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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도 희망과 연대를 꿈꾸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연결방법 모색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25-04-17 19:58 게재일 2025-04-18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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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펴냄, 나희덕 지음,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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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물질,/ 또는 시라는 물질에 대해 생각한다// 한 편의 시가/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시 ‘시와 물질’ 부분)

 

올해로 등단 37년을 맞은 나희덕 시인의 10번째 시집 ‘시와 물질’이 문학동네시인선 229번으로 출간됐다.

 

이 시집은 소외되고 침묵을 강요받은 존재들의 맨얼굴과 목소리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 무대와 같다. 거미불가사리, 닭, 지렁이, 버섯 등 비인간 존재들이 지구와 인간을 지탱해온 주인공이었음이 드러난다. 

 

시인은 인간이 잃어가는 생명과 연대 감각 회복이라는 과제를 위해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 시와 시인의 역할을 질답하며 서로 다른 존재들이 연결되는 방법을 모색한다. 

 오랫동안 시인들이 자연을 묘사하던 방식과는 달리, 이 시집은 자연을 확언하거나 진화생물학자의 관점을 따르지 않고 제3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박동억의 해설에 따르면, 이 시의 ‘사랑’은 인간의 실존을 초월하는 실존적 탐구다. 시인은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애쓰며, 사랑을 말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피와 같은 성분을 지닌 석유를 시추하기 위해 인간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모순을 고발하는 ‘피와 석유’, 제빵 공장에서 참담한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를 생각하는 ‘샌드위치’, 삶의 막다른 곳에서 자신의 장례 비용을 남겨놓고 스스로 숨을 거둔 기초생활수급자의 이야기인 ‘존엄한 퇴거’, 12·3 비상계엄 사태 전후의 여의도의 모습을 생생한 현장감을 더해 다룬 ‘광장의 재발견’ 들에선 시대를 향한 시인의 비판 의식이 각고히 벼려져 빛을 발한다.

 

암담한 현실에서 시는 무엇을 하는가. 표현의 도구로서의 언어를 넘어, 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힘이어야 한다는 인식은 그렇다면 시인은 어떠해야 하는가 묻는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다.

 

시인은 시대의 목격자이자 참여자이어야 하지만, 대출 담당자 앞의 시인은 무력한 시처럼 자신이 “국경을 넘어/ 돈을 물어 나르는 매개”에 불과함을 절감한다. 김광균의 시를 떠올리며 “은행에 대해서는/ 시 한 편 쓰지 못했다고 중얼거리”(‘시인과 은행’)는 시인의 모습은 드높은 이상을 꿈꿀 순 있지만 현실에서는 갈 곳을 잃은 현대인을 정확히 표상한다. 

한편 베트남 사공의 비참한 현실을 “좀 더 리얼하게/ 좀 더 예술적으로” 찍으려다가 핸드폰을 강물에 떨어뜨린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감상적인 동일시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강물은 배를 흔들어 손에 든 핸드폰을 삼켜버렸다”(‘강물이 요구하는 것’). 이처럼 시와 시인에게조차 성역 없는 묘사와 비판은 ‘시와 물질’ 속 순정한 목소리들을 귀 기울여 듣게 하는 바탕이 된다.

 

강고한 비판들을 목도하며, 과연 인간에게 어떤 대안이 있는지 막막해진 독자에게 ‘시와 물질’의 4부는 든든한 손길이 돼 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끝내 희망과 연대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고투가 독자를 맞이한다. “한 술 한 술 누군가 떠 먹이여 살아야겠다고”(‘이 숟가락으로는’) 결심하는 손으로 시인은 시집의 대단원에서 실테를 독자에게 건넨다. “세상에 무엇을 건넬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나희덕 시인이 그리는 삶의 자세는 인간을 포기하거나 인간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넓히고 인간 그 이상으로 다시 그리는 일에 가깝다. 시인이 ‘마음 한 조각’을 버리고 얻는 것은 다시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림이다. - 박동억 해설, ‘가없는 휴머니즘’

 

“살아 숨 쉬는 물질로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온몸이 귀로 이루어진 존재가 되고 싶었다. 경청의 무릎으로 다가가 낯선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시인의 말’에서)

나희덕 시인은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9년 중앙문예에 시 ‘뿌리에게’로 등단한 이후,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가능주의자’ 등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김수영문학상을 비롯해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삶과 인간,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사랑을 받아온 시인은, 세계의 균열을 간명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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