. 그냥 노로만 가는 전마선은 노 자체가 키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언덕으로 이어지는 데크길 입구에 갈매기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뱃속의 내장만 파먹고 몸체는 그대로 버려둔 것이 필시 맹금류의 짓이다. 그 시체 위에서 파리 떼가 잔치를 벌이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축제가 되기도 하는 세상. 한 목숨 죽어야 한 목숨 살아지는 생애의 한낮. 바다와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햇살은 빛난다. △ 섬부지깽이 울릉도의 특산물 가파른 언덕을 5분 남짓 오르자 갈래 길이다. 여기도 이정표가 없다. 왼쪽에는 빈집, 오른쪽은 오솔길이다. 오른쪽 길로 가다가 또 길이 끊겨 되돌아 나와 빈집 쪽으로 가니 다시 길이 이어진다. 빈집을 지나면 시멘트 도로다. 이렇게 자동차 도로로 이어져서 현포령을 넘게 된다. 내내 다른 길 없이 차를 따라 태하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도로로 오르니 노인장 한 분이 밭에 서 계신다. 나물밭 주인 어르신. 이 일대의 땅 5000여 평에 산나물 농사를 지으신다. “저거는 부지깽이 밭입니다. 4월 초순이면 새순이 멋지게 올라옵니다. 눈 속에 살다가 아주 탐스럽게 올라옵니다.” 겨우 내내 눈밭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부지깽이 새순이 눈 녹자마자 쑥 올라온다는 말씀. “부지깽이 저거 육지에서 종자 가져다 누가 재배하려고 심어봤는데 처음에는 먹을 만하다가 2년쯤 되니 쓰디써서 못먹겠더래요. 그래서 육지서는 재배가 안돼요. 울릉도만 돼.” 섬쑥부쟁이의 울릉도 이름이 부지갱이다. 부지깽이, 자원,자완,백원,청원,산백국 등 다양한 이름이 있다. 쑥부쟁이는 전국 산야에 자생하지만 섬쑥부쟁이는 일본과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다년초다. 비타민 A 와 C가 풍부하고 단백질, 지방, 당질, 섬유질, 칼슘, 인 등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웬만큼 돈이 된다 싶으면 전국 각지에서 따라 재배할 텐데 부지깽이는 육지에서 재배가 안 되니 울릉도만의 특산품이란 말씀이다. 강화 순무도 그렇다. 타 지역에 종자를 심으면 그 맛이 안 난다. 토질이 맛을 좌우하니 특산품으로 지역주민들이 생계 수단 삼을 수 있는 이유다. “묵나물만 나가다 오륙년 전부터 생나물도 나가니 인기가 좋습니다. 부지깽이는 약을 치지 않습니다.” 노인은 젊어서 육지에 나가 돈벌이를 했다. 울릉도에는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였다. 그때 고생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눈물이 난다. “두 번 용서가 없어요. 잘못하면 때리기까지 하고.” 그런 육지의 매정한 인심이 싫어서 30년 전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내 일이니 자유로워서 좋아요. 칠십 넘어도 일 그만하고 집에 가란 소리 하는 사람도 없고.” 노인은 여전히 힘든 농사일이지만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더없이 행복하다. “나는 화학 비료도 안 써요. 퇴비만 이삼백 포 받아서 다 뿌립니다. 약도 안 해요. 암환자들이 많잖아요. 그게 농약 치고 화학 비료 뿌린 거 먹어서 그래요. 친환경 재배해야 해요.” △ 화학비료 안쓰고 재배한 귀한 나물 옛날에는 소를 길러서 거기서 나온 소똥과 풀을 섞어 만든 퇴비를 몇백 짐씩 져 날라다 농사를 짓곤 했었다. 또 옥수수 같은 작물을 심은 뒤 수확하고 밭을 갈아주면 뿌리랑 가지가 썩어서 거름이 됐다. 그것이 산성화를 막아줬는데 지금은 다들 화학 비료를 쓰니 밭이 산성화 된다. 그래서 노인은 자신의 밭에 일체 화학비료를 안 쓴다. 나물 중에는 참고비가 제일 비싸다. 2019년 기준, 참고비는 말린 것 400 그램 당 6만원 쯤에 출하한다는 말씀. “고비나 삼나물이 사포닌이 많습니다. 삼나물은 잎이 꼭 인삼 잎 같아요. 약효도 좋은데 재배도 까다롭습니다.” 80살의 노인은 여전히 청년처럼 정정하다. 아직도 5000 평이나 되는 밭에 농사를 짓는다. 4월-5월 두 달이 집중적인 나물 채취 철이다. 이때는 일해 줄 사람도 들어온다. 평상시 울릉도 상주인구가 8000여 명인데 나물 철이면 1만2000명으로 늘어난다. 모두 나물 농사 인부로 뭍에서 들어오는 것이다. 노인은 일 년에 150일 정도 일한다. 나물을 길러서 4000만 원 정도 판매해 경비 제하고 2000만 원의 수익을 얻는다. 제법 쏠쏠한 벌이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 쉬다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젊어서는 약초 농사도 지어봤고 밭 주변에는 온갖 과일나무를 다 심어도 봤다. 감나무, 애기사과, 벚나무, 동백 등을 심었다. 그런데 과일은 돈을 벌기 위해 심은 것이 아니다. 경관용으로 심었다. 노인과 헤어지고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애기사과 나무 열매가 잔뜩 열렸다. 잘 익은 것 몇 개를 따서 허겁지겁 먹는다. 노인 덕에 오랜만에 맛보는 과일. 누적된 생애의 갈증마저 풀리는 듯하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20

지역 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 신성상회 집안사람들

