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으로 느껴지는 선선한 공기와 또렷해지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한낮으로는 아직 노염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도, 여름을 마감한다는 처서(處暑)가 오늘이고 보면 늦더위도 이제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난히 심한 무더위와 폭우, 태풍의 상흔이 안타까운 생채기로만 남긴 채 계절은 가을채비를 하고 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심각해지는 기상이변의 넌더리가 우려스럽기만 하다.
더위가 숙지는 여름의 끝자락에 서울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는 늦더위보다 후끈한 열기로 서예와 문인화의 향연이 펼쳐져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전국의 유망 서예작가 12명이 ‘월간 서예문화’의 초대를 받아 오늘날의 시대성을 살리면서 작가의 개성을 담아낸 다채로운 작품을 부스개인전 형태로 선보인 것이다. 즉, 부분적으로는 할당된 공간에서 독창성을 살린 작품을 전시하는 소규모의 개인전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필묵의 세계화展’의 취지로 한국서예의 단면을 보여주고 다양성의 조화 속에 서예와 문인화의 새로운 지향점을 모색하는 그룹전으로 열린 것이다.
문화와 예술, 트렌드의 원천(源泉)인 서울에서 전국의 유수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전시회를 연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더 깊이 들어갈수록 나아감이 더욱 어렵고 그 보이는 것도 기이한 서예의 세계에 흠뻑 빠져, 오랜 세월 외곬스럽게 일궈온 한묵(翰墨)의 정념을 거침없이 넓고 깊게 펼쳐 보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상징적인 공간에서 작가 특유의 통찰과 소신의 다변화된 붓질로 전통서예의 재해석과 미래지향적인 요소를 탐색하는데 일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가 녹아들고 특장의 서예작품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필묵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인사동(仁寺洞)은 전통문화의 거리답게 도심 속에서 낡지만 귀중한 전통과 유서 깊은 문화가 서린 소중한 공간이었다. 길거리마다 대부분 외국인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갤러리나 전통음식점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왕래부절이었다. 큰길 옆으로 사이사이 이어지는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힌 곳에는 화랑이나 필방, 전통공예점, 고미술점, 전통찻집, 카페 등이 밀집돼 있어서 독특한 멋이 있고 교류와 소통, 체험과 만남의 장소로 이상적이었다.
그렇게 근사한 곳에서 작품전을 열고 새로운 분위기에 젖어드는 기회를 갖는 것은 정말 선물 같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관람객이 작품전의 느낌을 방명록에 일필휘지하고, 화려한 차림의 어느 외국인이 서예작품에 매료된 듯 유튜브 영상을 촬영하며 이색적으로 환호하는가 하면, 각별한 마음으로 전시장을 몇 번씩 다시 찾거나 특히, 풀잎 하나로 즉석에서 축하연주를 해주신 ‘풀피리 부는 도깨비, 풀깨비’ 선생 등의 분들이 새삼 고맙고 정겹게 느껴진다. 인사동을 묵향으로 뜨겁게 달군 ‘2023 KOCAF’는 의미있는 진전과 좋은 추억으로 처서와 함께 마무리되어 다행스럽고 감사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