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향(羅稻香)’이라고 하면,‘뽕’이나 ‘벙어리삼룡이’처럼 향토적인 색채 짙은 작품을 몇 편 썼던 작가로만 기억하시는 분이 많으실지 모르지만, 사실 그는 신문에 본격적인 연애소설을 최초로 연재했던 사랑의 작가였다. 나경손(羅慶孫)이라는 본명을 두고, 소설을 쓸 때는 주로 벼의 향기라는 의미의 ‘도향(稻香)’이라는 필명을, 번역이나 평론을 쓸 때는 주로 ‘나빈(羅彬)’이라는 필명을 썼다.
생원집에 하인으로 있던 벙어리 ‘삼룡이’가 주인집에 시집온 아씨가 부당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참다못해 복수하는 이야기나, 누에 먹일 뽕나무잎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아귀들의 수라도만큼 강렬한 것은 아니었지만, 1922년에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환희’는 당시 일제에 강점된 한국에서도 연애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는 신호 같은 것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연애는 인간들 사이의 마음의 문제지만, 그 실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연애편지를 쓰고, 데이트를 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들은 단지 서로 좋아하는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이고, 라이프스타일이다. 집안끼리 날짜와 사주를 맞추는 옛날의 제도에서 벗어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 이제 본격적으로 새로운 연애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1930년대 신문 삽화계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가 처음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해서, 여러 모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본래 그림을 그렸던 안석주는 매일 그려야 하는 삽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처음에는 너무 완벽한 유화 스타일의 삽화를 그리려고 하다 나중엔 힘이 부쳤는지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 소설 ‘환희’는 가난한 고학생인 김선용에게 그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은행원 이영철이 자신의 동생 이혜숙을 소개해주려고 하며 시작된다. 어린 이혜숙은 가난하고 잘 생기지 못한 김선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오히려 영철이 일하는 은행의 은행장 아들 백우영에게 끌린다. 하지만, 모처럼 오빠의 소개인 만큼 김선용과 덜컥 다음에 만날 것을 약속해 버리지만, 난봉꾼 백우영에게 속아 덜컥 그에게 겁탈을 당하고 그만 그와 결혼하게 되고 만다. 김선용과 백우영 사이에 있던 이혜숙, 백우영과 이영철 사이에 있던 기생 설화를 둘러싸고 결국 누군가 죽고, 누군가 영영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야만 끝날 청춘의 복잡한 삼각관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나도향의 ‘환희’는 연애로맨스소설의 클리셰인 연애삼각관계의 정석을 보여준 창작 소설의 첫 번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 나도향은 전차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주인공 마음의 미세한 결을 세밀하게 읽어낸다. 이미 사랑에 빠진 김선용은 이혜숙에게 가볼까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까 망설이면서 그 기로에서 기다린다. 내심으로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가 있지만, 일말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그로 하여금 반대편의 플랫폼에 서 있도록 하는 것이다.
뻔하디 뻔하고, 판에 박힌 이야기지만, 연애로맨스 이야기가 그렇게 매번 반복되어 나오는 것은 그것이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세대에 따라, 나이에 따라, 그 뻔한 플롯의 이야기는 생생하고 가슴 아려오는 이야기가 된다. 백 년 전 전찻길에서 사랑하는 이를 먼 발치에서라도 보려고 반대편 전차를 힐끔거리는 못난 주인공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일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