신앙심이 깊었던 신성상회 김석이 대표는 일본에서 포항으로 돌아온 후 송내교회에 출석했다. 송내교회는 1925년 지금 포항제철소가 있는 곳에 세워졌는데 일본의 박해로 1942년부터 1944년까지 폐교회 되었지만 굳건하게 역경을 이겨냈다.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교회는 송내를 떠나야 했다. 집 마당에 세운 작은 교회라 이주금도 얼마 되지 않았다. 송내와 동촌의 교인들이 힘을 모아 1968년 10월 해도동 등외과의원 자리에 40평 규모의 교회를 신축했다. 이듬해에는 교회 명칭을 포항동부교회로 바꾸었다. 신앙심 깊었던 김석이 창업자 일본서 돌아온 후 송내교회에 출석 ‘포항동부교회’로 신축 명칭 변경 올해 100주년 맞기까지 큰 역할 직장생활 하던 넷째 김용문 대표 1978년 귀향 신성상회 이어받아 ‘인내가 곧 장사’ 신조… 품질·‘착한 가격’으로 소비자가 다시 찾게 김 대표 “시장 살리려면 상인들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어린이들 위한 공간 조성 등 전통시장 지속가능 대책 마련 필요 동부교회가 1984년 새로운 교회당 봉헌과 임직예배를 드릴 때 김석이 장로는 원로장로로 추대되었다. 1951년 장로로 장립되어 30여 년 동안 묵묵히 교회를 뒷바라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성장을 거듭한 동부교회는 42년의 해도동 시대를 마감하고 2011년 이동에 새 교회당을 건립했다. 올해는 동부교회가 세워진 지 100주년 되는 뜻깊은 해다. 동부교회는 차분하면서 내실 있는 기념행사를 치르며 더 깊은 영성 공동체로 나아가리라는 뜻을 다졌다. 김석이의 집안사람들은 동부교회를 포함해 지역의 교회가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용문 대표, 1978년에 신성상회 이어받아 김석이는 4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일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체감하고 자녀 여덟 명 모두 대학교육을 마칠 수 있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현재 자녀들은 대부분 은퇴했지만 사회 각 분야에서 적잖게 이바지했다. 특히 장남 김박문은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대송국민학교와 포항중학교를 거쳐 대구 계성고, 성균관대를 졸업한 그는 사업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고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등을 맡으며 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헌신했다. 포항제일교회 장로로서 제일교회가 포항을 대표하는 교회로 자리를 잡는 데에도 기여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넷째 아들 김용문 대표는 1978년에 귀향해 신성상회를 이어받았다. 김 대표는 조용한 사람이다.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다른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하나의 사건이 김 대표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가게를 물려받아 한창 사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송도에서 횟집을 운영한다는 사람이 추석 선물로 단골손님들에게 선물한다며 30만 원가량의 물건을 주문했다. 대목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의 대량 구매는 횡재에 가까웠다. 하지만 횟집 주인이 낸 돈은 5만 원에 불과했다. 난색을 표하자 횟집 주인은 자기 가게로 나머지 돈을 받으러 오라고 했다. 김 대표는 횟집으로 돈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횟집 주인은 거드름을 피우며 10만 원만 주면서 다시 받으러 오라고 했다. 화가 났다. 김 대표는 친구들을 데리고 그 횟집에 가서 회를 먹었다. 계산서에는 25만 원이 적혀 있었다. 당시로서는 큰 금액이었다. 김 대표는 15만 원을 내고 나머지는 자신의 가게로 받으러 오라고 했다. 횟집 주인이 펄쩍 뛰면서 안 된다고 했다. 김 대표는 횟집 주인에게 당신은 외상이 되고 나는 왜 안 되느냐고 되물었다. 시비가 붙었다. 멱살을 잡으며 덤벼드는 주인을 헤드록으로 제압한 뒤 바닥에 패대기쳤다. 난리가 났다. 횟집 종업원이 주인을 병원으로 데려가 진단서를 끊고 관할 파출소에 신고해버렸다. 눈치를 보니 상습적인 사람이었다. 품질 좋은 제품을 ‘착한 가격’에 팔아 파출소에서 경찰이 왔다. 선친께 면목이 없었다.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선친은 남은 횟값과 치료비 등 모든 걸 지불할 테니 우선 병원에 가서 치료부터 하라며 합의를 부탁했다. 문제는 횟집 주인이 3주 진단이 났는데도 한 달이 지나도록 병원에서 퇴원하지 않고 더 많은 합의금과 위자료를 요구한 것이었다. 결국 김 대표는 횟집 주인에게 사과하고 20만 원을 더 주며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 일에 대해 선친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스스로 배우고 느끼라는 배려였다. 당장의 금전적인 손해도 막심했다. 돌이켜보면 문제를 만든 건 김 대표 자신이었다. 그 후로 김 대표는 화를 내지 않는다. 아침에 장사를 시작해 물건을 사간 사람이 오후에 찾아와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환불을 요구하면 이유도 묻지 않고 응한다. 인내가 없으면 장사는 쉽지 않다. 그것을 떠나 인내가 곧 장사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신성상회가 마냥 좋아서 물려받은 게 아니다. 속옷 가게, 그것도 80퍼센트 이상 여성 속옷을 취급하는 가게를 운영하기엔 남자로서 부담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업 전문성을 확보해 여직원을 두고 판매한다면 별문제 없을 터였다. 그가 사업적으로 착안한 것은 확실한 경쟁력 확보였다. 판매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여직원과 배우자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의 역할은 충분한 거래처와 물건을 확보하는 일이다. 전통시장에서 취급하는 상품의 품질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가진다. 김 대표는 그런 의구심을 편견이라고 말한다. 지금 전통시장은 이른바 메이커라는 곳에서 대부분의 물건을 공급받는다. 전문점과 전통시장에서 받는 물건의 품질은 거의 동일하거나 전통시장이 오히려 낫다는 것이다. 공급처가 수요에 따라 물건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두고 공급하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 품질이 높아질 수 있고 불량품의 비율도 적다는 것이다. 