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크레파스 색깔 가운데 ‘살색’이 있었다. 사람의 피부색과 가까운 색이라고 여겼고 그렇게 사용했다.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살색’이라는 표현이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차별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뒤 ‘살색’ 표현은 사라졌다. ‘살구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세계화와 다문화가정이 늘면서 살색은 자칫 인종 차별로 이어질 수 있었다. 살색 이름 폐기는 피부색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다름과 차별을 인식하고 받아들인 첫 사례가 아닌가 싶다.
대구 퀴어문화축제가 ‘불법 도로 점용’과 ‘정당한 집회의 자유’ 보장이라는 이해가 맞부딪혀 법적 다툼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성소수자 차별 논란은 뒷전이 됐다. 대구 이슬람 사원 건립을 둘러싼 무슬림 유학생과 지역 주민의 갈등이 종교 분쟁 양상을 띠며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보수 도시 대구가 성소수자 차별과 종교 혐오의 중심에 섰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퀴어축제와 도로 점용은 성다수자의 권익 보호에 배치된다며 반대했다. 이슬람 사원 건립에 대해선 “건립 반대는 종교의 자유 침해일 뿐 아니라 기독교 정신에도 반한다”며 포용을 주문했다. 차별과 혐오에 대해 이중적인 잣대라는 비판이 일었다.
성소수자를 보는 시각은 아직 싸늘하다. 기성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위험시한다. 이해와 현실은 달랐다. 이슬람 종교에 대해서도 여전히 배타적이다. 하지만 이슬람 사원의 주택가 건립 문제는 이슬람만 특별히 차별한 것이 아니다. 주택가 종교시설은 애시당초 기피시설이었다. 주민들은 집값 하락 등을 우려, 종교시설을 오래전부터 반대했다.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시설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퀴어문화와 이슬람에 대한 편견은 기존의 가치관을 교란하고 낯익은 질서를 파괴한다는 이유에서 보이는 거부반응이다.
표현과 종교의 자유가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할지라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지만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는 것도 자유다. 내 자유가 중요한만큼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혐오와 차별이 넘쳐난다. 군 입대를 거부하는 종교단체, 차별을 거부한 장애인 차별연대, 세월호 희생자 혐오와 이태원 참사 피해자 혐오, 여성 혐오 등 차별과 혐오가 사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불신과 알력을 자양분삼아 어느 순간 튀어나오는 괴물이 됐다. 미국 등지에선 혐오가 증오로 이어져 유색인종 테러 등 범죄로 표출되기도 한다. 유명인사도 혐오와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 EPL에서 활약 중인 손흥민은 ‘째진 눈’ 조롱을 받았다.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은 성과 인종차별의 상징이었다. 혐오와 차별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고 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태도, 가치관 등이 다름을 인정할 때 만이 우리 사회의 갈등이 사라지고 성숙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