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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지화의 예술적 가치

등록일 2024-09-11 18:27 게재일 2024-09-12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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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꽃을 예술로 승화시킨 명인  김자중<br/>&lt;2&gt; 지화의 제작 과정과 종류, 그리고 가치
동해안별신굿의 한 장면.

지화는 예술작품으로도 훌륭하다. 가위와 손으로 한지를 수없이 자르고, 접고, 오려 붙이고, 하나하나 색을 입혀야 지화는 아름답게 피어난다. 따라서 굿청을 장식하는 지화는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배어야 한다. 굿판이 열리면 구경꾼들은 무당과 양중의 솜씨와 함께 지화를 평가하며 굿의 수준을 논했다. 물론 화주(굿을 맡긴 사람)의 돈 씀씀이에 달라지지만, 지화를 만들 때는 온 정성을 다해야 했다.

김홍제(이하 제) : 지화를 어떻게 만드는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자중(이하 김) : 지화는 원래 바닷가의 위령제에 많이 썼어요. 그 위령제를 수망(水亡) 오구굿이라 했지요. 바다에서 죽은 어부의 영혼을 불러내고, 좋은 곳에 보내주는 굿입니다. 동해안에는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많아서 굿이 많이 들어왔어요. 굿이 잡히면 우선 재료를 구하러 갑니다. 한지와 염색약이지요. 대개는 부산 범일동 시장으로 갔어요. 그리고 날짜에 맞춰 몇 날 며칠 지화를 만들지요. 자르고, 접고, 오려 붙이고, 하나하나 손으로 만듭니다. 지화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풀 먹임을 한 후 종류별로 색을 입히고 마당에 내놓아 햇볕에 색이 잘 들도록 말려야 합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서 두 명 이상이 하지요. 대개 부부가 같이합니다. 굿을 장식하는 굿청은 꽃이 병풍처럼 두르는 형태로 복잡하고 화려합니다.

지화는 원래 바닷가의 위령제에 많이 썼어요. 그 위령제를 수망(水亡) 오구굿이라 했지요. 바다에서 죽은 어부의 영혼을 불러내고, 좋은 곳에 보내주는 굿입니다. 동해안에는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많아서 굿이 많이 들어왔어요. 굿이 잡히면 우선 재료를 구하러 갑니다. 한지와 염색약이지요. 그리고 날짜에 맞춰 몇 날 며칠 지화를 만들지요. 자르고, 접고, 오려 붙이고, 하나하나 손으로 만듭니다.

보통 우리가 지화를 말할 때 한 묶음을 한 병이라고 표현하는데, 아홉 송이 또는 열 송이, 많게는 스무 송이 정도 됩니다. 이 한 병을 만드는 데 한나절이 꼬박 걸릴 때도 있어요. 굿청에 이런 지화를 스무 병 이상 장식하니 지화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되시겠지요.

김자중 명인이 만든 지화.
김자중 명인이 만든 지화.

제 : 지화의 종류가 다양할 것 같습니다.

김 : 전국화, 가시게국화, 청계작약, 추라작약, 다래화, 든불국화, 외든불국화, 매화, 산함박, 함박, 불도화, 외추라작약, 한지추라통, 반연봉, 연봉, 연등, 외박꽃, 강화, 허드레꽃 등등 셀 수 없이 많아요. 보통 우리가 지화를 말할 때 한 묶음을 한 병이라고 표현하는데, 아홉 송이 또는 열 송이, 많게는 스무 송이 정도 됩니다. 이 한 병을 만드는 데 한나절이 꼬박 걸릴 때도 있어요. 그리고 지화는 아니지만 굿판을 장식하는 제일 크고 아름다운 연등이 있어요. 신태집(신(神)광주리의 사투리)과 용선(龍船)도 아름답지요. 굿청에 이런 지화를 스무 병 이상 장식하니 지화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되시겠지요.

제 : 수망 오구굿에 지화를 많이 쓴다고 하셨는데, 오구굿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김 : 예전에는 뎅구리(머구리)나 목선에 장비가 부족해서 해난 사고가 잦았어요. 그래서 망자의 넋을 천도하는 위령제인 오구굿을 많이 했지요. 오구굿은 우선 바닷물에 들어가 망자의 넋을 달래고, 조상굿, 베리데기(바리데기)굿을 하지요. 오구는 바리데기 공주 설화에 나오는 저승 왕의 이름입니다.

제 : 바리데기에 대해서도 좀 더 말씀해주세요.

김 : 바리데기를 경상도 사투리로 베리데기라 했어요. ‘버린다’는 뜻이죠. 옛날에 딸만 여섯 낳고 아들을 간절하게 원하던 왕이 있었는데, 왕비가 또 딸을 낳자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베리데기입니다. 훗날 왕과 왕비가 불치병을 앓게 되자 여섯 딸은 아예 나 몰라라 했답니다. 그런데 베리데기 공주가 저승의 오구대왕(염라대왕)을 찾아가 저승 문지기와 결혼해 아들을 낳게 되었고, 오구대왕이 베리데기 공주에게 불로초를 주어 이승으로 돌아와서는 왕과 왕비를 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속에서는 바리데기 굿을 발원굿이라고도 하지요. 지역마다 다르지만 우리나라 거의 모든 굿에 펴져 있는 한국 굿의 원형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제 : 지화를 만들 때 특별히 염두에 두는 것이 있는지요?