또한 김 대표는 ‘착한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하려고 애쓴다. 소비자는 품질이 좋은 제품을 ‘착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니 한번 신성상회를 찾으면 또다시 찾게 마련이다. 시장 상인들도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대부분의 전통시장이 그렇듯 죽도시장도 예전 같지 않다. 전통시장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 대표가 10여 년 전 포항 시내 롯데마트 입점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며 고군분투한 것은 시장 상인의 의무감에 앞서 전통시장의 생존을 고민하게 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동안 죽도시장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포항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지붕이 아케이드식으로 덮이고 가로 정비도 되었다. 하지만 주차장, 화장실 등 개선해야 할 점이 남아 있다. 김 대표는 “시장을 살리려면 상인들이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면서 “한 예로 어린이들이 포항과 죽도시장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을 시장 중간중간에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시장 상인들도 유튜브와 SNS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억은 각인되어도 박제(剝製)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자세는 태도에서 달라지게 되어 있다.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측하는가?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교훈은 널려 있는데 챙기지를 못한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를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이미 너무 빨리 그리고 멀리 가버린 존재가 되어버렸다. 환원이 아니라 재생마저 꿈꿀 수가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면, 그것은 생업 현장에서의 자기 위치의 확인뿐만 아니라 잘 살았다고, 성실했다고, 부끄럽지 않다고, 불후(不朽)는 아니더라도 뒷날 사람들의 삶을 위한 교훈 한마디는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신성상회 김용문 대표는 굳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선한 사람의 길을 택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역사의 현장인 죽도시장을 뒤로 한다. 〈끝〉 글 : 이우근(시인) 사 진 : 김 훈(작가)

2025-11-19

존재감 뽐내는 송곳봉·노인봉… 길손 지켜주는 두 신장 같아

현포항의 상징 노인봉, 200m 주름진 암벽이 우뚝 솟아올라 성인봉 북쪽 경사지에 87기 고분군… 우산국 근거지로 추정 코끼리바위에 생긴 폭 10m 구멍 사이로 소형 선박 드나들어 △ 우산국 도읍지… 고분군의 비애 오늘은 수토사길을 걷는다. 현포마을을 출발해 현포령을 넘어 태하마을로 간다. 이 일대에는 고대 우산국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그래서 고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우산국의 멸망을 슬퍼하지만 내가 슬픈 것은 우산국의 멸망이 아니다. 생겨난 것은 언젠가 소멸하기 마련이다.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생겼다 멸망해 갔는가? 정작 슬픈 것은 이 작고 척박한 섬, 기껏해야 몇백, 많아도 몇천에 지나지 않은 적은 수의 사람들이 살았을 우산국이란 나라에도 왕이 있고 귀족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슬프다. 지배와 피지배 계급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 시절이면 그저 힘세고 싸움 잘하는 자가 왕노릇하면서 살았을 터다. 약한 자들은 고된 노동으로 그자들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봉사했을 것이다. 그러다 죽은 그들의 무덤 돌을 옮기기 위해 또 얼마나 힘든 노동을 겪어야 했을까? 그것이 고분이 알려주는 진실이다. 오늘도 파도가 거세다. 현포항 부근에서 만난 노인은 울릉도의 파도가 얼마나 센지 육지 사람에게 세심히도 설명해 주신다. “바다가 허옇다니까. 여기 파도는 힘이 세요. 육지 파도 안 같아요. 파도치면 바다 전체가 하해. 거품이 있어서. 눈밭에 온줄 착각이 든다니까. 겨울에 오면 열흘은 갇힐 거 각오해야 해요. 파도 때문에.” 현포는 가문작지라고도 한다. 이 마을의 수문장은 노인봉과 촛대바위다. 산 중턱의 그 촛대바위 그림자가 바다에 비추면 바닷물이 검게 보인다 해서 가문작지라 했다는 지명 유래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 봐도 별로 크지 않은 촛대바위 그림자가 현포 해변을 검게 물들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개척 당시 대풍감에서 노인봉까지 해안선이 까마득히 보여서 가문작지라 했다고도 한다. 안내판에 나온 설명이다. 하지만 까마득히 보이는 것이 어디 현포뿐일까. 울릉도에서는 어디를 봐도 다 까마득하다. 작지는 전라도 지역에서 짝지라고 부르는데 옛날 공식 입도 허가 전부터 많이 살았던 전라도 지역 사람들이 남긴 언어 유산일 것이다. 갯돌이 있는 해변을 짝지, 작지라 한다. 감은은 검은의 방언이니 감은 작지란 해변에 검은 빛 자갈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현포 해변의 자갈들은 검은 빛이 많다. 성종 12년(1481) 때 완간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에 7개의 촌락과 석불석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00여 년 전 개척 당시에만 해도 현포에 40기가 넘는 고분이 있었지만 개간을 하면서 점차 사라지고 몇 기만 남았다. △ 울릉도 3대 해상 비경 중 하나인 코끼리 바위 현포항의 상징은 노인봉이다. 