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청송 홍원리 천연기념물 개오동나무 노거수
오동나무는 아니지만 오동나무와 비슷하다고 하여 개오동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잎이나 꽃의 생김새와 냄새가 오동나무와 비슷하고 목재도 오동나무처럼 윤이 난다. 습기에 견디는 성질이 강하여 가구나 악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것 또한 비슷하다. 둘 다 양지에 사는 속성수로서 수명이 짧은 선구성 하록 교목이다. 개오동나무는 능소화과로서 긴 콩꼬투리를 닮은 삭과의 길이가 20~35cm이지만, 현삼과의 오동나무는 둥근 콩 모양의 삭과가 5cm 정도로 완전히 다른 종류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수인 개오동나무 노거수가 경북 청송군 부남면 홍원리 547번지에 살고 있다. 나이 450살, 키 14m, 가슴둘레 4.25m로 민속문화와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12월 23일에 천연기념물 401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정월 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고 있는 귀한 민속 식물자원이다.
첫째는 청춘, 둘째·셋째는 부모님 나무
한 몸에서 태어난 가지가 둘로 나뉘어
욕심 많은 자식들 보는 듯 씁쓸한 심정
젊은 시절엔 우람하고 멋있었을 모습
자식 위해 무한한 사랑 쏟은 부모처럼
허기와 외풍으로 쓸쓸한 몰골이지만
마을 주민 지극정성으로 행복한 노후
화전등 마을 항일의병기념공원 방문
항일의병의 역사 발자취 더듬어 보며
부모세대 희생·우국정신 추모의 시간
개오동나무를 만나러 갔다. 마을로 들어가는 첫째 나무는 아직 젊은 청춘 나무이고 둘째, 셋째는 늙은 부모님이랄까 할아버지 할머니 나무이다. 나무의 모습에서 우리 세대의 부모님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세대의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무한한 사랑을 주시면서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입는 옷이며, 먹는 음식이며, 자는 잠자리조차 변변치 못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먼저 자식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근검절약하여 한푼 두푼 모든 돈은 모두 자식을 위한 일에 쏟아부었다. 문풍지가 떨면서 소리치는 추운 겨울, 따뜻한 방구들 아랫목은 늘 자식들에게 양보하고 자다가도 깨어나 포근한 솜이불을 자식 몸을 덮어주느라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끼고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만을 위해서 고집을 부렸다. 더 좋은 것, 더 풍족한 것을 원했다. 그러다 보니 늘 부모님을 원망하고 그 못남을 불평했다. 떼쓰고 대꾸하고, 심지어 울고불고하면서 항의의 표시로 입을 닫고 침묵하거나 심지어 가출까지 했다.
부모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는커녕 친구와 비교하고 이웃과 비교하면서 못난 부모님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고 가슴을 후며 파는 아무런 생각도 죄의식도 없이 막무가내로 철없는 행동을 해 댔다. 이제 속이 시꺼멓게 타버려 아무것도 내어줄 것도 없다. 개오동나무 노거수처럼 몸은 찢어지고 속은 텅 비었다.
개오동나무 노거수 역시 가지는 욕심을 내어 어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빼앗으려다 이제는 한 몸에서 태어난 가지가 둘로 나누어졌다. 꼭 자식들이 부모님 재산을 더 가지려고 싸움하다 의절한 것 같아 씁쓰레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노거수 또한 젊은 시절에는 우람하고 멋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몰골이 말이 아니다.
내어줄 것 아니 내어줄 것까지 다 내어주고 자신은 허기와 외풍에 견딜 수 없어 겨우 주민들의 외과 수술과 지팡이 선물의 도움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과거의 영광을 안고 추억하며 굳건히 살아가고 있다.
봄이 되면 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무더운 여름을 견디면서 가을이 되면 잘 익은 긴 콩깍지 탄생시킨다. 겨울이 되어도 긴 콩깍지 열매 떠날 채비도 하지 아니하고 나뭇잎처럼 끈질기게 매달려 있다. 어미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고 삭막한 겨울까지 부모의 품에 안겨있다. 오늘의 젊은 세태를 보는 것 같아 열매가 안쓰러움을 넘어 얄밉기까지 하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결혼과 출산을 늦추거나 부모님 품에서 살아가는 캥거루족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조어가 생기고 있다. 부모님은 노후의 자신 몸조차 보전키 어려운데 이 또한 무슨 업보란 말인가.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일제 강점기 시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나라도 개인도 곳간이 텅텅 비어 자력으로 어찌해 볼 도리도 없는 형국이 되었다. 침략자 일본은 시도 때도 없이 갖은 명목을 붙여 공출을 요구했다. 이 모두가 못 배운 탓이라 여기고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는 데 희생했다. 자신의 노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들이 성공하고 행복한 모습만 꿈꾸며 살아왔다. 장성한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며 안갚음에는 인색했다. 오히려 부담스러워하고 외면하기까지 하기도 한다.
