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30도가 넘는 폭염에 몸과 마음이 지쳐갈 무렵 동문산악회가 “경북수목원 둘레길 한 바퀴 돌고 오자”며 산행 계획을 알려왔다. 창문을 열면 뜨거운 열기가 들어와 에어컨으로도 견디기 답답하던 터라 간단히 배낭을 메고 반바지 차림으로 따라나섰다.
청하를 지나 유계리로 접어들어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는데 산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잘 보이지를 않아 전조등을 켜고 조심스레 달려 경북수목원에 도착했더니 등산객이 많다. 등산화 끈을 조여 매고 조용한 수목원 길을 걸어 능선에 섰다. 간단히 몸 풀고 가슴 가득 숨 쉬어 숲의 정기를 채웠다.
안내판을 보며 산행 경로를 짰다. 매봉(833m) 아랫길, 임도(林道)가 아닌 오붓한 산길로 삼거리까지 갔다가 삿갓봉길로 올라오며 한 바퀴 돌아오기로 했다. 다섯 시간쯤 걸어야 한다. 옆길로 내려가니 흐릿하던 숲이 뚫리며 물기 젖은 풀잎들이 다리에 스치고 한 구비 돌 즈음에 벌써 어깨 등어리는 땀범벅이 된다. 여름이라 꽃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예쁜 버섯들이 비에 젖은 갈색 낙엽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가까이 사진을 찍다 보니 길섶에 붉은 보라색 작은 꽃이 애잔스럽다. 꽃며느리밥풀, 꽃말은 ‘여인의 한’이다.
이따금 만나는 통나무 계단 길은 흙이 모두 쓸려나가 앙상해져 걷기가 힘이 든다. 밑둥치가 썩어버린 고목을 어루만지며 내려가다 만난 무덤은 봉우리 흙이 무너져 내려 묘의 상석이 덥혀 잡초만 무성하고, 오르막길에서 만난 돌무지에 돌 한 개 쌓고 산신령에게 가족의 평안을 빌어 보았다.
단풍나무 상수리나무가 둘러싼 쉼터에 앉아 막걸리 한 잔 벌컥 마시니 마른 목과 속이 뻥 뚫린 기분에 순간 안개도 싹 걷힌다. 한여름 산행의 땀은 이제 감각도 없다. 1시간쯤 내려오니 졸졸 물소리가 들리고 둥근 나무다리 아래에 흐르는 개울이 보인다. 삼거리다. 개울 건너 물가 자갈밭에 배낭을 벗어두고 발 담그니 신선이 따로 없다. 발등이 간질거려 물속을 보니 버들치들이 모여들어 발가락을 콕콕 문다. 닥터 피쉬의 모습이다. 물은 무릎까지 차고, 어릴 적 발가벗고 풍덩 뛰어 들어가 물장구치던 기억, 그 ‘알탕’을 하고 싶었으나 웃통만 벗고 땀을 씻었다.
둘러앉아 김밥 맛있게 먹고 한잔하고 푹 쉬었다가 일어나 삿갓봉 쪽 산길을 오른다. 오르막길 몇 걸음에 또 땀이 흥건하다. 옛 화전민들이 참나무 숯을 만들었던 숯가마 터를 지나 오르노라면 갖가지 나무에 이름표가 붙어있다. 참나무 여섯 종의 이름도 처음 알았다.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와는 잎의 매끈함이, 졸참나무와 갈참나무는 잎 가장자리가, 또 떡갈나무와 신갈나무는 잎 뒷면의 갈색 털로 구분한단다.
멧돼지, 고라니, 뱀을 조심하라는 경고문을 곁 눈짓하며 한참을 걸어 드디어 외솔배기에 왔다. 옛날 가래골 사람들이 청하장에 다니던 길목의 정자나무 쉼터에 250년 된 소나무가 아직도 잘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좋다.
마지막 영춘정 전망대 입구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곧 가을이 오면 붉게 물들 단풍 숲을 그려 본다. 숲과 둘레길, 계곡물과 바위, 꽃과 버섯을 눈에 담으며 걸어본 약12km 1만8천 보…. 훌륭한 8월의 힐링 산행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