우뚝 솟아오른 200m 암벽의 주름이 노인의 주름 같아서 노인봉이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주름까지는 안보이고 그래도 언뜻 보면 등 굽은 노인이 서 있는 듯하다. 현포의 또 하나 명물은 울릉도 3대 해상 비경 중 하나로 꼽히는 공암(코끼리바위)다. 바위에 구멍이 있어서 공암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전설에는 지금의 공암은 현포 앞바다에 있었고 구멍이 없는 그냥 큰 바위였다. 그런데 현포에 살던 힘센 장사 노인이 큰 바위가 자기 마을 앞을 가리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노인은 바위를 다른 곳에 가져다 버리려고 배를 타고 나가 밧줄로 바위를 묶고 배를 저어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바위가 너무 커 꼼짝도 안했다. 화가 난 노인은 다른 바위 하나를 들어 큰 바위를 향해 던져버렸다. 그러자 큰 구멍이 났고 구멍에 줄을 묶으니 따라왔다. 노인이 노를 저어 천부 앞바다에까지 왔을 때 굉음이 들리며 바위를 묶은 밧줄이 끊어져버렸다. 배가 침몰해 노인은 죽었고, 끌고 가던 바위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바위가 공암이다. 공암은 코 부분에 폭 10m의 구멍이 나있어 소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다. 코끼리가 코를 물속에 처박고 물을 마시는 모양처럼 보인다 해서 코끼리바위라고도 부른다. 현포 읍내에는 보성식당, 슈퍼 간판이 보인다. 주인이 그 옛날 전라도 보성에서 이주해왔던 사람의 후예일까. 현포마을 뒷산 자락은 봉우리들이 첩첩산중으로 이어져 어느 깊은 산중 같은 느낌이다. 길에서 벗어나 잠깐 현포항 방파제로 나가니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마을 안길에서는 보이지 않던 송곳봉이 불쑥 눈에 들어온다. 노인봉과 송곳봉이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이 이방의 정취를 한껏 고조시킨다. 방파제에서 보니 대풍감의 모습 또한 한 폭의 병풍 같다. 병풍바위라 이름해도 되겠다. 길은 해변 도로를 따라 울릉도 독도 해양 연구기지 방향으로 이어진다. 갈림길에 안내판이 있다. 큰 도로는 일주도로다. 일주도로와 해안도로 사이 밭 가운데 현포 고분군이 있다. 깜빡 방심하면 놓치기 쉽다. 경상북도 기념물 73호인 현포리 고분군이다. 울릉도의 고대 무덤인 고분을 이 지역 사람들은 고려장이라 불렀다. 늙으면 부모를 버렸다던 그 고려장이란 이름이 어찌 여기까지 따라온 것일까.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울릉도에서 고려장이란 막연히 옛날 무덤이란 뜻으로 쓰인 것일 터다. △ 대풍감의 그림같은 풍경 압도적 성인봉에서 뻗어 내린 북쪽 경사지인 이곳이 울릉도에서 가장 많은 고분들이 남아 있는 지역이다. 1957년과 1963년 국립중앙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바 있다. 그때 최소 87기의 고분이 확인됐다. 현포 38기, 남서 37기, 남양 27기 등이었다. 이 일대가 우산국의 근거지였다는 증거다. 이 고분은 직경 10m-15m, 높이 5m 내외의 적석총(積石塚)이다. 적석총이란 돌무더기를 쌓아 만든 무덤이란 뜻이다. 발굴 당시 석실 내부에서는 약간의 금속 유물과 토기들이 출토됐다. 토기 양식으로 추정하니 통일 신라 시대 후기 무덤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내물왕 4세손인 하슬라주(강릉)의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한 것이 지증왕 13년(512년)이다. 그런데 신라 후기 고분이 있다는 것은 복속 이후에도 토착 지배 계급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고분을 둘러보고 나오니 길은 다시 울릉도 독도 해양과학기지 앞으로 이어진다. 동해안 해양 연구의 첨병이다. 기지 앞에는 아담한 몽돌 해변이 있다. 해변에는 선박이 피항할 방파제가 없고 작은 선착장만 있다. 선박들이 잠깐 접안하고는 떠나는 곳, 나루다. 선착장은 마치 바다 속으로 난 도로 같다. 저 길을 따라가면 용궁에 도달 할 수 있을까. 잠시 과학기지 앞에서 비과학적 상념에 젖어든다. 과학기지 앞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길 없음, 도로 끝’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자동차 길은 끝이지만 오솔길이 있어서 그대로 따라간다. 이정표가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그냥 가는 데까지 가봐야지. 약간의 경사지를 오르니 바로 코앞에 대풍감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길옆의 주상절리는 장대한 절벽이다. 제주 산방산을 절반으로 쪼개다 엎어놓은 듯 한 풍경. 고개를 넘기 전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그 사이 추산, 송곳봉과 노인봉이 뒤따라와 있다. 이 근방에서는 어디를 가도 존재감을 잃지 않고 강렬하게 우뚝 선 두 봉우리. 길손을 보호해 주는 신장 같다.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1-19

아름다운 만추, 대둔산 자연휴양림 숲길 걸어보세요

