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이 꽃망울이라면 사월은 만개한 꽃이라 할 수 있다. 계절은 그렇게 기후의 변화를 통해 형형의 색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만물의 생사를 관장한다. 해마다 사월이면 수많은 종의 꽃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흐드러져 핀다. 많은 종의 식물이 한 톨의 씨앗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꽃들의 전쟁, 그 현장이 봄이 아닌가 싶다.
봄이라는 계절은 조금의 편협함도 없어 마치 무슨 종목별 경기를 진행하듯 유사 종의 꽃들끼리 같은 시기에 피게 하여 수정을 경쟁하게 한다. 벌 나비의 도움으로 수정이 이루어지는 꽃이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봄바람에 의해 수정이 이뤄지는 꽃도 있고 그 수정의 방법 또한 다양하다. 수정이 잘 이뤄진 꽃은 예쁜 열매를 얻고, 그렇지 못한 꽃은 떨어져서 그냥 꽃이었던 기억으로 소멸하고, 그 사는 모습이 마치 우리네 인간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예년 같으면 벌도, 나비도, 산새도, 우리네 인간도, 한창 꽃 잔치에 어울려 분주히 행복을 만끽할 시기이다. 그러나 봄꽃은커녕 생명의 새싹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곳이 있다. 대형산불로 폐허가 되어버린 동해안의 봄은, 꽃처럼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검어,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에 충분하다.
동해안 대형산불에서도 민초의 설움이 있었다. 울진 금강송 군락지를 지키느라 소방헬기와 진화 인력이 한곳으로 집중되었고, 덕분에 금강송 군락 주변의 잡목림은 버려진 잡목이 되어 서러운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순차적 진화에 희망을 걸었다가 귀족림 보호라는 명분에 진화 인력과 장비를 빼앗기고, 절망하며 사라진 잡목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많은 생각과 함께 가슴 한쪽이 먹먹하다. 인간의 이용 가치라는 잣대로 보면, 일부에 해당하는 금강송 군락지가 삼림 대부분을 차지하는 잡목 군락지보다 귀하고 값지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수의 귀족림을 먼저 구하느라 차등의 순위로 밀려서 희생된, 그보다 몇 배나 더 넓은 서민림을 생각할 때, ‘불평등’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사람이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땔감이 귀하던 시절/많은 종의 나무들이 잡목으로 낙인찍혀/땔감으로 사라지던 시절이 있었다. //오직 소나무만이/산야에서 보호받으며 살던/그런 시절이 있었다…. 계절이 넘나드는 길목/성법령에 올라/발아래 산경(山景)을 보니/아서라/이제는 산천에도 봄이 들었다.//잡목이라 이름 지어져 핍박받던/오리나무, 물박달나무, 상수리나무, 층층나무,/자작나무, 때죽나무, 왕 버드나무. /수많은 종의 나무들이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라/밀림을 이루고 있다//이제는 그들이/우리네 강산을 지키고 있다.” -오낙률 시 ‘이제는 산천에도 봄이 들었다’ 전문
아름드리 금강송이 자라는데도 수십 년, 아름드리 참나무나 버드나무가 자라는 데도 수십 년, 금강송이거나 잡목이거나, 아무 탈 없이 삼림 그 자체로 존재할 때는 그 군락의 경계가 그리 명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산불이 나고 보니 확연히 그 신분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아마 인간의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