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의 막바지인 말복(末伏)이지만, 좀체 꺾일줄 모르는 코로나19 감염증의 확산세 만큼이나 끈질긴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복날을 나타내는 복(伏)은 엎드린다는 뜻으로, 가을의 서늘한 금기(金氣)가 여름의 무더운 화기(火氣)를 두려워하여 세번(초복·중복·말복) 엎드리고 나면 무더위가 거의 지나가게 되는 셈이라 한다. 이른바 삼복 중에는 더위가 극성을 부리기 때문에 무기력해지거나 기운이 허약해져서 건강을 해치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곤해진 심신을 안정시키고 더위를 잊기 위해 청유(淸遊)하거나 탁족(濯足)을 하고, 보신(補身)음식을 먹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건강한 여름나기를 하고 있다.
지긋지긋한 코로나에 시달리는데 더위마저 먹게 된다면 심신은 그야말로 사소한 일조차도 힘들어지게 된다. 소나기는 피해가는 게 낫다고, 코로나든 더위든 조금만 더 엎드리고 몸을 사려 조심하고 회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민감하고 우려스러운 상황에서 독불장군처럼 볼썽사나운 돌출행위로 괜스레 된서리를 맞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폭염과 전염병에 맞닥뜨리기 보다 몇 번 수그리거나 낮추면서 분위기와 여건에 맞게 순응하고 처신해야함은 비단 삼복(三伏)에만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일상이나 주변에선 간혹 무지와 독선, 욕심의 남발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종종 보도되거나 일어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판이다. 세상사 요지경(瑤池鏡)이라서 그러는 걸까? 세상이나 만물은 자연이 그러하듯이 음양과 오행에 따라 조화와 질서가 생기고, 상생상극의 이치와 순리 속에 안정적이고 균형적인 변화와 진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대자연계에서도 상생상극의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뤄가듯이 인간사회 역시 개인이나 조직이 화합하고 상충, 상반되는 논리와 견해에 따라 티격태격하는 ‘부조화의 조화’ 속에서 천태만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부조화는 관점이나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나고, 아집과 욕망에 사로잡힌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으로 표면화하게 된다.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이나 집단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그들의 노선을 지키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진실을 곡해, 호도하여 합리화시키거나 집요하게 선전, 회유를 조장하기도 한다.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오해와 갈등을 불식시켜야 함에도, 수시로 말을 바꾸고 억측과 왜곡으로 전(煎) 뒤집듯이 순식간에 번복을 일삼는데 무슨 수로 문제해결과 합목적적인 조화로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전형적인 표리부동이요 자가당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과 사회생활의 기본은 믿음과 약속이다. 믿음이 없으면 일어서지 못하듯이(無信不立), 신의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고 의지하기 어렵다. 철석같이 믿어왔던 사람이 욕망의 왜곡 같은 불신과 의문, 위선적인 행태를 일삼는다면 실망감을 넘어 환멸감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우연히 쳐다본 석양 무렵의 하늘에 야누스 형상 같은 구름이 바람에 쓸리고 있었음은 무슨 연유였을까? 사람은 어울림의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귀하다는 배려와 존중으로 겸손과 양보의 마음을 서로 나눌 때, 조화로운 공감의 꽃이 피어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