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와 시에나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시에나(Siena)는 지금도 중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시에나는 해발 320m 높이의 구릉에 위치해 있어 도시 전체가 마치 요새처럼 보인다.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시에나와 피렌체는 오랜 시간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고 두 도시간의 자존심 다툼은 지금까지도 읽을 수 있다. 상업, 무역업, 금융업이 번성했던 피렌체가 15세기 문예부흥 르네상스의 발생지였다면 시에나는 혁신보다는 중세의 전통 계승을 선택했다.
유럽의 주요 도시들 중심에는 대성당이 세워져 있다. 중세 사람들에게 대성당은 지역의 종교적 구심점이기도 했지만 대외적으로 부와 권력은 물론 지역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대성당 건축은 지역 구성원 모두의 공동 과업이었다. 시에나와 피렌체의 중심에도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는데 두 교회는 전혀 다른 건축 양식을 보인다. 13세기 초에 완공된 시에나 대성당(1196∼1215)은 당시 유행하던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작은 첨탑 모양을 띤 건축 장식의 날카로운 형태감이 여느 고딕성당과 마찬가지로 메인 파사드의 인상을 결정짓는다.
다채로운 색상이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어 얼핏 보기에 시에나 대성당과 비슷해 보이지만 피렌체 대성당은 다른 시대 다른 양식의 건축물이다. ‘꽃의 성모’라는 이름의 피렌체 대성당 건축 공사(1296∼1436)는 시에나 보다 100여년 늦게 시작되었다. 아마도 경쟁도시 시에나가 웅장하고 화려한 대성당을 완성한 것이 피렌체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피렌체 대성당 공사는 13세기 후반 시작되었지만, 그래서 고딕양식의 특징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건축이 완성된 것은 15세기 초반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후이다.
중세 전통에 충실했던 시에나 보다 좀 더 진취적이었던 피렌체는 고딕양식에 만족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건축을 갈망했다. 중세 고딕과 르네상스 미술은 전혀 다른 미학적 원리를 지향했다.‘신적인 세계의 상징’이 중세미술 전반을 지배했다면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미술의 조형요소를 발견하고 새롭게 적용했다. 특히 고대건축이 강조했던 형식적 특징은 비례와 균형, 조화와 통일성이었다. 하나의 세부요소는 형태와 크기에서 전체에 상응해야 했고, 전체는 세부요소들 간의 균형과 통일된 관계로 이루어져야 했다.
피렌체 대성당 완공이 계획보다 늦어진 것은 혁신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로마식 십자가 형태를 지닌 평면도에서 교회의 가로통로(익랑)와 세로통로(신랑)가 만나는 교차랑(transept) 상단에 거대한 돔을 올려 피렌체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었다. 1418년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었지만 지름이 43미터나 되는 돔을 올릴 방법이 없었다. 1419년 양모상 길드인 아르테 델라 라나가 돔 설계를 위한 공모를 진행했고 조각가이자 건축가 필립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가 당선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혁신적인 발상으로 팔각형의 이중벽 구조를 고안했고 상상조차 어려운 방식으로 400만장의 벽돌을 쌓아 올려 무게가 3만7천톤에 이르는 기념비적인 돔을 완성했다. 붉은 색의 찬란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르네상스의 정신을 상징한다.
시에나와 피렌체 모두 선출된 시민대표가 도시를 통치하던 공화정을 택하고 있었다. 시민들에 의해 정부가 움직인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지 시청사는 광장(Piazza)에 자리하고 있다. 시청에서는 주요 정책들이 결정되었던 만큼 시청사 건물은 중요한 정치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도심에 세워진 두 도시의 시청사는 모두 요새처럼 폐쇄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높은 망루를 가지고 있었다.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