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꽃을 예술로 승화시킨 명인 김자중<br/><1> 어린 시절과 지화를 만들게 된 계기
우리나라는 굿을 통해 동제(洞祭)를 지내는 풍습을 오랜 세월 이어왔다. 수심이 깊고 파도가 높은 동해안에서는 별신굿이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5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동해안별신굿의 한 요소인 지화(紙花, 종이로 만든 꽃)를 70여 년간 만들어온 김자중 선생을 댁에서 만나 어릴 때부터 지화를 만들게 된 계기와 동해안별신굿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김홍제(이하 제) :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김자중(이하 김) : 지화 만드는 걸 그만둔 지 좀 되었는데 지금이라도 지화를 만들 수 있는 기력은 있지요.
제 :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김 : 지금은 청하 용두리에 사는데, 태어난 곳은 흥해 대벌리(현 죽천리)였어요. 광복 후에 죽천초등학교(1940년 5월 개교)에 입학했고 8회 졸업생입니다. 할아버지는 굿판의 양중(兩中, 남자 악사)을 했고, 아버지는 한평생 한량과 어부로 사셨지요. 그 때문에 집이 가난했어요. 나는 아버지가 사십을 넘겨 얻은 늦둥이 외동아들로 자랐어요. 위로 형이 몇 명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는 바람에 외동이 되고 말았지요.
고모가 무당이었는데 ‘무숙’이라고도 하고, ‘간데기 무당’이라고도 했지요. 흥해, 청하에서는 꽤 유명한 무당이었어요. 내가 부산에서 자동차 수리 일을 하고 있을 때 고모가 같이 일하자고 꼬드겼어요. 아버지는 엄청나게 반대했고요. 당시에도 굿판에서 일한다는 건 사회적으로 인식이 무척 안 좋았거든요. 그래도 고모는 집요하게 아버지를 설득해서 결국 고모와 일을 하게 됐어요.
제 :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김 : 부산으로 가서 택시회사에서 일했어요. 자동차 시동을 걸 때 ‘스따찡’(자동차 엔진 스타터의 일본식 발음)을 돌려야 하는 시절이어서 기술 배우기가 엄청 힘들었지요.
제 : 그러면 굿은 언제부터 접하게 되었나요.
김 : 고모가 무당이었는데 이름은 김일향입니다. ‘무숙’이라고도 하고, ‘간데기 무당’이라고도 했지요. 흥해, 청하에서는 꽤 유명한 무당이었어요. 내가 부산에서 자동차 수리 일을 하고 있을 때 고모가 같이 일하자고 꼬드겼어요. 아버지는 엄청나게 반대했고요. 당시에도 굿판에서 일한다는 건 사회적으로 인식이 무척 안 좋았거든요. 그래도 고모는 집요하게 아버지를 설득해서 결국 고모와 일을 하게 됐어요.
제 : 고모님의 설득으로 굿과 인연이 되었군요. 선생님은 오랫동안 동해안별신굿의 지화를 만드셨는데, 요즘은 동해안별신굿을 보기 힘들지요.
김 : 아마 그럴 겁니다. 부산 기장에서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안 대부분의 마을에서 별신굿을 했어요. 별신굿은 ‘벨신’, ‘별손’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형편이 넉넉한 마을은 격년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 마을은 5년에 한 번씩 했어요. 굿이 열리면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3박 4일 했고요.
제 : 일반인들은 지화를 잘 모릅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지요.
김 : 지화는 굿판에서 생화 대신 종이로 만든 꽃을 말합니다. 원래 동해안별신굿에서는 지화를 많이 쓰지 않았고, 위령제인 오귀굿(오구굿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많이 썼지요. 예전 별신굿에서는 지화 몇 병을 만들어 제당인 굿청을 소박하게 장식했는데, 오귀굿이 점차 줄어들자 무당들이 수입을 늘리려고 별신굿에서도 지화를 많이 장식했어요.
제 : 선생님과 고모님에 얽힌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김 : 고모는 강신무(降神巫, 신이 내려서 된 무당)가 아니라 세습무(世襲巫, 조상 대대로 무당의 신분을 이어받아 된 무당)였어요. 동해안별신굿에서 강신무는 보기 어렵고 거의 다 세습무지요. 고모는 할아버지 영향을 받았는데, 포항 여남의 3대째 세습무 집안과 인연이 있었어요. 동해안별신굿이 1985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때 포항 여남 출신으로 부산 기장에 살면서 동해안별신굿을 한 김석출 씨가 전승 보유자로 선정되었지요. 그분의 호적(태평소) 산조가 아주 유명했어요. 김석출은 형과 남동생이 있었지요. 형은 김호출이고 동생은 김재출입니다. 삼 형제 모두 굿을 했는데, 남자는 지화를 만들고 굿판에서 장구, 태평소 등을 연주했어요. 고모는 김호출과 같이 살면서 세습무를 했지요. 김호출에게는 김용택이라는 막내아들이 있었고 나보다 여덟 살 아래였어요. 용택이는 초등학교 3학년만 다니고는 아버지를 따라 굿판에 나섰지요. 나와 용택이는 비슷한 시기에 지화 만드는 일을 시작했어요. 용택이는 장구를 비롯해 악기를 잘 다루었지요. 용택이도 삼촌인 김석출에 이어 동해안별신굿 보유자로 인정되었어요. 그런데 2018년 5월에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참 가슴 아픈 일이었어요.
