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에, 스님이 끼니때마다 바위에서 한 알씩 나오는 쌀을 받아서 모아 한 그릇의 밥을 지어서 먹었다고 한다. 어느 날, 욕심이 생긴 스님이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바위를 파 보았더니 쌀은 없고 물만 나왔다고 한다. 어머님이 남편 어릴 적에 들려주신 이야기(사실은 임중리의 국구암의 “쌀바위 전설”이다.)이다. 시댁 근처에 이 전설을 간직한 절이 있다. 그 절에 화장을 곱게 했던 부처님도 있다고 했다.
화장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한다. 립스틱 바르는 것이 화장의 시작이자 끝인 나는 뭐가 왜 중요한지 잘 모른다. 친구들은 썬크림이라도 발라야 한다고 만날 때마다 걱정을 하지만 나는 게으름이 몸에 익은 탓에 화장하는 것보다 저녁에 지우려고 씻는 일이 더 귀찮아서 화장을 하지 않는다. 기초화장품도 하도 여러 가지라 바르는 순서가 늘 헷갈려 세수하고 아이크림 한 가지만 바른지 오래다.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싶은데 주위에서 늘 걱정을 해 준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
이런 나를 잘 아는 남편이 오늘은 화장을 지운 불상이 있다고 보러 가자고 앞장섰다. 시댁 근처인 포항시 남구 장기면 방산리에 자리한 고석사였다. 가는 동안 예전에 나와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기억을 떠올려보라는데 나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좁은 산길을 올라가는 진입로부터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런 나와 달리 남편은 초등학교 다니며 산을 넘어 소풍을 왔고, 대학 시절에는 탁본을 뜨려고 찾기도 했다니 익숙한 곳이었을 테다.
고석사는 이름에 옛 고자를 넣은 만큼 오래된 역사를 지녔다. 신라 선덕여왕이 세웠다 하니 얼마나 긴 세월 그 자리에 있었는지 백 년도 겨우 사는 인간이 가늠하기 힘든 시간이다. 입구에 새겨놓은 입간판에 선덕이 왕좌에 오른 지 7년(638), 동쪽으로부터 세 줄기 서광이 3일 동안 궁전을 비추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그 빛의 발원지를 찾게 하니, 지금의 고석사 바위에서 발하는 빛이었다. 왕이 태사관에게 점을 치게 하니, 그 바위를 다듬어서 불상을 만들고 절을 지으면 길하다고 하여, 불상을 조각하고 이 석불을 모실 법당인 보광전(普光殿)을 지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미상이다. 지금은 보광전과 산신각, 극락전이 있다.
천 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킨 절이다. 하얗게 덧칠했던 화장을 말끔히 지웠다는 불상이 궁금해 설명문도 대충 훑고 보광전에 올랐다. 종교는 다르지만, 절에 들어갈 때는 적은 금액이라도 시주를 하라기에 지폐 한 장 접어서 불전함에 넣었다. 절하는 건 생략하고 미륵불과 마주했다. 세 개의 산 모양을 등에 지고 부처님이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보광전 안에 위치해서 바람과 비를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두껍게 칠한 석고를 벗겨내며 상한 것인지 흘러내린 옷깃 여기저기 풍파를 한껏 맞은 모습이다. 다른 곳의 불상들은 앞면만 보여주지만, 고석사는 불상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감상할 수 있다.
남편이 2007년 찍은 하얀 불상의 사진을 보여줬다. 다 벗겨낸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니 전혀 다른 부처님이다. 친구들에게 두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같은 장소에서 찍은 것이라고 설명을 하니 놀란다. 옷부터 온몸이 하얗고 입술은 발갛다. 머리만 까맣게 칠을 해서 사진으로만 보니 모자를 씌운 듯한 느낌도 난다. 1923년경 석고로 치장한 것으로 추정하며, 2009년에 덧씌운 화장을 지웠다.
신라 시대 사람들이 새긴 부처님을 일제시대에 누가 석고를 돌 표면에 발라 하얀 모습으로 억지 화장을 시켰을까, 무슨 이유였을까? 사람이 세월을 덧입고 나이 들어가듯 돌에 새긴 부처님도 천 년의 시간을 덧입어야 자연스러운데 말이다. 익산 미륵사지의 탑과 안동 법흥사지 7층 전탑을 수리한다고 바른 콘크리트와 무엇이 다른가. 미륵사지는 콘크리트를 걷어냈고, 법흥사지는 근처를 지나는 철길을 들어내는 중이다. 가부키 배우 같은 두꺼운 화장을 지운 부처님이 편안해 보였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