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햇살과 바람이 참 좋다. 따사로운 햇볕을 받아 만물이 점차 생장하고, 부드러운 바람 결에 연록의 잎새들이 나날이 짙어가며 녹음을 드리우고 있다. 만물이 생장의 기운으로 가득 찬다는 소만(小滿)이 지나자 본격적인 여름날이 시작된 듯 잎새들은 미풍에 가볍게 흔들리고, 들판의 작물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고른 햇살과 때 맞춰 내리는 비를 맞아 만물이 성장과 윤기를 더해가듯이, 보살핌과 가르침의 은혜로 사랑과 감사가 녹음처럼 두터워지는 푸른달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날이 시작되고 문득문득 시간의 타래는 슬렁슬렁 잘도 감겨지고 있다. 예전에 비해 확연히 짧아진 듯한 봄날의 기온도 여름날 못지않게 불쑥불쑥 오르고 있으니, 세월의 갈퀴 속에 모든 것이 조금씩 변하고 달라지면서 세상이 소리 없이 굴러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가거나 물이 흐른다는 것은 영속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시간의 더께가 쌓이게 되면 만물은 빛이 바래거나 퇴색의 갈피를 면할 수 없고, 물과 바람의 철썩임에 자연물도 마멸과 희석의 과정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기억이나 생각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시간의 흐름에 반비례하여 차츰 희미해지거나 잊혀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생각이나 경험에서 비롯되는 사상이나 감정, 지식 따위도 어느 경계를 지나게 되면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 버리기에 애써 기록으로 남기고 그림이나 형상 등으로 그려 놓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굴 속의 그림이나 기호, 바위벽에 새겨진 문자 등의 각인물도 좀 더 뭔가를 표현하고 소통하며 오래도록 남겨서 전하려는 바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무나 바위 등에 새겨진 글자나 시문 등도 우리의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이기에 서사적(書史的)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필적이나 서체연구의 매개가 되어 당대의 풍습이나 문화, 명필의 유행 서체 등을 유추, 분석해볼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물에 드러난 대부분의 각자(刻字)는 현재 환경적인 관점에서의 자연 훼손물(?)로 간주돼 일반인들의 관심이나 학계의 연구대상에서 멀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바위 글자엔 풍상과 세월의 이끼가 더해져 점차 등한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그럼에도 최근 포항지역의 한 서예단체에서는 서예문화유적 답사를 겸한 학술조사로, 포항시 북구 기북면의 유서 깊은 덕동문화마을의 명승 덕연구곡(德淵九曲)의 제2경인 ‘막애대(邈埃臺)’ 바위에 새겨진 글자의 탁본작업을 실시해 고무적으로 여겨진다. 막애대는 덕동마을 앞을 흐르는 용계천 한켠의 거북 형상을 한 ‘속세를 멀리한 너른 바위’라는 뜻으로, 막애대 위에 앉아서 흐르는 물을 보며 심신수양을 했던 곳이라 한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었던 막애대 바위가 이번의 탁본작업으로 재조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무심해졌던 것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으로 전통문화와 필적이 깃든 자연물에 대한 관심과 되새김이 필요해 보인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