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권순남 ④<br/>자원봉사센터의 시련과 새로운 출발
“남을 가르치려면 내가 완벽해야 한다”는 게 권순남 선생의 소신이다. 미국 뉴욕에서 세계 자원봉사 지도자 워크숍이 열렸을 때 권 선생은 자비로 참여한다. 그 열정으로 숱한 시련을 극복하며 우리 사회에 자원봉사의 가치를 확산해 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최미경(최) : 1997년에 세계 자원봉사 지도자 워크숍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권순남(권) : 전 세계 자원봉사 리더들이 미국 뉴욕에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어. 정부의 담당 부서를 찾아가 “자원봉사센터만 만들어놓으면 뭐 하느냐. 운영체계와 시스템을 배워야 한다. 30명 이상 한국에서 출발해야 동시통역사를 붙여준다고 하니 전국에 있는 자원봉사센터 소장과 리더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 하지만 1997년은 IMF가 터진 해였어. 정부도 기업도 지원할 수 없으니 알아서 가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지. 누가 자기 돈으로 뉴욕까지 워크숍을 가겠는가. 하지만 나는 가야 했어. 적금 하나를 헐어 혼자 뉴욕행 비행기를 탔지.
1996년부터 3년간 포항시자원봉사센터는 크고작은 봉사단을 조직했고, 자원봉사의 가치와 인식 개선 교육을 진행했지….
1997년 세계 자원봉사 지도자 워크숍에 참가하려고 정부와 기업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IMF가 터진 해여서 불가능했지. 하지만 나는 적금을 헐어 혼자 미국 뉴욕으로 갔어. 영어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워크숍에 참여해 “도와달라” 말했지. 그 후 뉴욕에서 자료도 받게 되고, 대학생과 청소년 자원봉사에 더욱 매진했지….
최 : 아무런 후원도 없이 혼자 뉴욕에 간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권 : 무서울 게 없었지. 사명감이 있었으니까. 뉴욕 힐튼호텔에서 워크숍이 진행된다는 정보만 가지고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어. 택시를 타려니 표를 하나 주며 기다리라고 하더군.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답답했어. 한 시간쯤 있으니까 흑인 기사가 왔어. 우여곡절 끝에 밤 11시쯤 호텔에 도착했지. 그런데 프런트에 예약자명을 대니 내 이름으로 예약된 건 없다고 해. 아시아 지역 이사로 워크숍에 참석 중이던 이강현 박사가 내가 묵을 룸을 예약하기로 했거든. 그는 워크숍에 참석하고 있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지. 로비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강현’으로 예약자를 찾으니 룸이 있었어. 이강현 박사가 한국 대표 참가자들의 방을 자신의 이름으로 예약해놓은 걸 뒤늦게 알았지. 자정이 지나서야 체크인을 하고 침대에 누웠어.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긴장한 탓에 잠이 오지 않더군. 새벽 5시부터 호텔 조식이 나온다는 말에 다음 날 일찍 방을 나섰지. 그런데 세계에서 수천 명이 워크숍에 왔는데 음식이 남아나겠어? 토스트와 과일 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지고 우유와 오렌지주스밖에 남아 있지 않았어. 별수 없이 우유 한 잔 마시고 오전 9시부터 워크숍을 강행했지.
그날 워크숍은 조를 나눠 진행되었다. 청소년, 노인, 일반, 장애인 등 다양한 대상과 주제로 세분화되었고, 권순남 선생은 7명과 한 조가 되어 청소년 자원봉사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다.
권 :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득한데 말이 되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지. 돈을 들여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못 얻고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어. 조의 리더부터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머리에서 가슴까지 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어.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지.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에 더듬더듬 말했어. “나는 한국에서 왔다. 여기 공부하러 왔다. 영어는 읽는 것은 되지만 말은 안 된다.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달라.”
최 : 참여자들 반응은 어떻던가요?
권 :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봉사자 경력자였어.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다 같이 박수 치며 “우리가 권순남을 도와주자”고 하더군. 각자 청소년 자원봉사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에 대한 의견을 냈고, 리더는 사람들의 의견을 정리했어. 나는 다른 사람 말은 하나도 안 들리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지. 그때 리더가 큰 종이를 토론 참여자들에게 나누어주었어. 나는 “한국 청소년들은 입시 중심으로 자원봉사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여러분들이 고민해달라”고 적었어.
권순남 선생은 워크숍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명함을 전달했다. 한국에는 자원봉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자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정성이 통했는지 워크숍이 끝나고 두 달 후 뉴욕에서 워크숍 결과지와 청소년 자원봉사 키트 자료가 왔다. 이후 권 선생은 대학생과 청소년 자원봉사에 더욱 매진했다. 또한 한동대 도형기 교수를 센터 운영위원으로 위촉하고, 사회복지과·심리학과 교수들이 자원봉사 리더 교육에 참여해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준비는 대학교 내 자원봉사 시스템을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최 : 한국의 학부모와 교사들은 학생들의 공부에만 집중하잖아요. 이런 환경에서 봉사활동을 이끌어낸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권 : 그랬지. 5년 정도 중·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청소년 봉사에 대해 설명했지만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어. 고민하던 차에 포항고등학교 청소년연맹에 소속되어 있던 최현우 선생님을 자원봉사센터 청소년단장으로 모셨지.
