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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고향집 마당에서

등록일 2024-05-07 18:19 게재일 2024-05-0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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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신록의 초목 위에 비가 내리니 푸르름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봄비 치고는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시면서 생동의 기운이 한껏 왕성해지는 듯하다. 파릇한 잎사귀에 은구슬 같은 빗방울이 자분자분 내려앉으며 은밀한 밀어를 속삭이는 듯한데, 연두와 초록의 물결 위에 빗금 치며 내리는 비는 싱그럽고 산뜻한 오월의 수채화를 그리는 듯 온종일 쉼없이 녹파(綠波)를 더하고 있다.

모처럼 고향에서 비를 맞으니 차분한 감회가 산허리에 걸린 실안개마냥 몽실몽실 피어난다. 아카시아 흰꽃을 적신 비에서는 상큼한 향기가 전해지는 것 같고, 연록의 숲에서 내리는 빗줄기에서는 초록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이십 수년째 빈집으로 남아있는 폐허 같은 고향집의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넓직한 풀잎에 닿으면서 내는 소리가 맑고 정겹지만 더없이 애잔하게 들린다. 불현듯 빗소리가 들려주는 맴돌이 소리에 유년의 울림 같은 회억이 아스라해진 가슴을 적셔주는 듯하다.

상수도시설이 미비했던 시절, 오늘같이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으레 처마끝의 물받이에서 떨어지는 지점에 양동이나 큰 단지를 옮겨와 빗물을 받곤 했는데, 초반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가관이었다. 양동이나 알루미늄 세숫대야 떨어지는 낙수소리는 ‘타다다닥~’ 하며 자지러질 듯 요란하게 들리다가 이내 줄어들고, 단지나 옹기 같은 곳에 떨어지는 낙숫물은 마치 마이크 소리를 내는 듯 깊고 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었다. 그렇게 몇 개의 용기에 빗물을 받으면서 내는 소리는 음계도 없고 음정도 제각각이었지만, 산만한 듯 정겹고 또렷하게 들리는 빗물의 이색적인(?) 연주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어떤 때는 또래들과 어울려 빗 속을 헤치며 호박순을 잘라서 만든 대롱을 몇 개 이어 빗물의 흐름을 유도하면서 낙수소리를 듣는 재미에(?) 빠지곤 했었다. 그러다 보면 옷이며 양말까지 담방 비에 젖게 되는 일명 ‘노배기’가 돼서 집엘 오게 되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께선 부엌 아궁이 앞에서 불을 쬐게 하시며 벙드레죽(수제비)을 쑤어 주시거나 배추전을 부쳐 주시곤 했었다. 요즘도 비 오는 날의 날궂이 음식으로 파전이나 부추전 따위가 단연 구미를 당기게 하지만, 아주 오래 전에 들었었던 낙숫물의 리듬에 맞춰 전 부치는 소리가 그렇게 맛있게 피어나던 기억이 갈수록 생생해지며 차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빗물을 받아 머리를 감으면 머릿결이 좋아진다고 하시면서 비 내리는 날에 수제비나 부침개를 해주시던 어머니께선 초록이 우거진 북망산천에서 땅으로 스미는 빗물을 맞고 계시니 애절하기만 하다. 아카시아나무가 고향집 마당까지 침범하고 담쟁이 넝쿨이 옛집을 에워싸며 스산함과 황폐화를 더해도, 문득 기억 속에 낯익은 낙숫물소리와 정재(부엌) 칸에서 들리던 전 부치는 소리가 엷은 감미로움으로 다가오니 어찌할까나?

엷은 안개 속에 하염없이 내리는 초록비가 음률인 듯 리듬인 듯 귓전을 스치는 고향집 마당 한 켠에는 그나마 활짝 핀 불두화가 위무인 듯 환하게 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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