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식 ①<br/>1949년 해병대 1기로 입대
해병대는 짙푸른 동해와 서민들의 삶이 생동하는 죽도시장과 함께 포항을 상징하는 선명한 이미지다. 1959년 해병 제1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이전하면서 시작된 포항과 해병대의 인연이 어느새 63년에 이르렀다. 해병대 1기로 입대해 6·25전쟁 때 목숨을 건 전투를 수십 차례 치른 이봉식(91세) 선생은 인생의 3분의 2가 넘는 61년을 포항에서 살았다. 위국헌신(爲國獻身)이란 군인의 본분이 흐려진 시대에 이봉식 선생이 들려주는 생생한 ‘해병대 이야기’와 ‘6·25의 기억’은 비단 군인만이 아닌 포항 시민들도 충분히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가장 노릇을 했는데 대전에 가서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철수한 후 한국의 치안은 엉망이었어. 어리지만 이렇게 나라가 흔들려서야 되겠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
해병대는 육지에서도 싸우고 바다에서도 싸운다고 하니 매력적으로 들렸어. ‘그럼 좋다. 나는 해병대로 간다’고 마음먹었지. 신체와 체력이 좋은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손을 들었고, 해병대 1기 300명 안에 뽑혔어.
홍성식(이하 홍) : 태어나신 곳이 어딘가요?
이봉식(이하 이) : 충청북도 보은이야. 바다와는 아주 멀고 강이 지척인 농촌에서 태어났지. 1931년 2월 19일생인데 우리 나이로 아흔둘이 되었네.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어. 위로 누이가 두 분이야. 이제는 형제가 거의 죽고 막냇동생이 천안에 살고 있어.
홍 : 1931년에 태어나 광복 이전까지 유년시절은 어땠습니까?
이 : 일제강점기 때는 농사를 지으면 일본인들이 전부 가져갔어. 우리 집은 광복이 되었지만 생활에 큰 변화가 없으니까 광복 직후에 고향을 떠났어. 1941년 가을에 일본군이 미국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나.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이 우리에게 도전했구나”라고 말했다는데, 태평양전쟁이 터졌지. 그때 난 열한두 살이었고, 한국도 어수선했어. 농촌에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객지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대전으로 이사하면서 학교엔 다니기가 쉽지 않았어.
홍 : 그 시절에 대부분 그렇듯 힘든 유년이었군요.
이 :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가장 노릇을 했는데 대전에 가서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철수한 후 한국의 치안은 엉망이었어. 어리지만 이렇게 나라가 흔들려서야 되겠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 그즈음 해군을 모집한다는 현수막을 봤어. 그게 1949년었으니까 내가 열아홉 살 때지. 당시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에 가서 모택동(毛澤東)을 만나고 소련에 가서는 스탈린과 면담을 해 빨치산 2개 중대를 한라산과 지리산 등지에 파견했다는 소문이 돌았어. 그들이 형무소를 파괴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도 빨리 군대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내가 어린 나이에 해군에 입대한 이유가 그거야.
홍 : 육군이 아니라 해군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 : 육군에서도 모집했지. 그런데 어린 마음에 군악대를 동원해 시가지에서 나팔을 불고 행진하는 해군이 멋져 보였어. 겨우 열아홉 살짜리가 세상을 알았겠나? 보기도 좋고 이왕 군대 갈 거면 해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두 살 밑 동생에게 “나는 군대에 가서 어떻게든 견딜 테니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을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입대했어. 이후 동생들과 어머니는 대전에 있다가 고향인 보은으로 돌아갔어.
홍 : 그즈음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죠.
이 : 3월 하순에 경남 진해로 갔어. 입대 날짜는 1949년 4월 15일이야. 아직도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해. 가보니 전국에서 해군에 가려는 인원이 1천400여 명이 넘었어. 입대하고 며칠을 기다리는데 광고 하나가 나붙었어. 입대한 사람들 중 해군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남고, 해병대 300명을 뽑으니 지원하라는 거야. 그들이 해병대 1기가 된다는 거였지. 군복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광고가 붙었던 거야. 해병대는 육지에서도 싸우고 바다에서도 싸운다고 하니 매력적으로 들렸어. ‘그럼 좋다. 나는 해병대로 간다’고 마음먹었지. 신체와 체력이 좋은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손을 들었고, 해병대 1기 300명 안에 뽑혔어.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창설돼 1기 훈련생을 선발한다. 이어 1952년에는 해병 제1전투단이, 1954년에는 해병 제1여단이 생겨났다. 1955년 1월 15일 창설된 해병 제1상륙사단은 1959년 3월 28일 경기도 금촌에서 포항으로 이전했다. 베트남전쟁 시기인 1965년에는 해병대 청룡부대가 베트남으로 파병되었다.
홍 : 어린 시절에도 성격이 괄괄하고 싸움도 하고 그러셨는지요?
이 : 그러지는 않았어. 마음은 여렸지만 정신은 확고했지. 나이는 적지만 나라와 애국이 뭔지도 생각해봤고. 일제 치하에서 혹독한 시절을 보낸 게 그런 마음을 들게 했을 거야. 어쨌건 해병대 1기에 뽑혀 경남 진해 덕산비행장으로 갔어. 거기는 일제 때 해군이 주둔하던 자리인데 막사가 10여 동 있고 강당도 있었어. 부대 편성을 간단히 하고 보급품을 받은 기억이 나는군. 그렇게 해서 해병대 1기로 출발한 거지.
