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난 들판에 갓 피어난 벼 이삭이 가지런하다. 자세히 보면, 벼알마다 하나씩 한들거리는 아주 작은 족두리 모양의 하얀 벼꽃은, 청순하고 예쁜 아가씨들의 두 볼 너머에서 한들한들 빛나는 보석 귀걸이 같다. 머지않아 추석 명절이 지나고 먼 산 단풍 소식이 체 들리기도 전에, 저토록 청순하고 푸르기만 하던 들판은 온통 황금빛으로 바뀌며 인류의 풍요와 번영을 선언할 것이다.
태초에 농경 생활이 시작되면서 인류는 번창하기 시작했고 오늘의 찬란한 인류 문명이 있기까지 농경문화가 그 뿌리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치 못할 사실에 해당한다. 그러나 어찌하면 좋을까? 온 국민이 농경에 매달려서 살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농경이 하나의 작은 직업군으로 분류된 오늘에 이르러 국가 경제의 뿌리를 가꾸던 농민이 다른 직업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가난한 빈곤의 대명사가 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 도시민의 눈에 비치는 농업의 이미지는 거의 3D업종으로 비치고,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흘러 세대가 젊은 층으로 내려갈수록 더 굳어지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이렇게 주저앉아 울고 싶은 사람들이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온 나라 국민을 먹여 살리던 농민들인데, 이제는 경제부흥을 이룰 만큼 이루었는데, 국가는 어찌하여 아직도 농정을 국정의 최하위에 두는 건지, 다 같이 잘 먹고 잘사는 사회의 울타리 안에 과연 농민도 포함하는지 궁금하다.
필자의 유년 시절인 60년대만 해도 한 가정에서 성장한 형제가 사회생활을 할 때가 되면 맏아들은 부모님의 가업을 받들고 차남들은 객지로 돈벌이를 떠나는 게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은 삼시 세끼만 해결되어도 요즘 사회의 중산층 개념에 드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 그때는 자갈논 몇 마지기만 있어도 부자라는 소리를 듣던 세상이었고 부잣집 가난한 집 할 것 없이 맏아들은 부모님이 계시는 농촌을 지키며 농업을 이어 가고 장남을 제외한 형제들은 하나같이 고향을 떠나 객지살이를 시작했었다. 그들의 객지살이는 대부분 크고 작은 도시의 상가나 공장 생활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엔 부잣집 맏아들을 부러워하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맏아들에게 유산 상속을 많이 물려주던 당시의 상속에 관한 풍습 같은 게 사회에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맏이는 농촌에 남고 차남은 객지로 제 살길 찾아서 떠나던 시절에 대한 삶의 성적표 같은 것을 작금의 우리 사회는 받아들고 있다. 가끔 언론에서 억대 농부 운운하며 소개되는 농민도 있긴 하지만 그건 우리나라 전체 농민 중에서 극히 일부 농민이고 그 범주에 드는 농가라 할지라도 대부분 부부가 협업하는 농장이다. 그 억대 농부라는 말은 실제로 도시직장인처럼 한 사람의 농업인을 두고 하는 호칭은 아닐 것이며 또 그들의 수입을 도시 직업인과 비교해 봐도 우리나라 중산층의 범주에 겨우 들까 말까 한 수준이다. 그러고 보면, ‘오! 통제라!’ 60년 대 70년대 우리나라 어머니 아버지께선, 당신이 그리도 아끼시던 맏아들에게 멍에 같은 가난을 물려준 셈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