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필드 감독의 ‘TAR(타르)’
정점을 향한 여정에 이제 한 발짝만을 남긴 인물이 있다. 물론 그 정점 너머 또 다른 목표지점이 나타나겠지만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지점의 초입에 다다른 사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최초의 여성 지휘자이며, 8개의 말러 교향곡 실황 녹음에 마지막 5번 교향곡 실황녹음을 앞두고 있는 ‘리디아 타르’. 물론 가상인물이다. 베를린 필은 한번도 여성 지휘자를 선임한 적이 없다.
영화는 초반부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타르’가 쌓아 올린 음악에 대한 업적과 생각, 일관된(절대 다양하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견해를 듣는다. 이 모든 것들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고난과 극복의 과정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될 앞으로의 계획과 견해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구구절절하지 않고, 단순하며 예리하게 반짝이는 어떤 존재의 강연을 듣는 느낌이다.
대개의 경우 성공담이라고 하면 응당 뒤따르는 고난과 극복,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의 단어들이 보이지 않는다.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에 놓여 있는 길,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길이 아닌 밝고,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이는 길이지만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던 길의 마지막 지점에 가장 근접해 있는 마에스트로의 모습이다. 확고하고 의지에 차 있으며 의심의 여지없이 이미 성취된 것과 같은 미래를 이야기한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렇듯 완고하고 완벽한(?) 정체가 도달한 예술(음악)의 빈틈없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토크쇼가 진행되면서 “요즘 시대에 다양하다는 건 좋은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지금은 ‘전문가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인종과 성별, 모든 것을 망라한 최고점의 존재로서의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는 의미로 읽힌다. 여성성을 대변하는 ‘마에스트라’라는 단어의 필요성 보다는 남성성을 대변하는 단어로 인식되는 ‘마에스트로’로 불리우길 원한다. 그래서 타르의 관점은 일관되었으면서 절대 다양하지 않다고 하겠다. 이제 정점의 초입에서 빛나던 존재의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하지만 직접적이지 않고, 격정적이지 않다.
우회적으로 미세하게 흔들리며 균열을 일으키는 내리막길을 보게 된다. 타르가 했던 말들과 행동, 생각들이 스스로를 향하면서부터 붕괴된다. 그 와중에도 기존의 권위와 명성을 높여가며 범접할 수 없는 지점으로 향해간다.
영화 ‘TAR(타르)’는 외연적으로는 차갑지만 그 내부는 뜨겁게 끓어 오른다. 성공의 여정이 아닌 무너지는 지점으로 향하는 과정이 차분하고 냉정하게, 우아하면서 아름다운 악보를 흝는 것과 같은 속도로 진행된다. ‘타르’는 “음악은 시간”이라고 말한다. 시간은 속도다. 정해진 음표 속에서 속도를 조절해가면서 지휘자의 해석으로 연주된다. 그 속도 속에서 강약이 더해진다.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며 높고낮음을 조절하면서 음악은 진행된다. 타르의 음악에 대한 관점과도 같이 진행되며 사건은 차갑고 우아하며 단조롭게 시작되어 한순간에 그녀의 모든 것들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견고했던 것을 무너뜨리는 쾌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을 극적이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자극적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만 쉽게 그것을 예측할 수 없는 지점에서, 내부적으로 흔들리고 외부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며 임계점으로 향한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는다.
추락한 그녀는 고향 집으로 돌아와 오래 전에 보았던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레너드 번스타인의 “모든건 음악은 움직임에 있으며, 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흐르며, 그 움직임은 백만 단어보다 더 많은 걸 말한다”라는 회고담을 들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실존했던 레너드 번스타인은 가상인물 ‘타르’와는 다른 결의 마에스트로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실제 존재했던 20세기 위대한 지휘자처럼 베를린 필하모닉의 ‘황제’ 카랴얀처럼 시작한 타르는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자들의 친구’ 번스타인의 길을 보게된다. 바닥에서 다시 일어날 것인가는 마지막 장면의 해석으로 남는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