김 : 지화는 대대로 전수되어온 기술을 몸으로 체득하고, 특히 손으로 익혀야 하는 어려운 작업입니다. 굿을 주문한 화주나 구경꾼들이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워야 하고요.

제 : 지화 중에 어떤 게 가장 아름다운가요?

김 : 나는 추라작약이 가장 아름답다고 봅니다. 추라는 종이를 잘게 썬다는 뜻이고 작약은 붉은 꽃입니다. 가위로 오려 잘게 썬 추라작약은 염색해서 꽃병에 담아놓으면 정말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 같아요. 추라작약의 꽃심은 꽃의 암술이나 수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지화의 가운데를 풍성하게 장식하지요. 또 살잽이꽃이라고 있어요. 이 꽃은 바리데기 설화에 등장하는 존귀한 꽃입니다. 불등화라고도 하는데, 만들기가 참 어려워요. 죽은 목숨을 살려낸다는 바리데기의 다부살이(다시 산다는 뜻) 전설이 담긴 꽃입니다.

제 :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지화 제작은 맥이 끊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제자는 있는지요?

김 : 나이 들면서 굿이나 지화 만드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어요. 정연락(동해안별신굿 전승 교육사)이라는 이가 지화에 관심을 가져서 지화 만드는 도구와 기술을 거의 다 전수했어요. 정연락이 내 제자라고 할 수 있지요.

제 : 과거에 굿 연구자들이 선생님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 : 1980년대에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교수들이 집이나 굿판으로 찾아왔어요. 지화 만드는 과정과 굿에 대해 많이 물어보더군요. 그 무렵에 정연락이 찾아왔지요. 경북대학교 최경희 교수도 자주 찾아왔고요. 한번은 최 교수가 외국인을 데려오기도 했어요. 내가 만든 지화를 촬영해서 프랑스의 유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하더군요. 대구의 한 화가는 지화를 본떠 화폭에 담아 유럽에서 전시했다는 소문도 들었어요. 내가 시골에 살다 보니 그런 정보에는 어두웠지요. 하지만 지화가 그런 방식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김자중 명인이 만든 지화.
김자중 명인이 만든 지화.

제 : 2021년에 포항문화재단 주관으로 지화 개인전을 하셨지요?

김 : 예, 그랬지요. 포항문화재단 관계자들이 찾아와 지화 전시회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군요. 손을 놓은 지 꽤 되었지만 마음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화 20여 개를 만들어 전시했지요. 작은 작품은 집에서 만들고, 연등과 용선처럼 큰 작품은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했어요.

제 : 굿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군요. 포항과 다른 지역의 굿이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만.

김 : 동해안 어촌마다 굿이 비슷하면서도 지역에 따라 무당의 사설과 노래가 조금씩 다르고 양중 또는 화랭이가 연주하는 박자와 춤도 차이가 있어요. 동해안 마을굿 중에서 포항의 흥해와 청하 굿이 가장 좋았지요. 전통이 잘 보전되어 있으니까요. 후포 삼율의 무당이 영덕과 울진에서 활동했는데, 뚱띠 무당이라 불렀어요. 가락이나 사설, 춤은 포항 무당에 비해 좀 떨어졌지만 사설할 때 촉성(초성의 경상도 사투리)이 좋아서 인기가 높았어요. 뚱띠 무당은 놋동이굿(별신굿에서, 무녀가 놋동이를 입에 물고 장군신을 모시는 굿)도 아주 잘했어요. 8단까지 쌓아 입에 물었지요. 강원도 임원, 호산, 삼척에서도 굿이 활발했어요. 북쪽으로는 강릉과 주문진 그리고 속초에도 강릉을 거점으로 굿을 하는 무당이 있었지요. 강원도는 가락이나 장구로 치는 드렁갱이 굿거리장단이 약했어요. 포항 무당들이 많이 가르쳐줬지요. 내가 젊은 시절에는 강원도 고성까지 불려 다녔어요. 강릉 단오제도 별신굿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도 강릉 단오제에 수없이 참여했어요.

제 : 이제 별신굿은 바닷가 마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죠. 하지만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예술공연으로 가끔 무대에 오르기도 합니다.

김 : 안동 하회마을에서도 별신굿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굿을 예전처럼 며칠씩 안 해도 사람들에게 이런 굿이 있었네, 하고 기억될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또 젊은 사람들이 국악을 배울 때 동해안별신굿도 배우는 모양인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담·정리 : 김홍제(소설가) /사진 : 김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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