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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고 세상을 건널 수 없을까?

등록일 2023-02-05 18:26 게재일 2023-02-0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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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 시인
이희정 시인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이성선 ‘시전집’(시와시학사, 2005) 중 ‘별을 보며’ 전문

“과학은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고, 시(詩)는 알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루소의 말은 한 시인을 불러온다.

이성선(1941∼2001) 시인은 별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기웃거리며 산 시인으로 하늘의 달과 별과 구름과 바람의 친구였던, 말하자면 우주의 시인이다.

지상이 어두울수록 낮은 자리에서 바라보는 별빛은 더 맑고 깊은 것인가. 좁게 이어진 처마 사이 총총거리는 별들이 눈시울 붉히는 밤이 있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그는 별을 바라보며 눈물 흘린다. 이어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 무엇으로 가난하랴”는 고백처럼 그는 남의 앞자리에서 서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일 혹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남들이 다 보이는 단(壇)에 서는 일을 싫어했다. 그에게 시는 그 원초적 생명에 다가가는 길이며 우주와 조화로운 합일을 꿈꾸는 삶 속에서 피어난 별이다.

어느 시대든 시인에게 있어서의 세상은 만족스럽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인간들의 세속적인 욕망으로 어지러운 세태는 원망과 절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거부 정신이 이상향인 별을 꿈꾸게 한다.

우주와 자연 속에서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추구했던 시정의 소유자, “시혼이 너무 맑아 유리 보석처럼 반짝이던 설악의 시인”이라 불리는 이성선 시인의 ‘별을 보며’는 시인이 동경했던 풀과 달과 벌레와 더불어 선(仙)의 세계에 닿아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한 ‘별’과 ‘하늘’은 우주이면서 영혼이다. 한편으로 시적 자아가 전이(轉移)된 대상이다. 그렇게 하늘이나 별처럼 초연하고 자연과 합일코자 하는 시인의 선망이 두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얇은 시집 ‘별이 비치는 지붕’에는 별이라는 낱말이 무려 39번 나온다. 현대라는 다원화된 구조 속에서 아직 시인이 별을 헤아리고 있음은 시대착오 아닐까요?”라고 묻던 박명자 시인과의 우정어린 대화는 세속의 우리를 향한 반문이다.

너무 쉽게, 너무 빠르게, 너무 가볍게 버려지는 것들이 많은 세상이다. 편리에 따라 쓰다 버린 것들이 넘쳐 그림자처럼 깔리는 시대에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쳐다보기조차 조심스러웠던 시인. 어느 것에도 오염됨이 없어야 별을, 하늘을 떳떳하게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시를 읊을수록 무엇이든 아끼는 것이 없는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진다. 지상에 별을 노래한 수많은 시들 중 가장 격조 높은 시정을 아름답게 투영한 시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지상이 거칠고 소란스러워 “별을 너무 쳐다보아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염려했던 시인이 살기엔 세상은 너무도 상처 많고 벅찬 곳이었을까. 풍진의 8, 90년대를 건너오며 외롭고도 서럽게 별을 노래한 시인의 눈빛은 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몸은 지상에 묶여도 마음은 하늘에 살고자 했고 바람으로 울어도 영혼은 저 하늘에 별로 피어나리라 염원했다.

사람과 생명이 있는 그 모든 곳, 어디서든 별을 볼 수 있어 눈이 맑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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