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섬유예술가 <br/>강경신 작가
달빛을 은은하게 머금은 영국의 대성당과 오방색의 퀼트.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쌈솔 바느질한 등불. 영국에서 활동하는 섬유예술가 강경신(Magenta Kang)은 이민자의 삶을 씨실과 날실로 엮는다. 타국에서 살고 있지만 깊은 내면 속 한국인의 심지가 도드라지게 새겨진다. 한국의 전통직물을 영국식 직조방식으로 작업하는 그가 25년 만에 고향에서 ‘Through Korean eyes’전을 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즐겨 입던 모시옷과 제부의 상복을 뜯어 전통적인 한국 조각보 기법으로 이어 만든 작품 등이 호평을 받으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포항 도심의 꿈틀로 문화창작지구에 위치한 갤러리M(관장 최수정)에서 강경신 작가를 만났다.
아버지 모시옷·제부 상복 뜯어 조각보기법으로 만든 작품들
‘Through Korean eyes’전 25년 만에 고향에서 선보여
600년 된 나무에 마젠타 색의 붕대 감는 ‘마젠타 트리’ 작업
고통 벗어나 몰두한 자신처럼 예술로 치유받길 바라는 마음
영국은 ‘돌맹이 던지면 예술가 맞는다’ 할 정도로 종사자 많아
포항도 예술에 대한 문턱 낮춰 생활서 즐기는 문화도시 되길
-얼마 만에 고향에 온 건가.
△1997년에 영국으로 건너갔고 간간이 오가다 이번에 7년 만에 왔다. 최근에 두어 번 비행기 표를 끊었다가 코로나19로 취소했다. 고향에서 전시하는 건 25년 만이다. 서울과 울산을 거쳐 순회전의 마지막이 포항이다. 고향에서 전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뭉클하다. 타국에서 어떻게든 작업을 이어가려고 아등바등하며 노력한 보람이 있다.
-영국으로 가기 전 포항에서 한 전시는.
△출국하기 전 2년 정도 포항청년작가회에서 활동했다. 그 후 연락이 끊겼다가 SNS를 통해 한 친구와 연결되어 회원들과도 인연이 닿았다. 1995∼1996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칠포와 영일대 해수욕장에 해변 설치 미술전을 열었다.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토론이 치열했다. 당시 포항제철에서 날아든 쇳가루가 심각한 이슈였기에 환경을 주제로 모기에 뜯겨가며 작품을 설치했던 기억이 있다.
-영국에서 모시나 삼베 같은 전통직물로 작업을 한다니 흥미롭다.
△내 작업은 크게 직조와 설치, 보자기 세 분야다. 대학원에서 ‘나의 정체성 찾기’를 주제로 논문을 쓰면서 한국 전통직물에 푹 빠졌다. 한국적인 재료를 영국식 직조 방식으로 작업한다. 영국에서 아티스트로 생존하려면 그들과 달라야한다. 재료는 어머니가 지인이 입던 옷이나 죽도시장 한복점에서 자투리 천을 모아 보내주신다.
-영국의 대성당을 디자인한 작품이 많은데.
△10년 넘게 거주하고 있는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주의 일리 대성당(Ely Cathedral)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즐겨 입던 모시옷과 제부의 상복을 뜯어 쌈솔 바느질을 했다. 작품 중에 이름을 새긴 것도 있는데 일리의 전쟁추모기념비에 있는 세계대전 전사자 223명의 이름이다. LED조명을 사용한 랜턴은 지난 5월 한 달 반 동안 성당 안에 걸었던 작품이다. 3년 동안 바느질을 해서 72개를 등갓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모시옷과 삼베 이불, 상복으로 만든 작품이 인상적이다. 작가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는 포항 도심인 육거리에서 도장을 파는 인장(印章)과 인쇄업을 했다. 예닐곱 살부터 매일 새벽에 깨워 서예를 가르쳐주셨는데 그때 예술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 그런 영향인지 일찍부터 그리는 걸 좋아했고 자연스럽게 미술을 전공하고 섬유디자이너로 일했다.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 계기는.
△대학에서 섬유디자인을 강의한 적이 있는데 교수로부터 그림을 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받았다. 누가 내 작품으로 외국 대학에 합격했는데 원본을 제출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작품을 제공하는 대가로 전임 강사를 제안했다. 화가 나는 한편으로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 나이 서른이었다.
-유학하던 때가 IMF 시기 아닌가.
△영국 런던에 있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Central Saint Martin College)에서 저녁에 파트타임 과정을 듣고 오전에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던 중에 한 교수가 자기 스튜디오에서 일해보자고 했다. 섬유에 붓으로 그린 패턴을 미국 뉴욕의 고급 의류매장에 판매했는데 내가 그린 디자인이 제법 많이 팔렸다. 유학생들이 귀국하던 IMF때도 조금이나마 돈을 벌었기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건가.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결혼을 했고 가정에 충실하고자 일도 그만뒀다. 그런 와중에 직조만은 개인 레슨을 받아가며 꾸준하게 작업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암투병과 수술, 이혼과 교통사고까지 연거푸 겪으면서 인생의 거센 파도를 만났다.
-인생의 격랑을 어떻게 극복했나.
