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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맛

등록일 2021-08-23 20:17 게재일 2021-08-2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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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날카로운 문장으로 독자를 찌르는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들을 모은 ‘오스카리아나(Oscariana)’의 초판본이다. 1910년에 나왔다. 2016년 민음사에서 번역본이 나왔으니 그것을 구해볼 수 있다.
언제나 날카로운 문장으로 독자를 찌르는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들을 모은 ‘오스카리아나(Oscariana)’의 초판본이다. 1910년에 나왔다. 2016년 민음사에서 번역본이 나왔으니 그것을 구해볼 수 있다.

유독 어떤 문장들은 읽고 지나간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문장은 어떤 뜻인지 알듯 말듯해 끝없이 미끄러지며 그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어떤 문장은 마치 내 청춘의 한 조각인 것만 같아 유독 가슴 아프게 나를 물어뜯기도 한다. 또, 며칠 전부터 내 머릿속에서 오가던 희부윰한 생각들을 그야말로 딱 맞는 문장으로 풀어낸 누군가의 글이 주는 그 시원함 때문에 잊지 못하고 어딘가에 갈무리해두었다가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꺼내보게 되기도 한다. 하나의 문장이 나의 마음속에 던지는 것, 그리고 조금씩 살이 붙어 무시할 수 없는 어떤 또 다른 것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언어로 된 무언가를 읽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고 반드시 건드리고 지나가는 문장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어떤 문장을 읽고 혼란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마음의 방심 상태를 그 문장이 습격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개 격언이나 금언, 경구, 잠언 등을 의미하는 아포리즘(aphorism)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비틀어 혼란에 빠뜨리거나, 반대로 그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선언하면서, 그것을 읽는 우리를 새삼스럽게 만든다.

오스카 와일드는 하나의 문장을 통해 인간의 심리적 허점을 찌르는 분야에 있어서는 가장 탁월하다고 해도 좋은 작가였다. “경험이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실수에 붙이는 이름이다”라든가 “유혹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에 굴복하는 것이다” 같은 문장은 인생에서 번민에 빠진 인간에게는 찌릿거릴 정도의 혹독함을, 아직 번민을 경험하지 않은 인간에게는 당연하고 만연한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생각의 자유를 허용한다. 한 권의 책으로 묶어도 충분한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들에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답답한 삶의 국면들을 잠시 벗어나도록 하는 단호함과 새롭게 찌르는 시각이 있다.

또, 어떤 문장은 우리를 그 책 속에 들어 있는 세계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 이상(李箱)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은 그것을 읽는 순간 우리를 여기 현실이 아니라 그가 펼쳐놓은 상상적 기호놀음 속으로 끌어들여 그 속에 길을 잃게 만든다. 어떤 미로는 출구로 빠져나갈 때보다 그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더 의미 있는 것이다.

작가 김연수가 자신이 젊은 날을 사로잡은 문장들을 모아놓은 책 ‘청춘의 문장들’(마음산책, 2004).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붙들었던 문장들을 살짝 들여다 볼 수 있다.
작가 김연수가 자신이 젊은 날을 사로잡은 문장들을 모아놓은 책 ‘청춘의 문장들’(마음산책, 2004).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붙들었던 문장들을 살짝 들여다 볼 수 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는 문장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나 “역사에 걸쳐 여성은 익명의 존재였다”는 문장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어떠한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문장에 불과한 자리를 넘어, 독자로 하여금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 세계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해보고 싶도록 만들지 않는가. 이 문장은 절대로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붙들어 더 깊숙한 곳까지 끌고 들어간다.

그래서, 어떤 문장은 마치 익숙한 노래 가사처럼 사라지지 않고 맴돌고,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서 문득 떠올라 내가 그 문장을 통해 고민하고 있던 장면들을 소환한다. 하나의 문장에 압축된 기억, 그리고 하나의 문장의 여백에 남겨진 기억들이 그것을 읽었던 시절에 우리를 바로 그 때, 그 세계 속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독서를 한다는 것은, 그 책 속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문장에 귀 기울이는 것이기도 하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우리를 붙잡는 문장의 뒷맛은 우리를 오랫동안 그 책 속에 머물도록 만든다. 그러니, 이미 널리 알려진 유명한 소설의 명문장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다. 어떤 문장이 우리를 붙드는 이유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니 말이다. 마음을 붙드는 자기만의 문장을 갖는 것은 독서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웅숭깊어지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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