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를 마친 들판이 벼들의 키만큼 낮아졌다. 낟알을 떨어낸 볏짚이 줄지어 누워 가을볕에 말라간다. 이는 물론 저절로 된 가을 풍경이 아니다. 땅을 갈아 벼를 심고 가꾸는 일련의 과정에 자연과 인위(人爲)가 뒤섞였다. 그 인위에는 사람의 육신보다는 기계문명이 더 큰 역할을 했다. 바둑판같은 구획정리,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 곧게 흐르는 수로, 곳곳에 설치된 관정까지 들판도 이제는 상당히 문명화 된 모습이다. 비료와 살충제, 제초제 같은 농약이 없어도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들판의 가을 풍경에는 이런 내막이 있다.
갈색으로 보호색을 바꾼 메뚜기들이 가끔씩 눈에 띈다. ‘메뚜기도 유월이 한철’이란 속담이 있듯이 철지난 메뚜기다. 꼬투리 터진 콩알처럼 튀어 달아나던 한창 때의 모습이 아니다. 이번 가을에 새삼 발견한 것은 메뚜기들이 작아졌다는 사실이다. 제초제와 살충제 때문에 개체수가 줄어든 것은 알겠는데, 메뚜기들의 몸집이 절반가량이나 작아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비와 잠자리도 이따금 눈앞을 스친다. 아직은 쑥부쟁이 같은 늦게 핀 꽃들이 있으니 나비의 역할도 남았으리라. 늦가을 들판에는 바야흐로 억새가 제철을 맞는다. 억새는 노후가 유난히 길고 젊은 시절보다 더 환한 모습이다.
들판을 휘돌아 흐르는 냇바닥에 우거진 풀들은 제멋대로다. 일 년에 한두 차례 큰물이 져서 휩쓸리기도 하지만 저절로 난 풀과 나무들이 길길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다. 억새와 갈대가 주종이지만 군데군데 버드나무도 있고 그 틈새를 비집고 온갖 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무질서하고 혼잡한 자연의 숲이다. 그 속에서 새들은 둥지를 틀고 고라니가 몸을 숨기기도 한다. 사실 냇바닥의 생태계는 오래된 자연의 모습은 아니다. 골재를 채취하거나 준설을 하면서 파낸 냇바닥을 자연이 급조한 생태계인 셈이다. 그런 혼잡에도 불구하고 봄철에는 신록으로 여름에는 녹음으로 지금은 가을빛으로 통일을 이루고 있다.
가을 길에는 온갖 것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가을 빛이 있고 그것이 또 정서의 강을 이루기도 한다. 봄의 생기와 여름의 열정을 지나 가을에는 차분해지고 완숙해지는 계절이다. 그러다 가을이 더 깊어지면 다 놓아버리고 허허로워지는 계절이다. 자연의 가을이 그렇고 인생의 가을도 그렇다. 가을에는 가을 길을 갈 일이다. 가을의 산천초목이 내어주는 길, 높푸른 하늘 흰 구름이 써늘해진 바람이 가리키는 길이 있다. 아무튼 한 두 마디 시적인 문장으로 뭉뚱그릴 수 없는 복잡하고 구체적인 생태의 모습들이 가을 들길이다.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도 한다. 사람에 따라 그 길은 다양하고 우여곡절이 많기도 할 것이다. 탄탄대로거나 꽃길이거나 난마처럼 뒤엉킨 길이거나 죽음이라는 종착지는 같은 길이다. 그러나 산천초목이 일사불란 계절을 따라가듯이 인생에도 어디든 희망의 이정표가 없지는 않은 게 섭리다. 다만 욕심이나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할 뿐이다. 생명의 이정표, 대자연의 이정표를 수시로 확인하는 삶이라야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