제 : 고모님이 김석출의 형과 결혼하면서 선생님이 김석출 집안과 인연이 되는군요.
김 : 그렇게 되었지요. 원래 무속 일은 남녀 기본 2인 1조로 하고 큰 굿은 몇 팀이 모여 했어요. 당시엔 수입이 꽤 괜찮았고요. 고모는 김호출과 살다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헤어졌는데, 그 후로 독립해 굿을 생계로 살았어요. 굿판에는 준비 과정부터 일손이 많이 필요해요. 특히 굿을 할 때는 양중이나 화랭이, 즉 남자 악사 겸 조력자가 있어야 하는데 고모는 피붙이인 내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아무튼 고모가 몇 년을 졸라 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내면서 내가 고모 밑으로 들어가 일을 배우게 되었지요. 내 나이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제 : 지화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김 : 내가 만들어온 지화도 어쩌면 김석출 집안에서 내려오던 기술을 습득했다고 볼 수 있어요. 김호출이 지화를 참 잘 만들었거든요. 그때는 김호출과 고모 사이가 좋을 때라 김호출에게 지화 만드는 기술을 직접 배웠지요. 손재주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굿판에 필요한 지화를 만들려면 수천, 수만 번의 가위질을 해야 하는데, 나한테 남들보다 눈썰미도 있고 손재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만든 지화를 보고 김호출이 탄복했거든요. 가락에 맞춰 장구를 메는(장구를 친다는 경상도 사투리) 것도 내가 잘했지요. 나는 처음 굿판에서 일할 때는 비우(비위의 사투리)가 없고 남사스러워서 굿판에 얼씬도 안 했어요. 고모를 도와 지화를 만들고 굿판을 준비하는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지요.
제 : 남자가 그 나이에 지화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군대도 가야 했을 테고.
김 : 입대 영장이 나와 스물한 살에 입대했어요. 그때 부모님은 환갑이 넘었고 죽천을 떠나 청하 용두리에서 사셨지요. 일은 못 하고 면사무소에서 나오는 강냉이 배급을 타서 끼니를 때웠어요. 전쟁 직후 보릿고개가 있던,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지요. 제대 1년을 앞두고 휴가를 나왔을 때 고모가 아버지를 설득해서 장가를 들게 되었어요. 군복을 입고 경주에서 혼례를 치렀지요. 그런데 신부가 썩 맘에 들지 않는 겁니다. 게다가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귀대했는데, 신부가 고모와 다투고 집을 나가버렸다고 하더군요. 내키지 않는 결혼을 했는지라 솔직히 그 여자에게 정이 없었어요.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당시에는 호리호리하고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듣던 터라 여자 보는 눈이 높았지요.
제 : 선생님 삶에는 고모님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군요.
김 : 그런 셈이지요. 제대 5개월을 앞두고 서울에 있는 사촌이 편지를 보냈는데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바빠서 문상을 못 왔다는 겁니다. 아버지 부고를 그 편지로 알게 된 것이지요. 고모는 부대에 관보(기관으로 보내는 전보)를 보냈다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도착하지 않았어요. 워낙에 어수선한 시절이다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거죠. 대대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집에 왔더니, 아버지는 산에 묻히시고 어머니는 혼자서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어렵게 지내시더군요. 당장에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요. 그래서 귀대를 못 하고 고모를 따라다니며 본격적으로 지화를 만들고 굿판에서 일했어요. 나중에 부대에서 인사계가 찾아왔더군요. 사정을 고려해 다행히 탈영 처리는 안 되고 제대증을 직접 갖다주었습니다.
김자중 명인은…
1939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죽천에서 태어나 죽천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8세에 고모를 따라 동해안별신굿의 세습무가 일을 시작했다. 70여 년간 동해안별신굿을 장식하는 지화(紙花) 제작과 굿판의 양중(兩中)으로 활동했다. 은퇴 후 청하면 용두 2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2021년 12월 포항문화재단 주관으로 대안공간 298에서 지화 개인전(‘바다에 핀 종이꽃’)을 개최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