△운 좋게도 한국인 상담사와 만났다. 홍콩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에서 훈련과정을 밟는 상담사와 1년 넘게 면담했다. 또 기적 같은 일도 있었다. 결혼 전에 방문했던 웨스틴 딘 대학(West Dean College)에서 ‘오픈 스튜디오’ 행사 초대장이 온 것이다. 10년 만에 그것도 이사 직전에 도착했다. 거기다 돈 한 푼 없는 상황에서 교통사고 보상금이 딱 대학원 1학기 등록금만큼 나왔다. 석사 1년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장학금으로 다음 과정을 이어갔다. 한국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아들을 돌봐주셨다. 그때 어머니가 내 작품을 보더니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더라. 외할아버지는 만주를 오가며 일했는데 한 달이 걸려 돌아올 때마다 스웨터를 짜올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고 했다.
-어떻게 공부해서 현지 학생들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했나.
△죽으려고도 했을 만큼 힘든 시기를 지나 다시 살려고 시작한 것이 대학원이다. 캠퍼스에 있는 600년 된 나무에 매일 마젠타 색의 붕대를 감는 작업을 했다. ‘마젠타’는 미대에 진학해서 지은 내 이름인데 밝은 자주색을 뜻한다, 6개월간 감은 뒤 열흘간 풀어서 의자를 짰다.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한 작업이었는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첫 개인전 ‘마젠타 트리’를 열었다.
일명 ‘마젠타 트리’를 만드는 과정은 영상으로 남아있다. 처음에는 혼자 하던 붕대 감기를 누군가가 동참하고 동네 아이들이 그 나무를 타고 놀았다. 영상과 함께 작가의 흥얼거리는 노래가 흐르는데, 기도 같기도 하고 우는소리 같기도 했다. 강경신 작가는 힘든 시기를 겪었기에 그런 작품이 나왔다고 믿는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몰두할 일을 찾게 됐고 작품도 깊이 있게 나온 것 같다고.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보는 눈이 생긴 것에 감사하다고. 영상은 ‘예술은 힐링이다’라는 문구로 끝난다. 예술로 치유 받은 자신의 작품으로 누군가도 치유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영국에서 전시를 했다고 들었다.
△잉글랜드 동부의 예술가 그룹 ‘우즈라이프(OuseLife)’와 일리 대성당에서 전시를 했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성당으로 포항에서 선보인 다수의 작품을 전시했고, 먹그림은 성당에 들어가서 스케치한 작품이다. 매년 7월이면 ‘케임브리지 오픈 스튜디오’에 참여하는데 올해는 한국에 오느라 못했다.
-케임브리지 오픈 스튜디오는 80년 전통의 행사라고.
△매년 7월,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오픈하는 행사다. 참여 작가만 500여 명이다. 작가의 프로필과 작품, 작업실 위치 등을 앱으로 제공하고 매년 업데이트한다. 작년에는 차로 두세 시간 걸리는 런던에서 그림을 사러온 애호가도 있었다.
-작업실을 오픈하고 시민과 교류하는 것은 예술가의 거리인 꿈틀로의 취지와 비슷하다.
△안 그래도 작업실을 둘러보며 짚풀과 종이 공예를 배우고 있다. 영국에서는 오로지 내 작업에만 몰두했는데 고향이라 그런지 여유가 있고 영감도 얻는다. 꿈틀로에서 열리는 ‘아트마켓 298놀장’에도 가봤는데 활기가 넘쳤다. 문화의 불모지라고 여겼던 포항에서 뭔가 꿈틀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꿈틀로도 케임브리지처럼 오랜 전통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나아지고 있다지만 지역 예술인의 현실이 녹록치 않다. 꿈틀로에 제안을 한다면.
△지원받는 사업은 주최 측과 협상을 해야 하고 어느 정도 끌려갈 수밖에 없다. 케임브리지 오픈 스튜디오의 경우 작가들이 운영하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적다. 예술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돌멩이를 던지면 이씨, 박씨, 김씨가 맞는다지만 영국에서는 아티스트가 맞는다고 할 정도로 예술 종사자가 많다. 예술에 대한 문턱을 낮추고 생활에서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곧 영국으로 돌아갈 텐데 고향에서의 시간들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개막전 축사에서 류영재 선배(포항예총 회장)가 ‘바뿌제’로 동서양을 접목시킨 예술가라고 해서 다들 폭소했다. 잊고 있던 단어인데 정감 있고 지역색이 묻어있어 나중에는 ‘바뿌제’로 전시를 해볼까 한다. 최근 한류 열풍으로 영국에도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높아 보자기 강의나 전시 일정이 2024년까지 잡혀있다. 타국에서 가장 생각났던 음식이 신선한 미역에 싼 과메기였는데 못 먹고 가서 아쉽다. 83세 어머니가 천천히 늙으시면 더할 나위 없겠다.
강경신(Magenta Kang) 작가는
포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1997년 영국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Central Saint Martin College)에서 공부한 후 런던에서 텍스타일 디자이너로 일했고 2012년에 웨스트 딘 칼리지(West Dean College in Chichester)에서 섬유예술 미술 석사를 받은 후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주 일리(Ely)에 정착했다. 11세기 일리 대성당이 지배하는 번화한 시장 마을의 일상에 매료되어 대성당과 주변 정원 등에서 영감을 얻는다. 지난 8월 서울 북촌을 시작으로 울산과 포항에서 ‘Through Korean eyes’ 순회전을 열었다. 25년 만에 다신 만난 고향의 작가들과 죽도시장 칼국수와 호떡을 사먹으며 이게 꿈이 아닐까 볼을 꼬집어볼 정도로 행복한 기억을 쌓고 오는 15일 영국으로 돌아간다.
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
/배은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