최 : 흔쾌히 승낙하셨나요?
권 : 최현우 선생님이 퇴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항고등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센터로 모시고 와서 도와달라고 했어. 학교에는 자원봉사 전담 교사가 없으니 각 학교별 청소년연맹 선생님을 자원봉사 지도자로 섭외해달라고 부탁했지. 어렸을 때부터 봉사활동을 해야 봉사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깨우칠 수 있다는 내 생각에 최현우 선생님도 동의하셨어. 최 선생님은 청소년연맹에 있던 선생님 10명을 불러 자원봉사 지도자 교육을 했지.
1998년 권순남 선생은 최현우 청소년단장과 청소년자원봉사단을 꾸려 발대식을 가졌다. 봉사단의 소속감을 높이기 위해 조끼와 배지를 제작하고 청소년 자원봉사활동 사례 발표회와 청소년봉사단 예술대축제를 진행했다. 포항의 청소년 자원봉사 사례는 전국 최초였으며, 타 시·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최 : 청소년과 대학생 자원봉사단뿐 아니라 다양한 봉사단을 구성하셨지요?
권 : 청소년 봉사자들에게는 즐거움이 필요했어. 그래서 문화예술경연대회(예술대축제)를 준비했는데 장소가 필요했지. 롯데백화점 포항점에 가서 행사 취지를 설명하자 옥상을 빌려주었어. 음향 시설이 되어 있는 곳이라 금상첨화였지. 백화점 상품권도 후원받았어. 감사한 마음에 자원봉사 모범 기업으로 올리자 롯데백화점 점주들이 스스로 봉사팀을 만들었어.
최 : 포스코 사회봉사단도 창단되었죠?
권 : 포스코를 찾아가서 자원봉사에 대해 이야기하니 이미 부서별로 동네와 MOU를 맺어 농기구를 수리해주는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기업 바깥으로 나가서 하는 것만 봉사가 아니라 직원 간의 소통 그리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봉사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설득했지. 그렇게 포스코 자원봉사자 교육이 시작되었어. 이강현 박사, 이윤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 거물급 강사를 모시고 포스코 과장급, 팀장급을 모아 자원봉사의 가치와 인식 개선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지.
최 : 자원봉사센터를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권 : 1996년 재단법인 한울타리에서 포항시로부터 운영을 위탁받아 12월 16일 자원봉사센터를 개소하고 소장으로 업무를 시작했는데, 개소 후 3년간 정말 힘들었어. 중앙정부의 시책으로 개소했지만 자원봉사센터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이해도가 낮았고 예산 지원도 적어 센터 직원의 급여와 사업비가 늘 부족했지. 게다가 자원봉사센터에 대한 홍보가 되지 않아 오해하는 공무원이나 정치인도 있었고.
최 : 어떤 오해인가요?
권 : “자원봉사를 하는 데 왜 돈이 필요하냐”, “그렇게 조직을 키워서 정치에 입문하려고 하냐?” 등등의 오해와 억측이었어. 지역 언론도 터무니없는 기사로 센터를 매도하고 참 힘든 일이 많았지. 결국 1999년 3월에 나와 직원 모두 사표를 제출하고, 법인도 포항시에 반납했어.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포항시자원봉사센터는 청소년자원봉사단, 주부자원봉사단, 도서관자원봉사단 등 크고 작은 봉사단을 조직했고 일반 교육사업부터 관리자교육, CEO 교육 등 자원봉사에 관련된 다양한 교육을 주관했다. 또한 자원봉사 박람회, 이동자원봉사센터, 자원봉사인형극, 행복마을만들기, 자원봉사물결운동 등 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행했다. 권순남 선생의 이러한 노력은 포항시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위탁법인을 찾는 과정을 거쳐 볼런티어21(현 한국자원봉사문화) 포항지부와 1999년 4월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권 선생은 지부장이자 소장으로 본부의 운영 매뉴얼과 교육콘텐츠를 지원받아 좀 더 전문적으로 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권 : 일보다 사람들에게 자원봉사센터를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웠어. 시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예산 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하면 부정적으로 인식할 때가 더 많았지.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행정기관이나 시의회에 우리가 부탁하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없겠다 싶더군. 그래서 자원봉사자들이 ‘무형의 거대 자본’이라는 사실과 자원봉사센터는 ‘인적자본’을 축적하고 가동하는 시스템임을 증명하려고 더 많이 고민하고 투자를 진행했지. 센터를 투명하게 운영하는 것은 기본이고, 밤 12시에도 모여 프로그램을 고민했어. 자원봉사자를 요청하는 기관에 봉사자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자원봉사에 관한 정보와 자원을 제공하니 점차 시민사회로부터 인정받게 되었지. 정말 감사한 것은 우리 센터 직원들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불만 없이 최선을 다해준 거야.
권순남
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
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