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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가질 것이다 (Ⅴ)

등록일 2022-02-07 20:09 게재일 2022-02-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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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는 나와 함께 하는 동안만 우리 집안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약속하마. 하지만 안나와 안나 뱃속의 아이는 다르다. 이제 네가 약속해다오. 안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너의 동생으로 인정해다오.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내가 죽은 뒤에도 그 아이를 경쟁자라 여기지 말거라.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느냐. 내가 저 세상으로 갈 무렵이면 너도 이미 제법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는 그저 그 아이가 건강하게 바르게 자라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커 준다면 그때 가서 그 아이가 할 일이 있겠지.

-알겠습니다.

필립이 대답했다. 만식은 무릎과 허벅지를 손으로 움켜쥐며 필립을 보았다. 억울하다, 서운하다, 그럴 수 없다. 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거지? 알겠습니다, 라니. 필립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를 사랑하십니까?

필립이 만식에게 물었다.

-사랑이 무엇이냐?

만식이 대답했다.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필립이 다시 만식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느냐? 젊고 건강한 여자를 가질 수 있다면 너는 거부할 수 있느냐? 내가 칠십 먹은 여자와 함께 있으면 아름다운 것이냐? 돈 있고 건강이 있는데, 욕망이 있는데 왜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도덕, 다른 사람들의 시선, 순리 따위 말하지 마라. 그것들에 신경 쓸 것이었으면 애초에 인공 장기 따위 이식받지 않았다. 나는 벌써 죽었지. 나는 안나의 피부, 가슴, 엉덩이를 보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게 사랑이라면 안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게 징그러운 노욕이라면 노욕이겠지. 노욕이면 또 어때.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가진 것뿐이다. 안나도 내게서 받고 싶은 것을 받을 것이고. 우리는 서로 주고받은 거다. 너는 다를 줄 아느냐?

만식은 이렇게 대답했다.

 

짐을 다 챙긴 만식이 병동의 수간호사를 불렀다. 짐을 집으로 보내 달라 부탁했다.

수간호사는 당황했지만 이내 네, 하고 대답했다. 굳이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원래는 안 해드리는 건데.

수간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흘렸지만 만식은 대답 없이 병실을 나섰다. 확실히 이전보다 숨쉬기 편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것이 맞기는 한데, 어디에 세웠더라? 차를 어디에 세워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하 2층이 맞는데. 만식은 천천히 지하 주차장 벽을 따라 걸었다. 왼쪽 기둥 뒤쪽 낯익은 차가 보였다. 저렇게 먼 곳에 세워두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 문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만식의 손을 잡았다. 만식이 고개를 들었다.

-자네가 여기 어쩐 일인가?

-회장님 혼자 퇴원하신다고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제 차를 타시지요. 바로 옆에 세워두었습니다.

만식은 차 뒷좌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내 차는 어쩌지?

안전띠를 매며 만식이 물었다.

-옮겨다 놓겠습니다.

-열쇠는?

-저희에게 비상키가 있습니다. 지금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라니?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제가 오면서 한 명 더 데리고 왔습니다. 회장님을 모시는 것, 회장님 차를 옮겨 놓는 것 두 가지를 혼자 할 수 없어서.

만식을 태운 차는 병원을 빠져나갔다. 십 분 정도 지난 뒤 만식의 차도 뒤따랐다. 만식은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 등을 기댔다. 걱정을 했단 말이지. 기특했다.

-회장님 드실 음료를 챙겨왔습니다. 직접 달인 것이라고, 직접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고, 꼭 다 드시라 하더군요. 콘솔박스에 있습니다.

만식은 콘솔박스에서 텀블러를 꺼내 텀블러의 뚜껑을 열었다. 하얀 김이 올라왔다. 약간은 쓴, 하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만식은 차창을 내리고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이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아서 걸러질 것입니다. 만식은 이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

잠시 후 만식은 잠이 들었다. 만식을 태운 차는 경부고속도로로 향했고 만식의 차는 서울양양고속도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두 시간쯤 지나 만식이 탄 차가 금강 휴게소에 들어섰다. 푸드 코트 앞쪽에 정차를 하자 푸른색 티셔츠를 입은 사내가 올라탔다. 사내와 만식을 태운 차는 다시 출발했다.

푸른색 티셔츠는 운전석에 앉은 사내와 몇 마디 나누고는 만식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만식이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운전을 하던 사내가 앞좌석에 놓여 있던 가방을 건넸고 푸른색 티셔츠는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내 만식의 어깨에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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