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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京都)의 두 얼굴

등록일 2024-01-22 18:46 게재일 2024-01-2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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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금각사.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에서는 1963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년 대하역사드라마를 제작하여 방송하고 있는데요. 일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유명한 인물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는 합니다.

2023년에는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2022년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주역이었던 13인의 사무라이, 2021년에는 올해부터 일본 1만 엔 지폐의 주인공이 될 시부사와 에이이치, 2020년에는 전설적인 하극상의 주인공 아케치 미츠히데가 드라마의 주역이었습니다.


올해는 시대를 훌쩍 건너 뛰어 헤이안 시대(794~1185)에 활동했던 여성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光る君へ’-빛나는 그대에게 혹은, 히카루(노)기미(히카루 겐지)에게라는 중의적 의미를 가짐-를 방영하고 있습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일본 고전문학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源氏物語(겐지모노가타리)’를 쓴 여성 작가로서, 이 작품은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를 통해 사랑과 권력, 욕망과 허무 등을 200자 원고지 5000매가 넘는 분량으로 담아낸 고전입니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헤이안 시대는 귀족문화가 꽃을 피웠던 시기이며, 헤이안(平安)이라는 이름처럼 일본 역사에서 드물게 평화롭고도 안정되었던 시기로 알려져 있지요.


많은 역사학자들은 헤이안 시대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초가 형성되었으며, 나아가 일본인의 무의식이 형성되었다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평화롭고 귀족적인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이 바로 ‘겐지모노가타리’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겐지모노가타리’는 헤이안궁을 주무대로 한 그 시대 최고 권력자들의 이야기인 만큼 작품에 등장하는 교토의 모습은 세련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교토는 간무 천황이 천도를 한 794년부터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간 1869년까지 무려 1천1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일본의 수도였습니다. 헤이안 시대 교토의 이름은 헤이안쿄(平安京)였는데요. 널리 알려져 있듯이, 헤이안쿄는 당시 세계적 대도시였던 당나라의 장안(長安)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계획도시입니다. 북쪽 중앙에는 헤이안궁이 자리 잡았고, 헤이안궁으로부터는 폭 85m에 길이 3.8㎞의 주작대로가 도시의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었지요.


오늘날 과거의 헤이안쿄 지역이었던 곳에는 헤이안 시대의 건물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바둑판 모양의 거리만은 그 시절 그대로입니다. 라쇼몽(羅生門)은 주작대로의 남쪽 끝에 위치하여 헤이안쿄의 정문 구실을 했던 곳인데요.


흥미롭게도 무라사키 시키부에 버금갈 만한 근대의 천재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1892~1927)는 ‘라쇼몽’(1915)에서 귀족문화가 꽃 핀 통념화된 헤이안쿄와는 거리가 먼 교토의 모습을 소설로 남겼습니다.


이 작품에서 라쇼몽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서 너구리나 여우, 혹은 거두는 사람이 없는 시신이나 머무는 곳입니다. 이 라쇼몽에 주인으로부터 그만두라는 말을 들어 ‘아사(餓死)할 것이냐’, ‘도둑이 될 것이냐’의 두 가지 선택지만을 남겨 놓은 한 사내가 하룻밤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사내는 시체의 머리칼을 뽑고 있는 노파를 발견하고는, 정의감에 불타올라 그 노파를 붙잡습니다. 그런데 그 노파로부터 자신이 뽑고 있는 머리칼의 주인인 여자는 살아 생전에 뱀을 생선이라 속여 팔던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노파는 가발을 만들기 위해 시체에서 머리칼을 뽑는 자신이나 뱀을 생선이라 속여 판 여인이나, 모두 살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하소연하는군요. 이 말을 듣고 사내는 더 이상 “굶어 죽을 것인지 도둑이 될 것인지 망설이지 않”습니다. 방금 전의 정의감에 불타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노파의 옷을 벗겨 들고서는 라쇼몽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내는 굶어죽는 대신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가기로 한 것이겠지요.


‘라쇼몽’은 ‘겐지모노가타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짧은 소설이지만, 이상과 현실, 윤리와 욕망이라는 인간의 영원한 갈등을 인상적으로 담아낸 또 하나의 명작입니다. 두 작품이 보여주는 헤이안 시대 교토의 모습은 매우 대비적인데요.


이러한 차이는 ‘겐지모노가타리’가 전성기의 헤이안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반해, ‘라쇼몽’이 몰락해 가는 헤이안 시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경재 숭실대 교수

한때 헤이안쿄의 현관 역할을 하던 라쇼몽이 폭풍우로 붕괴된 이후, 현재에는 그 터에 과거의 흔적을 알리는 비석 하나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에 비해 헤이안궁은 사라졌지만, 교토 천도 1천100주년을 기념하며 1895년에 만들어진 헤이안 신궁이 과거 헤이안궁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헤이안 신궁은 헤이안궁을 8분의5 크기로 줄여 복원한 매우 화려한 건축물로 유명하죠. 드라마 ‘光る君へ’의 많은 부분도 바로 이 헤이안 신궁에서 촬영되고 있다고 하는군요. ‘겐지모노가타리’와 ‘라쇼몽’에 그려진 헤이안쿄의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은 오늘의 교토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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