대둔산 자연휴양림의 숲길을 걷는다. 잘 익은 가을빛 속에서 단풍놀이의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사)한국산림문학회 가을 문학기행에 회원들과 함께 호젓한 숲길을 걸으며, 청명한 하늘 아래 가을의 향연에 몸을 맡긴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산과 들은 풍성한 결실로 가득하다. 나무들은 계절의 세월을 견디며 익힌 열매를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고, 노란 국화는 이제야 피어나 벌과 나비 대신 사람들의 눈길로 존재의 의미를 되새긴다.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풍경이 시가 되고 생각이 여운이 된다. 대둔산 자연휴양림은 자연에 인간의 손길을 보탠 하나의 공동 예술 작품이나 다름이 없었다. 화강암 봉우리 병풍처럼 기암괴석 솟아 입암대·낙조대·마천대 등 웅장한 절경 春 철쭉·夏 녹음·秋 단풍·冬 설경 장관 사시사철 계절이 그린 한 폭의 동양화 불교·유교·도교 어우러진 정신문화 산 신라 말 도선국사가 수도하던 도량과 조선시대 왜군을 통쾌하게 무찌른 곳 그 역사의 현장서 감동의 여운 느끼자 예전 전북도청 파견 근무 시절, 완주 대둔산의 가을 단풍을 실컷 즐긴 기억이 있다.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충남 금산 쪽에서 그 산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다. 대둔산(大芚山, 878m)은 충남 논산과 금산, 전북 완주에 걸쳐 있는 명산이다. 예로부터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경관이 수려하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봉우리마다 병풍처럼 기암괴석이 솟아 있다. 입암대·낙조대·마천대 등은 웅장한 절경을 자랑한다. 봄에는 철쭉, 여름엔 짙은 녹음, 가을엔 불타는 단풍, 겨울엔 설경이 장관을 이루니, 사시사철 그 자체가 계절이 그린 한 폭의 동양화이다. 대둔산은 불교, 유교, 도교가 어우러진 정신문화의 산이기도 하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수도하던 도량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권율 장군이 임진왜란 때 진을 치고 왜군을 물리친 역사 현장을 바라보면서 장군의 지휘소 앞에 섰다. 특히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이치 곡 일대는 이치대첩의 성스러운 땅이다. 1592년, 연전연패로 패퇴하던 조선군과 의병이 권율·황진 장군의 지휘 아래 왜군을 통쾌하게 무찌른 곳, 나라의 명운이 뒤바뀐 그 역사의 현장에서 나는 단풍빛처럼 붉은 감동의 여운을 느꼈다. 자연휴양림은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한 생태공간이다. 나무와 흙, 물과 공기, 빛의 순환 속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곳,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쉼터이다. 숲의 피톤치드 향기 속에서 스트레스를 덜고, 숲의 고요함 속에서 내면의 평화를 회복하게 하는 치유의 공간이다. 도시의 소음과 경쟁에 지친 현대인에게 자연휴양림은 삶의 속도를 늦추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명상의 자리이자, 잃어버린 생명 감각을 되살리는 가장 순수한 안식처이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한 대의 버스를 전세 내어 타고 온 회원들과 지방에서 온 회원들이 자연휴양림을 조성한 끈기와 집념의 산림인 유숭열 회장의 조성 과정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한 편의 무용담이었다. 그는 나무의 나이테에 새겨진 기후 환경처럼 자연휴양림에 새겨진 지난한 역사를 하나하나 풀어놓을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감동의 물결로 출렁이었다. 대둔산 자연휴양림은 3대에 걸쳐 숲을 가꾸어 온 유숭열 회장의 가문이 일군 산림 명문가의 유산이다. 선대의 땀과 헌신 위에 세워진 이 숲은 한 가족의 역사이자, 한 시대의 산림 문화의 기록이며, 자연을 ‘자산’이 아닌 ‘생명의 터전’으로 바라본 숭고한 정신의 결실이다. 숲길마다, 나무 한 그루마다 세대를 이어온 손길이 스며 있어, 오늘의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삶’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무엇인지 묻고 일깨운다. 충남 금산 묵산리의 대둔산 자연휴양림은 산림경영의 모범으로 손꼽힌다. 80여만 평에 이르는 면적에 11km의 숲길을 무료로 개방하고, 오토캠핑장, 편백나무 숙소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어 숲의 품격을 높였다. 2022년 하반기에는 ‘자랑스러운 혁신 한국인’과 ‘파워브랜드 대상’을 수상하며 산림청이 선정한 ‘대한민국 산림 명문가’로 이름을 올렸다. 휴양림 한편에는 유성준(柳成準) 선생의 산림 공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산림계원 일동이 뜨거운 마음을 모아 기념비를 세웠고, 당대의 문호 육당 최남선 선생이 그 비문을 써주었다. 또한 이곳은 전(前) 소련 대통령이자 세계환경포럼 총재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제1회 세계환경포럼 기념비 제막식을 열고 1박을 묵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대둔산의 숲은 세대를 이어온 한 가문의 철학과 정신이 깃든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1925년 조부 유성준 선생이 씨앗을 뿌리며 산림을 일구었고, 부친 만취(晩翠) 유영창(柳永昌) 선생은 6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조로 일기를 써 내려가며 산과 인생을 노래한 시인이며 동양화가이다. 그는 “인삼으로 부를 좇지 말고, 감나무를 심어 마을을 지켜라.”라고 가르치며, 자연 속에서 삶의 도리를 일깨웠다. 그 뜻을 이어받은 유숭열 회장은 100만 평의 산림에 38종의 나무를 심고, 수익보다 숲의 미래를 앞세워 국민과 나누는 산림 문화를 꽃피웠다. 대둔산의 단풍이 붉게 타오르는 가을을 맞이하여 한국산림문학회 김선길 이사장은 한 시대의 문학혼을 불러냈다. 만취 유영창 선생이 마침내 시조 시인으로 등단을 추서 받은 것이다. 이는 예우의 절차가 아니라,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예술혼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이다. 1915년 7월 17일부터 1974년 3월 29일까지, 60여 년 동안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조 한 수를 써 내려갔다. 