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춘 할머니 네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을 안노인들은 날만 새면 그 집 대청마루에서 여름을 났다. 그 집을 드나들던 할머니들 손에는 귀한 주전부리들이 들려있기도 했다. 집집마다 종이부채로 견디던 시절 그 집 마루에서는 저 혼자 바람을 일으키는 선풍기가 돌아갔다. 할머니들이 마루에 빙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민화투를 치는 진종일 선풍기는 쉬는 법이 없었다. 마루를 가득 채운 할머니들에게 골고루 바람을 나눠줘야 했으므로 선풍기는 항상 회전을 했다. 사이사이엔 마당에서 뛰어놀다 더위에 지친 어린 우리들도 끼어 있었다.
선풍기가 내 얼굴을 한 번 쓱 스쳐가고 나면 다시 선풍기의 방향이 나를 향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세월처럼 지루했다. 얼굴이 여러 개 달린 선풍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어린 마음에 생겨났다.
일찍 혼자되신 오춘 할머니는 너른 집에 손주들과 함께 살았다. 아들 내외가 시내에 가게를 얻어 분가하면서 아이들을 맡겨둔 때문이었다. 덕분에 오춘 할머니 네는 할머니들의 사랑방뿐 아니라 동네 꼬맹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할머니는 꽃을 유난히 좋아해 골목과 대문 사이 네모모양 자투리땅에는 해마다 분꽃 씨앗 뿌리는 걸 잊지 않았다. 향기로운 분꽃이 피면 꼬맹이들은 그 꽃을 따서 대문 앞에 퍼질러 앉아 소꿉을 살았다. 넓은 마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채소밭과 꽃밭이 나란히 반반을 차지했다.
여름 마당엔 해바라기며 달리아, 백일홍 따위 키 큰 꽃이 많았고 옥수수며 들깨 온갖 채소도 우거져 있었다. 꼬맹이들은 꽃밭과 채소밭을 넘나들며 자주 숨바꼭질을 했다. 오춘 할머니가 남새밭이며 꽃이 망가진다고 호통을 내지르면 꼬맹이들은 우르르 도망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선풍기 앞으로 몰려들었다.
오춘 할머니네 우물은 얕고도 시원했다. 우물이 없는 옆집에서는 항상 오춘 할머니네로 물을 길으러 다녔는데 여름에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게다. 날마다 김치통이 드리워있고 어쩌다 새끼줄에 묶인 수박이 담겨 있기도 했으니 그것들을 피해 가며 조심조심 두레박을 내리고 물을 길어야 했던 탓이다.
우물 속에서 나온 열무김치는 서늘해서 입맛 없는 여름에는 제격이었다. 대청마루에 모인 안노인들은 점심때가 되면, 커다란 양푼에 우물에서 갓 꺼낸 열무김치와 살강 위 대소쿠리에 식혀 놓은 보리밥과 고추장을 듬뿍 넣고 한데 비볐다. 마지막엔 오춘 할머니 텃밭에서 나온 참기름도 한 방울 들어갔는데 그 고소함에 반해 눈치 없는 꼬맹이들이 숟가락을 먼저 들이밀곤 했다.
여름내 잘 돌아가던 선풍기가 말썽을 부릴 때가 있었다. 되짚어보면 하루도 쉬지 않고 회전을 하며 마을 안노인들의 땀을 식혀주었으니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선풍기를 고치러 보낸 얼마 동안 할머니들도 꼼짝없이 부채질을 하느라 팔을 쉴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는 화투 패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연신 부채질을 하다가 차례가 돌아오면 부채를 내려놓고 화투장을 내놓고 집어가곤 했다. 부채질로는 더위가 가시지 않는 어느 오후 오춘 할머니는 아이들을 불러 점방에 얼음을 사러 보냈다. 꼬맹이들이 낑낑 거리며 심부름을 다녀오는 동안 마루에는 우물 속에서 건져 올린 수박이 초록빛도 선명하게 놓여있었다. 꼬맹이들에겐 반으로 툭 자른 수박을 양푼에 퍼 담고 설탕과 얼음을 넣어 휘휘 젓는 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물 한 방울 남김없이 싹싹 비웠던 어린 날의 수박화채는 고장 난 선풍기가 준 선물이었다.
오춘 할머니네 꽃밭도 선풍기도 시들해지는 날이 있었다. 그 집 언니들이 유난히 심술을 부려 꼬맹이들을 못 살게 군 그런 날이었을 게다. 그런 날은 우리 집 감나무 그늘이 꼬맹이들을 불러 모았다. 감나무 아래는 오래된 평상이 여름 내 놓여있었다. 꼬맹이들은 평상에 앉아 마당에 핀 봉숭아꽃으로 손톱을 물들이고 종이 인형을 오리며 놀았다. 평상에 햇빛이 들어오면 어른들이 평상을 들어 그늘 쪽으로 옮겨주었다. 가끔씩 평상 위로 감나무에 살던 송충이가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꼬맹이들에겐 송충이를 구경하는 일마저 놀이가 되어주었다. 감나무 그늘 아래는 바람이 시원했고 바람이 없는 날은 부채가 바람을 만들었다. 꼬맹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향해 팔이 떨어져라 부채질을 해주며 깔깔거렸다. 감나무 이파리도 팔랑거리며 따라 웃었다.
오춘 할머니도, 그 집 마루에 그득하던 안 노인들도 이미 다른 세상으로 떠나신 지 한참이 지났다. 열린 양철 대문 안으로 철철이 다른 꽃을 피워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잡던 그 집도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 그 자리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로 바뀌었고 주변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층수를 자랑하는 아파트촌이 되었다. 아파트 베란다를 올려다보면 에어컨 실외기가 빠짐없이 나와 있다. 우물을 갖지 않은 아파트에선 선풍기만으론 살 수 없다는 듯 집집마다 날개가 없어도 시원한 바람을 쏟아놓는 에어컨을 설치해 놓고 쾌적하게 여름을 난다. 점점 더워지는 지구별을 생각하니 오춘 할머니 네 마루에 떡 하니 자리하고 앉아 여름내 마을 안노인들의 더위를 식혀주던 선풍기와 감나무 그늘과 평상에 놓였던 부채가 참으로 고마운 것들이었다.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박월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