노거수는 외세의 침략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민들은 노거수를 경외하면서 보살펴 주었다. 침략자들도 물러가고 우리 자력으로 국력을 키우고 살만해지니 이제는 노거수를 그전처럼 대해주지 않고 있다. 주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경제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눈치까지 주고 있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천연기념물 홍원리 개오동나무 노거수는 마을 주민들의 지극정성 보살핌으로 노후를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서울에서 고향인 청송 홍원리까지, 다시 대구에서 서울까지 걷으면서 길 위에서 만나는 서민의 이야기와 지난 역사를 오늘날 재해석한 ‘남듬길(進處道)’의 저자 조대환 변호사가 이곳 홍원리 출신이다. 험난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려 했던 조 변호사의 올곧은 애국충정을 책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자서전을 넘어, 권력과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인간적 고뇌를 깊이 있게 조명했다. 그의 부모는 자신의 중한 병을 돌아가실 때까지 숨기면서 자식이 나라의 공무에 전념하게 했다.
또한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심상택 이사장도 개오동나무 노거수를 보고 자란 홍원리 출신이다. 산림청 산림복지국장으로 재임 시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 한국산림문학회 활성화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상투를 고집하고 사신 분으로 ‘상투할배집’이라 불리었다 한다. 시골 농촌의 어려운 환경에 자식을 공부시키고 또 공무에 전념하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당연시한 이러한 힘은 지난 나라 잃은 슬픈 역사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우국 충절이 아닐까.
우리 부모 세대의 어르신들은 오천 년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분들이다. 보릿고개라는 헐벗은 삶 속에서 인재를 양성하여 산업화를 이룩하였고, 이어 민주화도 이루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양날의 칼처럼 좀처럼 양립하기가 어렵다. 이를 인재 양성으로 극복한 우리 부모 세대들의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지혜가 돋보인다. 나라 발전에 공헌한 돌아가신 어르신들에게는 영혼을 위로하고 살아계시는 어르신들에게는 예와 효를 다할 것을 다짐해 본다.
이웃 꽃밭고개라는 화전등(花田嶝) 마을에 항일의병기념공원이 있다. 적원일기(赤猿日記)라는 청송지역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의 진중일기가 청송에서 발견된 것도 우연만이 아닌 것 같다. 청송에서 공직에 근무할 때 항일 의병기념관 건립에 정성을 쏟았다. 청송은 자연도 수려하지만, 우국충정의 고장임을 새삼 느꼈다. 조대환 변호사 부모님 같은 분이 어디 한 분밖에 없겠는가. 대부분 부모님이 다 그러하실 것이다. 개오동나무 노거수를 뒤로하고, 아내와 함께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을 방문하여 항일 의병 역사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부모 세대 어르신들의 희생정신에 고개를 숙였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은…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 313-1에 위치했다. 2011년 전국 항일 의병들을 추모해 ‘항일의병기념공원’이 화전동에 세워졌다. 의병의 날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6월 1일이다.
2022년 1월부터 경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위탁 운영하고 있으며, 연락처는 054-870-6550. 입장료와 주차비는 무료다. 시설물은 창의루(倡義樓), 동재 인의예지재(仁義禮智齋), 서재 효제충신재(孝弟忠信齋), 충의사(忠義祠) 등. 2701개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무명의병용사충혼탑과 2개의 명각대(名刻臺)가 있다.
적원일기(赤猿日記)는 청송의진이 결성되기 직전인 1896년 3월 2일부터 본진의 활동이 종료된 5월 25일까지 85일간의 청송의병 활동을 김숭진(金崧鎭), 심의식(沈宜植), 오세로(吳世魯), 서효격(徐孝格) 등이 매일 상세히 기록한 진중일기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