평생을 이어 쓴 시조 일기의 편수가 무려 1만여 편, 그중 2000여 편이 박헌오(제5대 한국시조협회 이사장)의 노력으로‘만취 유영창 회고록 - 만취 일기’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와 빛을 보았다. 시조 한 수 한 수가 그의 삶이자 시대의 기록이었고, 그것은 곧 한국 시조 문학의 산 역사였다. 그가 남긴 시조는 숲처럼 깊고, 세월처럼 유장하며, 나무처럼 묵묵히 시대의 바람을 견뎌냈다. 자연과 인생, 신념과 철학이 한 몸으로 엮인 그의 시조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속의 나무 한 그루를 다시 세우게 했다. 그의 삶은 ‘산림 명가의 혼이자 한국문학의 유산’으로 길이 남았다. 사후 110년이 지나서야 정당한 자리를 찾은 이 추서는, 그 숭고한 예술혼에 바치는 시대의 경의였다. 이날 이서연 한국산림문학회 부이사장은 만취 유영창 선생의 뜻을 기리는 ‘청소년 녹색 문학상’ 제정을 제안했고, 유숭열 회장을 비롯한 모든 회원이 뜻을 함께했다. 이는 만취 선생이 가꾼 숲의 정신을 미래 세대에게 전하려는 약속이었다. 그가 남긴 대둔산 자연휴양림은 나무의 집합이 아니라 세대를 잇는 신념의 숲이다. 그 속에는 나라 사랑과 자연 사랑, 그리고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흐른다. 대둔산 자연휴양림의 숲길을 걸으면, 나무마다 그가 남긴 시조 한 구절이 들려오는 듯하다. “1954년 12월 27일. 저마다 입 벌리면 나라 사랑한다 건만/ 돌아서서 하는 짓은 이 나라의 좀이로다/ 저게 다 새 일꾼이라니 가슴 아파 하노라/ 산이 벗어지면 벗을수록 한숨겨워/ 산이 푸르러지면 푸를수록 잘 사오리/ 나라가 서고 못 섬이 저 산에 있다 하리.” 대둔산 휴양림은 하나의 시조이며, 한 가문의 철학이고, 생명의 노래다. 오늘의 우리는 대둔산 자연휴양림 숲에서 문학의 본향을 다시 배운다. 하루하루를 시로 살았던 한 사람의 고결한 기록이, 이제 우리 모두의 숲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유성준 기념비의 내용은… 산이 있어 옛날 민둥산에서 나무 심어 이불 덮으니 울창함이 막대해서 “소나무 방패 같다”고 이르더라. 공은 인자함과 더불어 근면하였으니 마을 사람들이 우리의 은혜를 새로 돌이켜 보았더라. 공적이 많아서 비석을 다듬고 말씀을 새겨서 영원히 이 세상을 연마하는 데에 쓰리라. 삼림계장 유공 성준 기념비( 森林係長 柳公 成準 記念碑) 유산석해유피울 연막위송순(有山昔蟹有被蔚 然幕謂松楯) 유공지근여인 리인상고혜아(維公之勤與仁 里人上顧蕙我) 실다벌석재사 이영마사(實多伐石裁詞 以永摩娑) 최남선 찬 정대유 서(崔南善 撰 丁大有 書) 1925년 10월(음) 삼림계원 일동 건설

2025-11-19

영주시, 베어링·수소·드론으로 경북 북부 산업 거점 급부상

영주시가 첨단산업, 청정에너지, 교통 인프라 확충을 기반으로 경북 북부의 산업 중심도시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1조 2000억 규모의 청정수소 발전소와 대형 에너지저장시스템(BESS), 드론산업과 청년인재정책, 교통망 확충 등 대규모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며 지역경제 활성화와 청년 일자리 창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베어링산단에 2964억원 투자 2035까지 청정수소발전소 구축 1000억 규모 드론시험센터 조성 청년 일자리 확대·정주 기반 마련 풍수해 예방·소하천 정비도 만전 □ 첨단베어링 국가산단 - 지역경제 중심축 9월 착공한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는 2964억원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로 2027년 완공 시 8000여명의 인구 증가와 연간 749억원의 지역경제 효과, 62억원의 세수 증대가 예상된다.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단은 2018년 국가산단 후보지 선정 이후 전국 7개 산단 가운데 가장 빠른 착공에 들어가 지역 성장을 앞당기고 있다. 산단은 항공·우주·자동차 등 핵심 부품인 베어링 산업의 집적화를 목표로 국내 유일의 하이테크베어링 시험평가센터와 연계해 16개 첨단 업종 유치를 추진 중이다. 시는 지난 12일 영주시민 추진위원회와 서울 더링크 호텔에서 제4회 한국베어링컨퍼런스 및 제8회 베어링의날 행사를 공동 개최해 산단의 비전과 발전 가능성을 알리며 산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강화했다. □ 청정 에너지와 첨단산업 융합, 미래 경제성장 견인 영주시는 한국동서발전과 1조 2000억원 규모의 청정수소 발전소 및 대형 에너지저장시스템(BESS) 구축 협약을 체결했다. 2035년 완공 예정인 이 사업은 세수 1000억원 이상 증가, 2조 3000억원의 생산유발효과, 수백 명의 일자리 창출이 기대된다. 이를 통해 영주는 분산에너지 특구, AI 데이터센터, 드론산업 등 미래 신성장 산업의 교차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 교통 인프라 확충 - 기업하기 좋은 도시 영주시는 드론 실증도시 및 특별자유화 구역 지정에 따라 1000억원 규모의 첨단드론시험평가센터를 조성 중이다. 영주시는 올해 드론 실증도시로 선정된데 이어 7월에는 드론 특별자유구역으로 지정되며 항공, 물류산업의 신거점으로 성장하고 있다. 민·군이 공동 사용하는 관제탑과 정비고·격납고 등 첨단 시설을 갖춘 첨단드론시험평가센터는 향후 산업·국방·물류를 아우르는 핵심 거점이 될 전망이다. 또, 755억원이 투자되는 영주역EMU 차량정비시설 설치 확정으로 중앙선·영동선·경북선 열차 정비 기능이 집중되며 약 80명의 상주인력과 협력업체가 유입될 전망이다. 국도 28호선 신설 9.3km와 2028년 개항 예정인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연결로 항공·철도·도로를 연결하는 3축 물류거점 도시로의 변신을 준비 중이다. □ 기업이 머무는 도시, 행정이 먼저 움직인다 영주시는 중소기업 운전자금 이차보전, 스마트공장 확산, 1기업 1담당제 등 맞춤형 행정 지원으로 기업 경영 부담을 줄이고 있다. 또한 910억원의 청년 일자리·정착 예산을 투입해 청년스타트업 지원, 주거·복지 인프라 확충 등 청년이 머무는 도시 기반을 구축 중이다. 영주시는 기업이 머무르는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행정지원 체계 전반을 혁신하고 있다. 중소기업 운전자금 이차보전과 함께 농공단지 물류비 지원, 스마트공장 확산, 강소기업 육성기반 구축 등 실질적인 지원책을 강화하면서 기업의 경영 부담을 줄여왔다. 