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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마음껏 ‘아프다가’

등록일 2024-10-20 18:57 게재일 2024-10-2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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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한강,‘조용한 날들’ 전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오늘의 첫 대출 도서는 한강의 소설 ‘흰’이다.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 서점가는 물론 도서관의 풍경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한강 작품 찾아 읽기, 혹은 다시 읽기, 더해서 한강 작품 모아 읽기 등의 태그를 달아도 될 만큼 가히 노벨상 특수라 할법하다. 한강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시인이기도 하다. 작가의 등단 시는 ‘문학과 사회’에 실려 있는데 이후 발표된 시들을 모아, 한강은 첫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2013)’를 발간한다. 소설을 쓰는 중에 시를 써왔던 것들을 모아 출판한 것으로 작가에게 시와 소설의 경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듯하다.

한강의 시와 함께 소설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특히 한강의 시편들과 소설인 듯 시인 듯 장르의 경계가 모호한‘흰’과‘하얀 돌’의 색채 이미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실상 같은 돌이다. 마치 흰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에필로그처럼 읽히니 말이다.

이처럼 작가의 시적인 비유와 묘사의 문체, 색채 이미지는 한강 작품이 호소하는 인물들의 절망과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고유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강 작가의 문체는‘눈’같다. 작품 속에 ‘눈’의 이미지가 자주 나오는 것은 하나의 서사전략이다. 이미지는 감각에 의해 선취되는데 주로 시각 이미지에 집중되어 전개된다.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작가의 망설이는 듯한 느린 발화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조용히’그리고 천천히 읽어야 한다. 결코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는 발화는 있을 수 없다.

이희정 시인
이희정 시인

“오래전 그녀는 바닷가에서 흰 조약돌을 주웠다. 모래를 털어낸 뒤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서랍에 넣어두었다. 가끔 그것을 꺼내 손바닥 위에 얹어보았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속이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하지는 않았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소설,‘흰’에서‘흰 돌’부분)

작가는 무겁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말한다. 환부에 흰 연고를 바르고 흰 거즈를 얹는다고 훼손된 부위가 복원되기는 어렵다.

복원할 수 없는 세상보다 복원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촉각이 스며 있다. 고통과 상처의 촉각, 사랑의 촉각, 찢어지는 목소리의 촉각, 소리 없는 소리의 폭력이 감추어진 폭설의 촉각처럼 말이다.

“나는 조용히 있고 싶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작가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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