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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달콤하다

등록일 2021-11-14 19:56 게재일 2021-11-15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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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숲의 은목서 가로수길. /이진아 씨 제공

바람이 서늘도 하여 걷기에 참 좋다. 여름부터 포항 여기저기를 찾아 매일 아침 걷기 시작한 것이 가을이 깊도록 이어졌다. 철길숲의 맨 끝 지점인 효자교회에서 유강까지 가는 코스를 걸었다. 가장 최근에 꾸미기 시작한 길이라 미완성이다. 유강에 이르러서는 흙길이라 걷기엔 폭삭해서 좋은데 비 오는 날엔 질척거려 신발에 진흙이 다 달라붙었다. 가로수는 덜 자라 햇볕을 다 가리지 못한다.

그래도 새길을 걷는 맛이 있다. 지나는 이도 다른 길에 비해 적어 소란스럽지 않아 가을 아침 공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기찻길 옆으로 코스모스가 남은 가을을 붙잡고 흔들고 여름꽃인 미국수국이 갈바람이 시린지 남은 꽃잎 끝을 말리고 있다. 나무에 내걸린 풍경이 바람에 스치운다. 새벽부터 출근한 새소리가 덧입혀져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그때, 함께 걷던 진아씨가 묻는다. “이건 무슨 꽃이에요?” 시골 출신이라 도시녀에 비해 꽃과 나무 이름 몇개 더 알고 있다고 무엇이든 자꾸 물어온다. 푸힛, 사실은 나도 잘 모르는데 말이다. 잎 모양이 지난해 청하중학교 교정에서 본 나무였다. 함께 간 순옥언니가 아들과 함께 심었다는 그 나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입속에서만 가물거렸다.

스마트폰이 나설 때다. 가까이 가서 꽃과 잎이 자세히 나오게 사진을 찍어 검색란에 올리자 비슷한 무리의 꽃나무들이 주르륵 펼쳐진다. 그중에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은목서’, 처음 들었을 때 나무 이름보다 역사책 언저리에 써진 선비 이름 같다고 느꼈던 그 이름 맞았다. ‘은’은 하얀 꽃이 펴서 붙여진 것일 테고, 목은 나무, 그럼 서(犀)는 무슨 뜻일까, 한자를 찾아보니 무소 서였다. 수피가 코뿔소의 피부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가까이 가니 향이향이, 끝내줬다. 마스크를 하고 있는데도 뚫고 들어와 내 몸을 달달하게 만들었다. 꽃 이름을 물은 진아씨에게 얼른 향기를 맡아보라고 했다. 원래 냄새를 잘 못 느낀다며 마스크를 벗고 나무 가까이 코를 들이밀었다. 앗 따거, 뾰족한 잎에 찔려 화들짝 놀란다. 달콤한 향기와 달리 가시를 세운 잎 모양이 독특하다. 나도 조심조심 가지 마디에 피어난 꽃잎에 코를 파묻고 향을 흠뻑 받아들였다.

한껏 향에 취한 뒤 나무 전체를 찍으려고 뒤로 물러서니 그 옆에 가로수들이 은목서였다. 대부분의 나무가 떨켜를 만드는 서늘한 늦가을에 이제서야 하얗게 꽃문을 여는 나무를 만나서인지 신기하고 반가웠다. 아기 손톱 같은 몽오리들이 오종종하니 피었는데도 향기는 길을 가득 채웠다.

향에 취해 한번은 아쉬워 그 길을 두어 번 오갔다. 내일 또 오자하고 돌아섰다.

나무 사전에는 팔월에서 시월에 핀다고 하는데 지금은 십일월이다. 사전의 내용을 고쳐 써야겠다. 열매는 다음 해 이월 삼월에 맺힌다고 하는데 진아씨는 4월쯤에 몇 개 주우러 오겠다고 한다. 나는 종일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꽃집을 하는 친구에게 은목서 한 그루를 주문하고야 말았다. 고양이를 입양한 후 그 좋아하던 꽃을 포기했었다. 고양이 호흡기에 꽃이 독이 된다 해서 꽃병이 여러 날 휴업상태였다. 그런 이유를 곱씹어봐도 은목서는 탐이 났다. 고양이 보리가 관심을 기울이면 시댁 마당에 심기로 하고 질러 버렸다. 며칠 후면 은목서는 우리 식구 이름이 될 것이다.

“푸른 하늘 으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아무 하안나무 토끼 한 마리.” 노래에 나오는 계수나무가 목서라고 한다. 주황색의 꽃이 피면 금목서 하얀색이 피면 은목서이다. 향이 좋아서 샤넬넘버.5의 재료로 쓰인다고 하니 효자교회 근처 철길숲은 지금 고급 향수의 바다다.

신기한 건 하나 더 있다. 뾰족하던 잎이 나무가 성숙할수록 둥그스름해진다는 것이다. 아직은 모가 난 내 마음도 나이가 들면 조금씩 무뎌질 거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은목서를 가까이 두고 마음지침서로 들춰봐야 가능한 일이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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