영주시는 총 910억 원의 청년 일자리·정착 예산을 투입해 기업의 인력난 해소와 청년 정주 기반 마련을 동시에 추진하면서 청년이 머무는 기업도시 기반을 다지고 있다. 693억원을 투입해 하망동 일원에 조성 중인 지역활력타운은 청년·신혼부부를 위한 주거와 문화, 창업 공간을 결합한 복합단지로 주목받고 있다. 시는 청년이 일하고 정착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지역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삼기 위해 앞으로도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 기업과 청년이 함께 성장하는 도시를 만들어갈 계획이다. □ 산업과 자연이 조화된 지속 가능한 도시 비전 산업의 고도화와 함께 자연과 조화를 이룬 도시 비전도 현실화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재해위험지역 사업 선정 총 665억원과 영주동과 휴천동 일원 풍수해 생활권 종합정비 사업 496억원, 상망2지구 소하천 정비 169억원 등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인프라가 완성되고 있다. 영주호 상류 번계들 일대에는 낙동강 생태자원화지구 113만㎡가 조성이 본격화되고 있다. 수자원공사의 오염저감시설 설치 사업을 넘어 정원형 수생태 자원화지구로 확장해 영주호 일원을 세계적 생태명소로 육성할 계획이다. 영주시는 첨단산업 육성과 교통망 확충, 기업·청년 지원정책을 통해 산업과 사람이 함께 성장하는 도시 기반을 빠르게 구축하고 경북 북부의 새로운 성장을 견인하는 핵심 거점 도시로 도약해 나갈 계획이다. 사람이 중심! 영주시, 산업 대전환으로 ‘행복 도시’ 건설 유정근 영주시장 권한대행 인터뷰 유정근 영주시장 권한대행은 산업의 중심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업이 성장하고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영주의 목표라고 말했다. - 영주시의 산업정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영주는 지금 산업지형 전환의 중심에 서 있다. 영주시는 첨단베어링 국가산단, 1조 2000억원 규모의 청정수소 발전소 투자협약, 드론 실증도시 지정 등 굵직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역이 생존하려면 산업으로 체질을 바꾸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도전을 영주가 먼저 나서고 있다. 총사업비 2964억원, 118만㎡ 규모로 조성되는 국가산단은 2027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영주는 국내 유일의 하이테크베어링 시험평가센터를 중심으로 16개 첨단업종 유치를 추진하며 베어링산업 집적지로 성장하고 있다. - 영주시 경쟁력의 강점은. △영주의 최대 강점은 입지와 교통, 산업과 인재가 하나로 이어지는 구조다. 영주는 수도권과 남부권을 잇는 허리이자 동서남북 산업벨트를 동시에 연결하는 교통 요지다. KTX이음 개통으로 서울까지 1시간 40분대에 이동할 수 있고, 동서횡단철도와 중앙선 고속화도 진행 중이다.여기에 2028년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이 개항하면 영주는 항공·철도·도로의 3축 물류도시로 완성된다. 교통은 곧 기업 경쟁력이다. - 청년이 머무르는 도시 조성을 위한 전략은. △영주는 산업 발전과 청년정책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총 910억 원 규모의 청년정책 예산을 투입해 일자리, 주거, 복지, 교육이 연결된 정주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지역활력타운은 청년·신혼부부를 위한 주거와 창업 거점을 함께 조성하는 복합단지로 영주형 청년 정착 플랫폼의 역할을 하게 된다. 청년 스타트업 지원, 청년농업인 영농정착사업 등 다양한 시책도 확대 중이다. 청년이 머무르고 도전할 수 있는 도시, 그것이 곧 지속 가능한 도시라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 영주가 지향하는 도시상은. △영주는 첨단산업, 청정에너지, 교통망, 인재 정책의 4대 축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 경제의 심장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동서남북 관광축을 구성해 도심과 관광지와의 연계를 강화해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기업이 머물고, 청년이 일하며, 사람들이 찾아오고,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우리 시정의 궁극적인 목표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5-11-19

오징어?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잡히는 개체수가 많을 때는 군대나 학교의 단체급식 반찬으로도 흔하게 올랐다. 국을 끓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채소와 함께 고추장 양념에 볶아도 인기가 좋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에도 ‘오징어OO’이란 이름이 붙었던 시절이 있었다.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시기가 되면 동해엔 환하게 불 밝힌 집어등(集魚燈)을 매단 어선이 수백 척 떠다녔다. 오징어는 빛을 발견하면 모여드는 성질을 가졌기에 그런 어획 방식이 사용됐다. 바다 위에서 빛나는 집어등 불빛이 인공위성에서도 관찰될 정도였다. 지금은 어획량이 줄어 이전처럼 ‘심심풀이’로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된 오징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냉동된 오징어를 해동해 끓는 물에 데쳐 먹는 숙회는 오래전부터 주당들이 즐기는 안주였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오징어를 칼질 솜씨 좋은 횟집 주인이 썰어낸 산오징회는 식감이 일품이다. 몸통이 아닌 다리는 기름에 튀겨 고소하게 먹는다. 무, 파, 마늘 등을 넣어 칼칼하게 무치면 그 또한 색다른 맛을 낸다. 달콤짭짤하게 볶아낸 오징어는 아이들이 너나없이 좋아하고, 삼겹살과 함께 철판에 구워먹는 오삼불고기도 소박한 주점의 인기 메뉴 중 하나다. 오징어순대와 오징어 버터구이 역시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많은 한국인들이 땅콩과 곁들여 먹는 마른오징어. 그런데 흥미롭게도 영미권 국가에선 이걸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오징어를 구울 때 나는 냄새를 끔찍스럽게 여기는 탓이라고. 그럼에도 유럽 대다수 나라는 우리처럼 오징어 요리를 즐긴다. 남부 유럽 사람들은 오징어에 올리브유를 발라 구워 먹고, 오징어 먹물을 파스타에 넣기도 하는 것. 이처럼 오징어는 몇몇 국가를 제외한 동서양 모두에서 사랑받는 식재료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8

