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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강백호’를 찾아서

이경재 교수
등록일 2025-04-16 08:29 게재일 2025-04-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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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재의 일본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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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램덩크’에서 강백호와 채소연이 마주 보는 장면으로 유명한 가마쿠라고교 근처의 철길 건널목.

세계에서 인정받는 일본문화로 만화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수많은 일본의 만화가 세계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통계에 의하면, 전세계에서 1년 동안 출판되는 일본만화가 대략 10억 부에 이를 정도라고 합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톰’이나 ‘코난’부터 시작해 최근의 ‘귀멸의 칼날’이나 ‘단다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본 만화가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저에게, 뻬놓을 수 없는 일본만화를 한 편만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농구만화 ‘슬램덩크’를 말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주간 ‘소년 챔프’에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되었고,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는데요. 당시는 신기를 펼치던 마이클 조던의 인기가 대단했고, 한국에서도 대학농구가 수많은 젊은이들을 경기장으로 끌어들이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마지막 승부’라는 농구드라마가 만들어질 정도였는데요. ‘슬램덩크’가 큰 인기를 끈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러한 농구붐도 한몫했을 겁니다. 

‘슬램덩크’는 강백호라는 빨간 머리의 문제아가 한 명의 어엿한 농구선수로 성장하는 간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성장 서사의 앞과 뒤에는 강백호가 채소연에게 던지는 “좋아합니다.”라는 말이 놓여 있는데요. 첫 번째 “좋아합니다”가 이상형인 채소연이 강백호에게 건넨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면, 두 번째 “좋아합니다”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에 나가면서 채소연을 향해 하는 말입니다. 처음 ‘좋아합니다’의 목적어가 농구보다도 채소연에 가깝다면, 두 번째 ‘좋아합니다’의 목적어는 채소연보다 농구에 가깝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강백호의 성장이,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슬램덩크’가 일본인론의 교재로 삼아도 손색없는 텍스트로 여겨집니다. 일본에 살면서 실생활이나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듣거나 보는 단어를 하나만 고르라면, ‘간바로(힘내자!)’라는 말을 꼽고 싶은데요. 일본인들은 굳이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일에도 꼭 ‘간바로’라는 말을 해서 긴장을 불어넣고는 합니다. ‘간바로’ 의식이 더욱 강렬해지면, ‘잇쇼켄메(一所懸命)’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는데요. 이 단어를 직역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목숨 걸고 해낸다는 의미입니다. 사무라이가 쇼군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것에서 비롯된 단어를, 일상에서 태연하게 사용한다는 것이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간바로’나 ‘잇쇼켄메’같은 단어들이 흔히 사용되는 것을 보면, 일본인들은 옛날 사무라이들처럼 자신의 임무를 목숨 걸고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슬램덩크’에서 감독인 안 선생님을 영감이라 부르고, 주장인 채치수를 고릴라라 부르던 자칭 천재 강백호는 ‘잇쇼켄메’는커녕 ‘간바로’에도 어울리지 않는 미숙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백호는 차차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것, 심지어는 자신의 (선수)생명까지 바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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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호가 다닌 북산고의 실제 모델인 가마쿠라 고등학교.

이런 모습은 해남고와의 시합에서부터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센터인 채치수가 부상으로 교체되자, 강백호는 채치수 대신 자신이 골밑을 지키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면서 강백호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해보일 테다!”라고 각오를 다지는데요. 이 대목에서 독자는 이전과는 달리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강백호의 어른스러운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간바로’의 모습이, ‘목숨을 거는 수준의 노력(잇쇼켄메)’으로 발현되는 모습은 산왕고와의 경기에서입니다. 산왕고와의 경기에서 후반전 2분을 남기고 힘들게 루스볼을 건져낸 강백호는 경기장 밖으로 넘어지며 등을 다칩니다. 이후에도 강백호는 부상을 숨기고 덩크슛을 넣으며 활약하다가, 결국에는 벤치로 물러나게 됩니다. 벤치에 쓰러져 있던 강백호는 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농구, 좋아하세요?”라고 말을 걸던 채소연의 모습과 2만 번이나 했던 슛 연습을 떠올리며, 안선생님에게 경기에 다시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강백호의 선수생명을 걱정하는 안 선생님은 강백호의 출전을 강하게 만류하는데요. 이런 안 선생님을 향해 강백호는 “선생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전 지금입니다.”라고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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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읽을 때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 몸에는 찌릿한 전기가 흐릅니다. 이러한 강백호의 투혼은 일본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잇쇼켄메’의 완성형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렇기에 누군가는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일본 역사상 최고의 무사로 꼽히는 미야모토 무사시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것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 1년간 머물게 되었을 때,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바로 ‘슬램덩크’의 배경이 된 가마쿠라 고등학교 부근이었습니다. 벚꽃이 만개한 4월 초순 드디어 답사를 나섰는데요. 다행히 도쿄에서 오다큐선을 타고 후지사와역에서 내린 후에, 쇼난 해변을 달리는 것으로 유명한 세 칸짜리 미니 전철 에노덴을 타자 1시간 반 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가마쿠라고교는 출입이 통제되어 벚꽃만 볼 수 있었지만, ‘슬램덩크’의 오프닝 장면으로 유명한 철길 건널목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습니다. 온갖 외국어가 들려오는 틈바구니에서 에노덴과 건널목의 사진을 찍으며, ‘슬램덩크’를 비롯한 일본 만화는 21세기 일본의 정체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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