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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 위기 극복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자연 보호 상징으로

경북매일
등록일 2025-04-30 20:23 게재일 2025-05-01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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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안동 용계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노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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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댐과 용계 은행나무.

세상 사람이 “자연을 사랑하고 나무를 보호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를 실천한 사례 중에 세계적으로 모범이 될 우수한 사례가 있다. 바로 경북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744번지 외 8필지에 살아 있는 용계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상식(上植) 사업이다. 안동 임하댐 건설사업으로 용계리 초등학교 교정에서 살아가고 있는 은행나무가 수몰 위기에 처했다. 700여 년을 주민과 함께 한자리에서 묵묵히 살아온 은행나무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쳤다. 

 

아무리 거대하고 오래 살아온 나무지만, 인간들이 벌이는 정부의 사업에 어찌할 도리도 없이 속수무책이었다. 평소에는 마을의 안녕과 평화, 풍년을 위하여 은행나무를 수호신으로 모시던 마을 사람도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모두가 나무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야 꿀떡 같았으나 주민들이 이식할 그 많은 돈을 구할 수도 없고 구하여 옮긴다 해도 꼭 산다는 법도 없는 일이라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주민과 안동시, 경상북도는 한마음으로 십수 억 원의 돈을 마련하여 현재 위치에서 15m 높이의 공중으로 부양하는 상식사업을 추진하여 성공하였다.

 

수령 760살에 키 37m·몸 둘레 15m

우리나라에서 가장 덩치가 큰 나무

안녕·풍년 기원… 마을 수호신 역할

임하댐 건설로 물에 잠길 위기 직면

道·市·주민 한마음으로 십수 억 마련

15m 공중 부양 상식사업 추진 성공

안동 천연기념물 용계 은행나무는 조선 선조(宣祖) 때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역임한 송암(松巖) 탁순창(卓順昌)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곳에 낙향하여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은행계를 만들어 이 나무를 보호하고 친목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1966년 1월 13일 천연기념물 제175호 문화재로 주소 변동 없이 공중 부양하여 현재까지 30여 년을 건재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의 나이는 1966년도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 700살이라 하였으니, 지금은 760살이 되는 셈이다. 키 37m로 용문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다음으로 크고 몸 둘레는 15m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덩치가 큰 나무이다. 그리고 살면서 공중 부양하여 살아가는 나무는 세계 최초로 기록되어 영원히 그 타이틀을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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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되기 전 용계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화석식물로도 불리며, 행자목(杏子木), 공손수(公孫樹), 압각수(鴨脚樹)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용계 은행나무는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그에 붙어서 내려오는 전설 또한 다양하다. 은행나무를 심을 당시부터 주민들은 나무 아래 단(壇)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등나무를 마을 수호신으로 여겼다. 그후 ‘행계(杏契)를 조직하여 나무를 보호하고 주민들의 친목을 도모했다. 그러고 보면 탄생할 때부터 특별하게 대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나무를 중심으로 마을주민들이 뭉치고 단합하면서 마을의 발전과 평화를 나무에 기원하였다. 

 

이렇게 나무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생명 존중 사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은행나무는 나무를 뛰어넘어 마을의 구심점으로서 오늘날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이야 그때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 한다고 하지만, 그 우람하고 튼튼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심으로 마음이 안정되고 위로를 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음은 무엇 때문일까.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나와 같이 사람들이 나무를 보고 기도하고 있음이 그를 증명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을 때 이곳 출신인 석암 김도화는 영남지방 안동 병영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대를 조직하였으며, 이 은행나무에 붉은 깃발을 세워 북을 치면서 의병을 모집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의령의 곽재우 의병대장 역시 마을의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의병을 소집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나무는 그 위력과 상징성을 알 수 있다. 

 

나무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징병장이나 훈련장의 역할까지 대신했을 것이다. 또한 용계 은행나무는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그 예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될 때, 그리고 6.25 전쟁 당시 이 은행나무가 울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험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를 올리고 있음은 물론 이를 보러 오는 관광객이 함께 소원을 기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음은 나무에 대한 경외심의 발동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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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물든 계절의 은행나무.

1901년에 은행나무를 보호하고 송암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행정계(杏亭契)가 조직되었다. 안동 관내외 38문 중 480인이 참여한 이 계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는 도산서원 원장과 호계서원 수임을 역임한 지려 김상락(金相洛), 안기 현감 류치호(柳致浩), 석암 김도화(拓巖 金道和)와 탁순창의 후손들로 그 뜻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되어 행정계안(杏亭契案), 송암공약사(松巖公略史), 송암계안(松巖契案), 임원록(任員錄), 행정유계문록(杏亭儒契文錄) 등의 기록물이 전하여 오고 있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휘동(전 안동시장) 박사는 안동시장 재임 때에 용계 은행나무에서 채취한 종자 2000개를 받아 안동시 직영 양묘장에서 키운 후 시민에게 분양하였다. 이곳에도 몇 그루를 심어 용계 은행나무 제 2의 번성기를 기념하는 식수비를 2007년 4월 5일 세워놓았다. 

 

김휘동(金暉東) 박사는 자는 광서(光瑞), 호는 송암(松巖)으로 대통령비서실, 중앙부처, 경북도청 등 중앙과 지방에 근무한 사람으로 본향은 안동김씨이다.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특히 나무 사랑, 노거수 보호에 남달리 관심이 많아 관련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 실천한 행정가이기도 하다. 안동 소산마을을 생태마을로 조성한 장본인이다. 언젠가는 이 나무가 생명을 마감하겠지만, 그 후손 묘목들이 오랜 역사를 이어가며 우리 조상들의 나무사랑 실천을 기리는 모범 사례로 길이 남기를 희망해 본다. 

은행나무 상식(上植) 사업은…

위치 :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744 외 8필지, 면적: 3372㎡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상세 사유 : 임하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신목(神木) 및 천연기념물 보존 관리

공사 기간 : 1990년 11월 6일 ~ 1994년 10월 8일 (4년)

공사비 : 1,985,500천원

시공자 : ㈜대지개발 대표 이사 이철호

 

-내용

상식 높이 : 원 위치에서 15m 성토

상식 방법 : 특허공법인 요철 뿌리돌림 및 생명 토공법 사용, HB 공법 사용

 

-연도별 공사 내용

1차년도 : 1990년 11월 6일 – 1991년 1월 30일 뿌리돌림, 가지치기, 약제살포, 작업대 설치

2차년도 : 1991년 7월 10일 – 1992년 2월 15일 차수벽 설치. 방풍대 설치, 제방 축조

3차년도 : 1992년 3월 5일 – 1993년 2월 19일 겹봉짜기, 상식용 철골 제작, 상식, 관수시설 설치

4차년도 : 1993년 9월 7일 – 1994년 3월 8일 방풍 및 조경수목 식재, 관리사 신축

마무리 : 1994년 9월 – 1994년 10월 18일 주변 정리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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