그 섬에서 ‘오징어내장탕’을 먹어봤더니…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다. 1980~1990년대 대학생들은 캠퍼스 잔디밭에서 곧잘 술판을 벌이곤 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군인이던 사람들이 권력을 탈취해 권위적인 공포 통치를 이어가던 끝 무렵. 머리칼조차 마음대로 기를 수 없는 경직된 고교 시절을 보낸 학생들은 대학 입학의 해방감과 거기서 느끼는 자유를 ‘대낮 만취’라는, 어른들이 보기엔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만끽하곤 했다. 그들 대부분이 철없던 스무 살 시절이었으니 있을 수 있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막걸리를 마실 때면 과자 부스러기가 안주였고, 소주를 마실라치면 마른오징어 한두 마리가 신문지를 깐 잔디밭 위에 놓였다. 쫄깃한 식감과 짭짤 고소한 맛의 오징어 한국인이라면 남성과 여성, 아이와 어른 호오(好惡)가 거의 갈리지 않는 식재료 울릉 별미 중 기억에 남은 ‘오징어내장탕’ 하얀 내장·콩나물 등 넣어 맑게 끓인 탕 혀 위로 부드럽게 녹아들던 내장이 생생 취기가 오르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 속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라는 염세적인 노래를 부르는 애들이 있었고, 또 다른 쪽에선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라는 비장한 가사가 들려오기도 했다. 어쨌건 그 시절엔 오징어가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쓰는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을 만큼 값싼 안주였다. 많지 않은 아버지의 월급으로 내핍하며 살림하던 엄마도 냉동오징어 정도는 넉넉하게 사서 숙회를 만들거나, 찌개나 국을 한 냄비 가득 끓여 밥상 위에 올리곤 했으니까. 그때 학교를 다니던 세대가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살아있는 오징어를 재빠른 칼질로 썰어낸 산오징어회와 따끈한 내장과 먹물까지 맛볼 수 있는 통오징어찜도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들 역시 주머니 가벼운 직장인들의 만만한 안주 역할을 했다. 오징어는 쫄깃하게 씹히는 식감과 짭짤하고 고소한 맛으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렇기에 호오(好惡)가 거의 갈리지 않는 식재료이기도 하다. 한국인이라면 남성과 여성, 아이와 어른 가릴 것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된 오징어를 즐겨 먹는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징어의 어획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바다 오염과 기후 변화가 이유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중국 어선들의 싹쓸이 조업으로 씨가 말랐다”는 말도 들려왔다. 실제로 그랬다. 몇 해 전 특정한 기간엔 산오징어회의 가격이 고가로 이름 높은 돌돔회 시세에 육박했다. 말린 오징어 한 축이 쌀 한 가마니 가격을 위협하던 때도 있었다. 오징어 값은 요즘에도 등락을 거듭하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비싸서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오징어 좋아하는 이들에겐 ‘굿 뉴스’가 분명하다. 동해가 지척인 도시 포항에서 생활하는 기자와 동료들은 가까운 어시장이나 해변에 즐비한 횟집에서 가끔 오징어물회를 맛보고 있다. 다른 어떤 생선으로 만든 물회보다 감칠맛이 좋다. ‘오징어’라는 단어를 발음하면 쌍둥이 형제처럼 같이 떠오르는 섬이 있으니 바로 ‘울릉도’다. 55년을 살아오며 울릉도는 딱 한 번 가봤다. 울릉도 해안 일주도로가 완공된 2019년이었고, 버스를 이용해 울릉도를 한 바퀴 돌아본 후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취재를 마친 후 이틀쯤 더 울릉도에 머물렀다. 그때 따개비밥과 약소불고기를 시작으로 어지간한 울릉도 별미는 대부분 맛봤으니 운이 좋았다. 그 기간 먹어본 울릉도 음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보기 힘든 ‘오징어내장탕’. “내장을 많이 넣어 끓여야 제맛이 나기에 1인분은 만들기 어렵다”는 식당 주인을 억지로 구슬려 먹었던 요리. 하얀 오징어 내장과 콩나물, 무, 애호박 등을 넣어 맑게 끓인 탕이었다. 맛은 어땠냐고? 식당 주인의 말이 맞았다. 애초 기대했던 구수함과 눅진함은 없었다. 전문가의 말은 틀리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그럼에도 오징어의 내장이 혀 위로 부드럽게 녹아들던 느낌은 생생하다. 만약 다시 한 번 울릉도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친구들 여러 명과 동행해 내장이 듬뿍 들어간 제대로 된 오징어내장탕을 먹어보고 싶다. 2019년에 맛본 것과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진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