홍 : 훈련이 혹독했을 것 같습니다.
이 : 창설 시기나 시간이 흐른 지금이나 해병대의 훈련은 고된 것으로 유명해. 해병대 1기 300명에게 군번을 0번부터 299번까지 부여하더군, 내 군번이 174번이야. 150명씩 2중대로 편성해 며칠간 예비훈련을 하고, 4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중화민국의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와서 해병대 1기 창설을 축하했지. 그때 비행장에 300명이 줄을 섰는데 가족들도 오고 그랬어. 하지만 우리 식구들은 오지 못했지. 그때는 교통수단이 시원찮았고, 내 경우엔 식구들에게 말도 하지 않고 입대했으니까. 여하튼 바로 이 4월 15일이 한국 해병대의 시작이었어.
홍 : 막 생긴 부대라 여러 어려움이 있었겠습니다.
이 : 4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는데 처음 창설된 부대라서 보급품이 엉망이었어. 보리와 쌀을 섞은 적은 양의 밥과 콩나물국, 된장 정도만 공급되었지. 그런데 훈련의 강도는 엄청났어. 이런 말은 시대에 안 맞는 이야기지만 얼마 전 신문에 ‘해병대 1기가 4개월간 훈련받을 동안 3천600대를 맞았다’는 기사가 나오더군. 그 증언을 한 사람이 현재 포항에 살고 있는 내 동기생이야. 해병 신병 교육훈련장에 가서 그때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요즘 해병들은 이해 못 할 거야. 과거 해병대는 매를 많이 맞았어. 다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라고 가하는 체벌이었으니 지금 돌아보면 그저 허허 웃고 말지.
홍 : 군대 장비도 제대로 없었을 것 아닙니까?
이 : 일본군이 버리고 간 철모와 목총을 분배받았어. 1개 분대가 12명인데 6명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구형 99식 소총을 받고 6명은 목총을 받았지. 그러니 우습게도 총을 실제로 쏘는 게 아니라 총 쏘는 흉내만 내는 거야. 이렇게 교육을 받으면서 차차 제대로 된 보급품을 수령받았어. 하지만 정신교육만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지. 새벽 5시에 일어나 한 시간 이상 진해 시가지에서 구보를 했어. 다녀오면 젊은이들인데도 파김치가 되는데 이걸 4개월 동안 반복하니까 나중에는 모두가 살이 빠져 뼈만 남았지. 하지만 스스로 무쇠처럼 강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어.
홍 : 그런데도 훈련 중 낙오된 경우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 다들 ‘하면 된다’는 정신이 원체 강해서 낙오자가 없었어. 훈련 중 다쳐서 입원한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야. 그때 해병대 1기 300명의 훈련을 이끌던 사람이 일본 해군 출신이었지. 이 사람이 지금 100세인데 아직 살아 있어. 언젠가 해병대 예비역중앙회 총재가 된 그를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식당에서 만났는데, 우리가 “그때 왜 그렇게 때렸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랬기에 너희가 진짜 해병이 된 거야”라고 대답하더군. 요즘 시각으로 보자면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그랬어. 강한 해병대를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거지.
해병대사령부가 펴낸 ‘해병대 50년사’에는 해병대 창설의 이유와 초기 상황이 실려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의 지리적 여건상 수륙양면 작전의 필요성이 높아 1949년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해병대를 창설했다”는 것. 초대 사령관은 신현준 중령이었고,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 26명과 하사관 54명, 해군 13기에서 특별 모집한 해병대 병 1기생 300명으로 한국 해병대는 출발을 알렸다.
홍 : 한여름엔 훈련이 어렵지 않았나요?
이 : 배고픈 게 무엇보다 힘들었어. 오전 네 시간, 오후 네 시간씩 훈련받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또 야간 교육을 했지. 팔꿈치에는 피멍이 들고, 군복이 너덜너덜하게 해져 곳곳을 꿰매 입었어. 사실상 맨살로 훈련받은 셈이야. 해병대가 최고로 강한 군대가 되려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게 훈련을 시키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어.
이봉식
1931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 소년 시절부터 가장 역할을 했다. ‘위기에 처한 국가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열정으로 만 18세이던 1949년에 해병대 1기로 입대해 한국 전쟁사에 주요 전투로 기록된 인천상륙작전과 통영상륙작전, 도솔산전투와 가리산전투 등에 참여했다. 전투 중에 총상을 입었지만 후방이 아닌 전우들이 싸우고 있는 전투 지역으로 복귀를 자원했다. 휴전 후에는 진해 해병대훈련소에서 신병 교육 등을 담당하며 1961년까지 복무했다. 전역 후에는 ‘해병대의 도시’인 포항으로 이주해 지금까지 61년째 살고 있다. 40대 때부터 90대에 이르기까지 50년간 포항 해병1사단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강연에 초청받아 자신의 경험과 해병 정신을 후배들에게 들려주었다. 현재는 해병대전우회 영포지구 원로회 회장과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경상북도지부 고문으로 있으며, 대민봉사와 어려운 해병 전우 돕기에 앞장서고 있다.
대담·정리 : 홍성식기자·촬영 : 김훈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