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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쐬다

등록일 2023-07-06 19:50 게재일 2023-07-0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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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여름 들판을 바람이 달려간다. 초록 물결을 일으키는 저 투명 강아지들. 칠월의 열기를 휘젓고 벼들을 춤추게 하는 바람의 유희로 들판 가득 생기가 넘친다. 이 들판에 부는 바람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방향과 계절에 따라 샛바람, 하늬바람, 마파람, 된바람 등이 있고, 세기와 온도와 느낌에 따라 미풍, 강풍, 태풍, 돌풍이 있는가 하면 실바람, 남실바람, 산들바람, 건들바람, 소소리바람, 삭풍 등도 있다. 그 하나하나의 바람에도 또 무수한 스펙트럼이 있는 것이니 우리의 감관에 와 닿는 바람의 느낌을 이루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자연의 바람 말고도 우리 삶에는 여러 가지 바람이 있다. 멀리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풍류(風流)가 있고, 현대사회를 풍미하는 여러 종류의 바람도 있다. 춤바람, 치맛바람이 물의를 일으키던 때도 있었고 황금만능, 출세지향, 한탕주의 바람은 지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도 풍류는 민족 고유의 정서와 지혜를 내포한 ‘현묘지도(玄妙之道)’라는 근원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양반계급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음악을 뜻하는 의미로 축소되었다가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한 말이 되었다. 하지만 한류(韓流)라는 새로운 바람이 일어 세계를 휩쓸고 있으니 그 역시 풍류의 현대적 변용이라 할 것이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일찍이 서정주 시인이 노래했듯이 우리 삶에서 바람을 빼면 그야말로 바람 빠진 풍선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신바람이란 말이 그렇듯 바람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고 활력인 것이다.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는 폴 발레리의 유명한 시구도 그런 의미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바람과 삶의 바람은 둘이 아니다. 자연의 바람이 가이아(Gaia)의 숨결이자 생태계의 호흡이라면 인간사회의 바람 역시 그 일환일 터이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행위가 바람일진대 기왕이면 신선하고 훈훈한 바람이면 좋을 것이다.

들판을 가로지른 고가 철로 그늘에 웃통을 벗고 앉아 바람을 쐰다.‘바람을 쐰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불어오는 바람을 몸에 맞다’와 ‘기분 전환을 위하여 바깥이나 딴 곳을 거닐거나 다니다’가 그것이다. 나는 지금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셈이다. 땅 위에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바람이 불어 생태계의 모든 생물들이 수시로 바람을 쐰다. 그것은 곧 활력을 충전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바람과 친밀하게 살아온 것 같다. 사계절이 뚜렷한데다 삼면이 바다이고 지형도 다채로워서 바람의 스펙트럼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다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말에는 ‘바람’이나 ‘風’자가 들어간 말이 많고, 감성의 결과 폭도 그만큼 세세하고 풍성하다. 고인 물은 썩는 것처럼 공기도 환기가 안 되면 혼탁해진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서는 창을 열어야 하고, 바람을 쐬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음습하고 혼탁한 세상은 침체할 수밖에 없고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을 새바람에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 산과 들과 바다로 나가 바람을 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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