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임줄은 악보에서 음과 음을 이어주는 곡선이다. 떨어져 있는 두 음을 부드럽게 잇는 이 작은 선은 잠시의 단절마저 노래로 묶는다. 음악을 그만둔 지 오래지만 나는 여전히 이 말이 좋다. 무엇을 이어 주는 마음 같아서.
3일의 여행 일정 중 첫째 날 일본의 오사카 도톤보리강 크루즈 위에서 나는 ‘붙임줄’을 떠올렸다. 반짝이는 간판들 사이를 거북목을 하며 헤매다 표를 끊었다. 어둠이 살며시 내려앉은 강 위로 크루즈가 오가며 환호와 함께 저마다 다른 언어들로 손을 흔들며 서로를 아는 척을 했다. 그 광경에 매료되어 남편과 함께 노란 배 위를 올랐다.
여기저기 익숙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한국에서 단체로 관광을 온 여행객들 사이에 우리 부부도 함께 자리에 앉았다. 승객은 모두 한국인. 낯선 건 오히려 유일한 안내자였다. 마이크를 든 일본 소녀 한 명은 나이도 많아야 스무 살 남짓, 노란 모자를 쓰고 눈웃음과 입웃음을 잃지 않는 너무도 해맑은 일본 소녀였다.
“곤니치와”
또렷한 인사와 함께 그녀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물론 일본어였다. 아무도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별로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았고 표정이 바뀌지도 않았다. 손짓을 섞어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했고 큰 소리로 박수를 유도하고 웃음으로 몸 언어로 반응을 끌어냈다. 마치 혼자서 공연을 하기라도 하는 듯 배 위는 점점 밝아졌다.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안에 담긴 표정과 억양은 분명했다. 설명이 아니라 그녀의 정서가 전해져 왔던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분위기였다. 그녀가 웃으면 우리도 따라 웃었고, 그녀가 손을 흔들면 모두 따라 흔들었다. 통역은 없었지만 서로의 마음에는 무언가가 연결되었다. 나는 그 가느다란 연결감을 ‘붙임줄’이라 부르고 싶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같은 배를 타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시간, 어떤 연결은 말이 없어도 이루어진다. 꼭 알아듣지 않아도 좋았다. 감정은 언어보다 오래 머물러 있기에 그녀의 감정은 배를 탄 사람을 넘어 다리 위를 걷는 사람, 거리를 걷는 사람, 소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이에게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이음을 만들었다.
배는 도톤보리의 물길을 따라 조용히 흘렀고 사람들 얼굴엔 하나씩 미소가 피어 있었다. 일본 소녀는 마지막까지 인사를 잊지 않았다. 두 손을 꼭 모은 채 눈을 맞추며 내리는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의 진심은 그 순간 누구에게나 닿았을 것이다. 우리가 보내준 박수와 환호 또한 말보다도 더 많고 깊은 것으로 그녀에게 전달되었으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도, 수많은 인파들 속에 섞여 있던 소음도, 강 위를 미끄러지던 배의 진동도 아니었다. 나의 기억을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은 언어가 아닌 마음으로 이어졌던 그 시간이었다. 스쳐가는 만남이었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낯선 이들의 진심과 웃음이 있었고 얼마든지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삶의 철학이 있었다. 그것은 여행이 내게 준 큰 선물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후 버스에서 옆 사람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괜히 미소를 지었다. 별일 아닌 그 장면에서 도톤보리강의 밤이 떠올랐다. 말없이 마음이 닿는 순간들, 그저 스쳐가는 인연도 조용한 선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여행에서 배웠다. 마음을 열면 언어가 아니어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붙임줄은 단지 음과 음을 잇는 기호가 아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는 그 크루즈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언어와 언어를 잇는 부드러운 곡선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 다정한 연결, 마음이 먼저 닿는 길이었다. 마치 붙임줄처럼 다르고 낯설었던 존재들이 순간적으로 한 장의 악보가 되어 내 삶 속에서 잔잔한 멜로디로 흘러 이어질 것이다. 오래도록.
/ 김경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