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부터 4월 28일까지 제가 근무하는 대학의 HK+사업단에서는, 근대 일본을 이해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기획의 일환으로 히로시마 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히로시마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우리에게 가장 먼저 원자폭탄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 ‘리틀 보이(little boy)’는 무려 20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대미문의 비극이었습니다. 히로시마에 도착한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찾은 곳도, 그 날의 ‘원폭’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이었는데요, 평화기념자료관, 원폭돔, 추도기념관, 그리고 각종 위령비로 이루어진 평화공원은 무려 12만㎡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초대형 시설이었습니다.
수많은 구미(歐美) 관광객들과 곳곳에 설치된 위령비로 가득한 평화공원을 조금만 걸어도, 누구나 핵의 비극과 평화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저에게는 이 공간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원폭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이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어 충분히 공유되고 있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찜찜함은 얼마 전 장혜령의 ‘당신의 히로시마’(문학과사회, 2021년 겨울호)를 읽으며 느꼈던 것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히로시마’는 히로시마를 방문한 아흔 살의 김정순(金貞順, 일본명 가네모토 테이준)이 자신의 첫사랑인 하라 다미키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서간체 소설인데요. 하라 다미키는 히로시마에서 나고 자랐으며, 원폭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도쿄로 건너온 소설가입니다. 정순은 하라 다미키와 “평생에 한 번뿐일 사랑”을 나누었는데요. 그러나 그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며, 존재의 벽을 뛰어넘지도 못했습니다.
이유는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당신은 이제 죽어도 되잖아요. 뭘 더 머뭇거리는 거죠”라는 냉소의 말을 스스로에게 던지고는 했던 하라 다미키가 원폭의 기억에 갇힌 수인(囚人)이기 때문입니다. 하라 다미키는 ‘나’와 대화를 나눌 때면, 늘 “당신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죠.
결국 히로시마의 상처로 혼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던 하라 다미키는 자살하고 맙니다.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던 정순은 비록 연인이기는 했지만, 하라 다미키를 괴롭힌 원폭의 기억으로부터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정순은 귀국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원폭의 기억과 관련하여 정순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하라 다미키의 모습은, 히로시마의 원폭을 다루는 일본의 태도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일본은 원폭 피해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한순간에 수만 명의 삶이 사라진 원폭 피해는 일본만이 경험했으며, 그 때의 끔찍함과 잔인함은 그 어떤 폭력과도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인 거죠.
이처럼 ‘원폭의 피해’를 유일한 것으로 절대화하게 되면, 원폭을 둘러싼 수많은 맥락과 사람들이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테면 원폭 이전의 침략전쟁으로 수많은 인류가 사망했다는 사실이나, 일본인 이외에도 20개국에 이르는 사람들이 히로시마에서 피폭되었다는 점 등이 충분히 사유될 수 없는 것이죠.
이와 관련해 ‘당신의 히로시마’에 등장하는 “조선인 박화자”의 존재는 참으로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박화자는 히로시마에 살다가 피폭되었으며, 이후 ‘원폭병’을 얻고 귀환하여 다른 피폭자들과 함께 합천의 요양소에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삶의 끝자락에 이른 박화자는 “히로시마를 한 번은 다시 보고 싶다”며, 아픈 자기 대신 정순을 히로시마에 보낸 것입니다. 히로시마의 원폭은 하라 다미키와 같은 일본인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도 향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히로시마는 결코 하라 다미키, ‘당신의 히로시마’일 수만은 없는 거겠죠.
그런데 ‘당신의 히로시마’는 또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가 원폭이 남긴 고통의 기억을 ‘일본인의 것’으로만 독점하는 것을 의미했다면, 두 번째 의미는 원폭에 담긴 응보의 의미를 ‘일본인의 것’으로만 되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평생 일본을 미워했던 정순의 아버지가, 히로시마 원폭 소식을 듣고서는 “몹쓸 인간들이 천벌을 받은 게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드러나죠.
그러나 이 말은 “그 몹쓸 인간들 속에 우리와 같은 조선인들이 있었음”을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실제로 히로시마 전체 희생자 중 10%가 재일조선인이었으며, 그들의 후손이 여전히 고통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히로시마는 결코, ‘당신의 히로시마’일 수는 없으며 히로시마에 살았던 ‘모든 이들의 히로시마’일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당신의 히로시마’를 넘어 ‘우리의 히로시마’가 될 때, ‘히로시마의 기억’은 망각의 어둠 속에 사라지지 않고, 모두의 가슴에 남아 세계평화의 등불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평화기념공원 안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요. 높이 5미터에 이르는 이 한국식 위령비는 197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평화공원 바깥에 놓여 있다가 1999년에 이르러서야 재일한인과 여러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평화공원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원의 중심에서는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한 이 위령비는 역사적 기억을 나누어 갖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없이 웅변하는 듯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