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해양문화<br/>해녀②- 해녀의 역사적 기원
고대에 물질은 한반도 남부와 제주도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깊은 바다에서 다양한 패류(貝類)를 채취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얼굴과 몸에 문신을 했고 이는 풍습이 되었다. 중국 고전 ‘예기’에 “머리를 풀고 문신(文身)은 고대 한반도 주변 나라의 물질 풍속”이라는 기록이 있고, ‘후한서’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이 문신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시대에는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 물질하는 해인(海人)이 있었다. ‘본초습유(本草拾遺)’에는 “신라의 해인은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 잠수하여 깊은 바다에서 나는 대엽조(大葉藻, 바닷말의 하나)를 채취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신라에서는 미역 같은 해조류를 물질로 채취하였다.
고대에 물질은 한반도 남부·제주 지역서 성행
전복 진상은 포작간에 등록된 남성 몫이었으나
과중한 부역·수탈에 육지로 도망가는 이 늘자
해녀에게 채취 기술 습득시켜 진상역에 동원
여성은 허가 없이 지역 못 떠나 고립된 삶 살아
전복 등의 공물 때문에 고초 겪은 제주 사람들
5~6세기에 제주에서는 진주 같은 보석을 캐는 물질 어업이 발달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문자왕 13년(504)에 “진주는 탐라에서 생산된다(珂則涉羅所産)”고 하였고 이 진주는 중국 위나라로 유통되었다. 905년(延喜5) 일본 천황이 편찬한 연희식(延喜式) 법전에는 ‘탐라복(耽羅鰒)’이 등장한다. ‘탐라복’은 제주와의 교역품으로 공납된 것인지, 일본 해녀가 제주로 건너가 채취한 것인지, 제주 사람이 일본으로 가서 채취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제주의 전복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 평성궁(平城宮)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745년(天平 17년) 목간(木簡)에도 ‘탐라복’ 기록이 나온다. 이런 기록을 종합해보면, 제주에는 잠수 기술 능력이 탁월한 해양민이 있었고, 진주와 전복을 교역품으로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1079년(문종 33년) 탐라에 다녀온 고려 사신이 진주 2개를 왕에게 바친 기록도 있다. 빛이 별같이 반짝여서 야명주(夜明珠)라고 한 것은 제주가 선사 이래 잠수 어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증명한다.
천년 왕국 탐라국은 10세기에 고려가 들어서면서 독립국의 지위를 잃게 된다. 숙종 10년(1105) 탐라는 고려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하고, 고종 때(1213~1259) 탐라의 명칭은 지방을 뜻하는 지금의 ‘제주(濟州)’로 바뀌었다. 이후 제주 역사는 외부에 의한 경제적 착취, 환경파괴가 일어나면서 시련과 고난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고려에 편입된 직후 제주 사람은 중앙에 전복과 말 등 공물 바치는 일로 큰 고초를 겪었다. 남성들은 육지로 도망갔고 더 이상의 이탈을 묵인할 수 없던 조정은 1629년(인조7), 1778년(정조2) 두 차례에 걸쳐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전쟁, 군사, 어로 등 각종 군역과 잡역에 남성이 동원되면서 물질은 여성의 몫이 되었다. 특히 여성은 관의 허가 없이 절대 제주를 떠날 수 없는 출륙금지령은 제주 여성의 삶을 더욱 고립시켰다.
수탈 견디지 못한 제주 남자들 육지로 도망 가
제주에서 잠수 활동을 하는 여자를 잠녀(潛女), 포아(浦娥), 포여(浦女)라고 한다. 10세기 전반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 성립된 백과사전적 성격인 ‘왜명류취초(倭名類聚抄)’에는 잠녀(潛女)는 잠수하는 여자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잠녀 기록은 1630년 이건이 남긴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이다. 이 책에서 잠녀는 ‘미역을 따는 여자(採藿之女謂之潛女)’ 또한 ‘생복을 잡아서 관아에 바치는 역(生鰒之捉亦採取應官家所徵之役)’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미역을 캐낼 때에는 소위 남녀가 발가벗은 알몸으로 낫을 갖고 바다에 떠다니며 미역을 캐어 남녀가 서로 섞여 있으나 부끄러이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전복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기록하였다.
이후 여러 기록에서 잠녀가 등장한다. 1694년 제주 목사 이익태가 쓴 ‘지영록(知瀛錄)’에는 ‘진상 추인복을 잡는 채복잠녀(進上搥引鰒專責於採鰒潛女)’와 ‘채곽 잠녀 800명(採藿潛女多至八百)’으로 역할을 구분하였다. 해녀는 전복을 진상하는 해녀와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로 구분되어 관리되기 시작한다. 당시 제주의 전복 진상은 포작간(鮑作干)이라는 호적에 등록된 남성들이 매년 조달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전복 진상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16세기에 과중한 부역과 수탈을 견디지 못한 제주 포작간들은 전복 채취를 목적으로 육지로 도망갔고, 사천, 고성, 진주 등지에 집성촌을 형성했다.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생활하였다. 수령들은 모든 해산물 진상을 이들에게 맡겼고 이후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조선 정부는 전국에 있는 포작간과 포작선을 징발해 전투를 치렀다. 징발되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워 포작간들은 내륙으로 도망가거나 숨어버렸다. 임진왜란 이후 포작간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고기잡이를 하지 않았다. 이후 잠수어업은 제주에서만 확인되었고 전복 진상은 수군이나 제주 해녀 등 특정 어민이 맡게 되었다.
