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제전’으로 불리는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지 20일 만이다. 올림픽 정신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푸틴이 전쟁을 서두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설득력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라스푸티차(rasputitsa)’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늪 현상이다. 우크라이나의 흑토는 봄이 되면 진흙 천지로 변한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진흙의 계절’을 뜻하는 라스푸티차에 발목을 붙잡혔었다. 러시아를 지켜주던 ‘머드 장군’이 우크라이나 침공 때에는 거꾸로 러시아의 기갑부대를 멈춰세울 수 있다.
라스푸티차를 의식한 푸틴의 전략은 속전속결이었을 것이다. 19만여 명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한 막대한 전쟁 비용도 고려했을 터다. 전문가들도 개전 후 며칠 이내에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가 함락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푸틴이 예측하지 못했던 의외의 라스푸티차가 존재했다. 바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결사 항전 의지였다.
시민 저항이라는 라스푸티차는 푸틴이 고려하지 못한 변수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해외 망명을 거부하고 대러시아 항쟁의 중심에 섰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젤렌스키를 향해 “채플린이 처칠로 변했다”고 평했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확산되는 반전 여론은 푸틴에게 또 다른 늪이 되고 있다.
킹스칼리지 런던의 명예교수인 로렌스 프리드먼은 푸틴의 선택을 ‘무모한 도박’으로 표현했다. 그는 온라인에 게재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군사적 승리가 무엇이든 간에 푸틴에게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전쟁이 될 것이다.” 프리드먼 명예교수가 자신의 저서 ‘전쟁의 미래’에서 썼듯이, 전쟁은 어떠한 명분을 제시하더라도 희생의 정당성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
이번 전쟁은 강대국의 약소국 침략에 대한 우려를 국제 사회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영·러가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포기 대가로 영토와 정치적 독립을 보장했던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때 이미 휴지조각이 됐다. 국가 안보를 위해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을 갈망하지만, 러시아는 나토의 확장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서구 문명이 내세우던 자유와 정의, 인간 존엄 등의 가치도 시험대에 올라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오렌지혁명, 유로마이단 등을 거치면서 서방 세계에 편입되기 위한 행보를 계속해 왔다. 젤린스키는 최근 유럽 의회에서의 화상 연설에서 “유럽의 동등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유럽의 최빈국 우크라이나가 이번에는 유럽연합(EU)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전쟁의 문을 연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히브리대학교 교수의 말처럼 푸틴은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어도 전쟁에서는 이미 졌는지 모른다. 이제 국제 사회가 나서서 전쟁의 문을 닫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늪에 빠진 전쟁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이 더이상 희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