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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의 미학

등록일 2023-10-30 18:12 게재일 2023-10-3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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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1903~?)은 일본 호세이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해서 이하윤, 정인섭 등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해서 비평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30년 무렵부터 독서와 번역에 대한 글을 다수 썼고, 수필을 최초로 본격적인 문학 작품으로 썼던 인물이다. 해방 이후에는 ‘생활인의 철학’ 등의 산문집을 남겨 수필가로서의 이름을 갖고 있다.

산보, 혹은 산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 중에서 가장 간단하고도 그 의미가 깊은 활동이다. 어딘가에서 어딘가까지 때로는 목적을 가지고, 때로는 목적을 갖지 않고 걸어가면서 무언가를 보는 산보는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닌가.

모니터에 머리를 박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잠시 미뤄두고 10분 정도라도 바깥의 주변을 산보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풀리는 경우도 있다. 어딘가를 걷는 것은 나의 삶에 붙은 자연스러운 맥락을 잠시 바꾸는 행위이다.

1930년대 독일 문학을 전공하고, 해외문학파의 이름으로 번역과 비평 활동을 했던 김진섭은 1934년에 ‘산보와 산보술’이라는 글을 쓴다. 산보라는 행위가 단순하고 간단하다보니 산보에 대해서 쓰인 글이 많지 않은데, 모처럼 이 글이 있어 읽고 음미해볼 만하다.

김진섭은 생활인들이 갖게 마련인 직업의 중압과 가정의 번잡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고, 그럴 때 자연으로 가서 웅장한 삼림을 찾기 마련이라고 쓴다. 하지만, 도시에서의 일상생활에서 여행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일까. 그럴 때, 조그만 여행의 형식이 바로 산보라는 것이다. 즉 “거니는 것이 휴식이 되는 상태”가 바로 산보다.

물론, 산보는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형태도 다양할 것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산보도 있고, 친구와 함께 무언가를 이야기하면서 하는 산보도 있다. 술집에서 술을 나누면서 하는 내밀한 고민에 대한 이야기와 달리, 거리의 소음을 배경 삼아 나누는 고민 이야기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랑하는 사이에 함께 하는 산보는 특별한 어떤 것을 하지 않더라도 함께 손을 잡고 어깨를 겯기만 해도 그 자체가 사랑이 아닌가.

비록 김진섭은 그 모든 산보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혼자서 하는 산보라고 말해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사유와 문학을 다루는 학자였기 때문이다. 철학자였던 칸트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산책했다는 일화가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생각하고 쓰는 긴 과정 중에 잠시 흐름을 끊고 산보하는 것은 사유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소설가 박태원이 썼던 많은 소설들 속에서 구보씨는 낮이나 밤이나 산보한다. 그의 산보는 바로 글쓰기 자체가 된다.

하지만, 산보는 모든 사람의 것이다. 어떤 형식이든 어떤 사람들과 하든 좋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카페 순례도, 혼자 혹은 동료와 사무실 근처를 한 바퀴 도는 산책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인근에 있는 녹색의 자연을 찾아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그 아래를 걷는 일도 모두 산보이다. 산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평등한 행위가 아닐까.

그렇게 길을 걷다보면, 우리 앞에 펼쳐진 복잡하고 다양한 세상의 모습들은 매순간 발견이 된다. 특별한 목적이 없더라도, 아니, 오히려 특별한 목적이 없으니까, 산보하는 발걸음 속에 눈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들은 모처럼의 발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 속 지도를 보고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우연한 만남들이 산보하는 마음 속에는 찾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산보란 독서에 가장 가까운 행위일지도 모른다.

문자와 그림들이 빼곡히 들어 있는 하나의 세계인 책의 세계 속을 헤매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행위가 독서라면, 거리를 거닐면서 세상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정보와 자극들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찾아내 의미로 만드는 행위가 바로 산보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 오늘 오후만큼은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 세상이라는 책 속을 산보해 보면 어떨까.

/홍익대 교수 송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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