전복 수요 충족하기 위해 제주 해녀 동원
17세기 중엽 조정에서 많은 전복 진상을 요구하였고 제주 포작인들은 수량을 채울 수 없었다. 포작인은 전복 채취를 위해 한겨울에 알몸으로 들어갔으나 “물에 빠져 죽어 열 중에 두셋만 남게 되었다”(남사록(南槎錄)), “형틀과 채찍을 가하였으나 수량을 채우지 못한다”(남천록(南遷錄))는 기록처럼 고문을 가해도 진상할 수량을 채울 수 없었다. 포작인들은 결혼을 하지 못해 혼자 살다가 죽었고 과부라도 “거지 노릇을 하다 죽을지언정 포작하는 사람의 아내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남사록(南槎錄))고 하였다. 17세기 양반가의 음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전복 소비가 증가했고 포작인에게 매질을 가해도 진상 수량을 채울 수 없게 되자 조정에서는 제주 해녀를 동원해 전복을 채취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 목사 이익태는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들에게 전복 채취 기술을 습득시키고 ‘잠녀록안(潛女錄案)’에 기록해 관리하였다. 그 상황을 1694년 이익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미역을 따는 잠녀들은 (전복 캐는 일을) 익숙지 못하다고 핑계를 대면서 죽기를 작정하고 저항하며 이를 피할 꾀만 내고 있다. 장차 전복을 캐는 잠녀가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또한 역을 고르게 하고자 미역을 따는 잠녀들에게 전복 캐는 것을 익히도록 권면하여 추(搥)·인복(引鰒)을 (전복 잠녀들과 함께) 나누어 배정하였다.
-이익태, ‘증감십사(增減十事)’, (지영록(知瀛錄)).
추(搥)·인복(引鰒)이란 전복을 두드려 넓게 펴서 말린 전복으로 해녀는 전복 채취뿐만 아니라 전복을 말려 제조한 후 진상하였다. 전복 진상은 해녀의 몫이 되었고 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은 “섬 안의 풍속이 남자는 전복을 따지 않음으로 다만 잠녀에게 맡긴다”고 하였다. 한겨울 남자들도 물속으로 들어가 채취하기 어려운 전복 기술이 여성에게 전수되어 해녀가 진상역에 동원되었다. 제주 해녀 사회는 위계질서로 조직되어 대상군(大上軍),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으로 계급화되었고, 대상군은 전복 진상 등의 책임자로 해녀를 통솔하였다. 지금도 해녀 사회에서는 이런 질서가 존재하고 있다.
집안의 자랑이 된 해녀
조선시대 미역 어업은 제주도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제주에서는 미역 판매로 상인들이 부자가 되었고 교역상들은 제주도를 왕래하며 미역을 사고팔았다. 정부는 구황식품으로 활용하였고 노약자나 허약자의 보양식, 산후 음식으로 알려지면서 제주의 미역 어업은 발전하였다. 미역을 채취하는 해녀를 귀히 여겼고 해녀는 집안의 자랑이 되었다. 1764년(영조 40년) 53세에 제주 의금부도사로 부임해 ‘탐라록’을 지은 신광수는 “탐라의 여자애들 풍습에 혼인 상대로 잠녀를 귀중히 여겨, 잠녀 둔 부모들은 우리 딸은 먹고 살 걱정이 없다고 자랑한다”고 하였고, ‘잠녀가(潛女歌)’도 남겼다.
이월 개인날에 성 동쪽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여인들이 물가로 나간다.
비창 하나 망사리 하나 테왁 하나
소중이에 알몸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
깊고 푸른 물에 의심 없이 바로 내려가
날리는 낙엽처럼 공중에 몸을 던지니
북쪽 사람은 놀라워하는데 이곳 사람은 빙긋이 웃어
장난으로 물장구치며 물줄기를 마음대로 타기도 하고.
제주 해안가 여성은 열 살이 되면 해녀가 되었고 두려움 없이 바다에 뛰어들어 미역을 채취하였다. 미역은 쌀농사를 지을 수 없는 제주 사람들에게 생계 걱정을 해결해주는 양식과 같았다. 그렇기에 관아에서는 미역을 강제적으로 거둬들였다. 제주에서는 해녀 어업이 활발하였고 개항 직후에는 돈벌이를 위해 일본, 러시아 등지로 진출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여성 잠수 전문가, 해녀의 탄생은 제주 역사의 산물이다.
글 /김수희(독도재단, 경제학 박사)
사진 : 김수정(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