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으로 소풍을 갔다. 소나무의 모양이 특별한 숲이 있어서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흥덕왕릉에 간다고 하니 집에서 가까운 곳인데도 다들 잘 모르는 눈치다. ‘태정태세문단속 예성연중집단속’, 이렇게 엉터리로라도 조선의 왕들은 우리 입에 오르내렸지만, 신라의 왕은 몇 대인지도 모른다. 우선 혁거세를 시작으로 마지막 경순왕까지 총 56명이고 그중 소재 불명을 빼면 왕릉은 총 37여 기가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주인이 확인된 무덤은 단 8기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추정할 뿐이다.
그 가운데 제42대 흥덕왕릉에 도착했다. 능의 주변 비석에 ‘흥덕’이라는 글자 덕분에 주인이 분명해진 운 좋은 능이다.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어래산 기슭 능골에 있다. 능골은 왕릉이 있는 고을이라서 붙은 이름 같다. 주차장이 얼마 전에 새로 만들었는지 훤하다. 화장실에 들르니 천장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손을 씻으니 수도꼭지에서는 뜨거운 물이 나와서 추운 날씨에도 기분이 좋았다. 흥덕왕의 백성에 대한 사랑인가, 하며 웃었다.
능을 만나려면 먼저 소나무 숲을 지나야 한다. 사실 소나무에 가려서 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레솔이 빽빽하다. 진시황의 병마용처럼 둘러서서 능을 감싸 안았다. 솔밭 사이로 바람 소리를 따라 걸었다. 갈비가 쌓여 푹신한 오솔길을 내디딜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잔가지가 투닥투닥, 산비둘기가 낯선 손님이 왔다고 경계하며 부부 울었다. 용솟음치며 올라가듯 비스듬히 누운 나무, 두 그루가 꽈배기처럼 껴안고 자라는 나무, 드디어 소나무 병정들 사이로 능이 보인다.
흥덕왕은 부인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천 년이 지나도록 신라의 로맨티스트라 불렸다. 하지만 막상 소나무 숲 앞에 놓인 안내표지판을 보면 놀랄 것이다. 장화 부인은 남편이자 삼촌인 흥덕왕이 두 동생을 살해하는 현장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왕이 부인을 사랑했다는 말이 진짜일까 싶다. 왕위에 오른 지 2개월 뒤에 왕비가 죽었다. 왕은 무덤을 안강읍에 정하고 자신도 죽으면 그 자리에 합장하라고 했다. 자기가 묻힐 자리를 미리 정해둔 것이다. 왜 왕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정했을까.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죄의식 때문에 경주의 중심지를 피했던 것이라 짐작해본다.
구석에 있어서일까, 신라의 능 가운데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곳이다. 봉분과 그 둘레의 십이지신상, 무인상과 문인상, 4마리의 석사자에 석주까지 이렇게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원성왕릉과 이곳이다.
봉분 둘레의 네 방향에는 석사자 네 마리가 지키는데 모두 보는 방향이 제각각이다. 왕릉의 주변을 천 년이나 한눈팔지 않고 경계하는 충직한 모습이다. 드디어 능에 다가서서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본다. 열두 마리의 동물이 판에 새겨져 그 특징을 보고 무슨 동물일까 맞춰가며 거닐다 보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세월에 뭉개져 귀가 쫑긋한 토끼와 구불구불한 몸의 뱀만 모습을 알아볼 정도였다.
왕릉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거북이를 못 보고 지나치기 쉽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소나무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흥덕왕릉의 이름을 지켜준 거북이니까 등이며 발의 모습도 살펴주길 바란다. 이 거북은 등에 비석을 지고 있는 귀부인데 아쉽게도 비석과 머릿돌은 사라졌다.
능을 다 돌아보았다면 이곳의 백미인 소나무 숲의 소리에 다시 귀 기울일 때다. 소나무를 솔이라 부르는데 솔은 으뜸을 의미하는 말 ‘수리’ 또는 ‘술’이 변한 것으로 나무 중에서 최고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여름철 강우량이 적을 뿐 아니라 온도 격차가 심해 소나무가 살기에 아주 좋지 않은 곳에서 자라느라 안강의 소나무는 구부러지고 뒤틀린 모양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진작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 지역만의 특징적인 소나무라 ‘안강송’이란 이름도 따로 붙여주었다. 흥덕왕릉을 지킨 공덕을 인정받아 정이품송처럼 이름을 얻었다. 드높은 소나무 숲에서 마음을 씻었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