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는 에도(도쿄의 옛날 이름)의 출판왕이었던 츠타야 쥬자부로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데요. 고아같은 처지로 요시와라 유곽(吉原遊廓)에서 나고 자란 츠타쥬가 어떻게 당대 최고의 지성인과 예술가들을 거느리고 그토록 대단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츠타쥬는 다름 아닌 요시와라에서 나고 자랐기에 ‘에도의 출판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시와라는 분명 유흥가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습니다. 아사쿠사 북쪽의 밭 가운데에 흙을 쌓아 건설된 요시와라는 가로 약 360미터, 세로 약 270미터인 사각형의 인공도시였습니다. 요시와라 유곽 앞에는 新자가 붙기도 하는데요. 이유는 1617년 닌교초 부근에 처음 생겼던 요시와라 유곽이 화재로 인해 1657년 아사쿠사 북쪽으로 옮겨왔기 때문입니다. 대로에서 S자로 휘어 있는 90미터 길이의 고짓켄미치를 지나면 요시와라 정문이 나타났습니다. 요시와라에는 수천명의 유녀(遊女)를 포함해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았으며, 유녀와 남성들을 연결하는 찻집과 유녀들이 머무는 기루 이외에도 각종 장신구나 화장품 등을 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요시와라는 에도에서 불야성을 이루던 유일한 곳으로서, 일종의 별천지였습니다. 이 곳에서는 각종 퍼레이드나 공연 등의 이벤트가 벌어졌고, 거리나 시설도 최고로 화려하게 꾸며졌습니다. 이 곳의 번성함은 당시 막부(무신 정권의 통치기구 또는 그 체제)가 에도에서 걷는 세수의 8%가 요시와라에서 나온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시와라에는 문학, 음악, 예능, 다도, 춤 등 에도 문화 거의 전부가 집결되어 있었으며, 그렇기에 호세이대학 총장을 지낸 다나카 유코는 ‘유곽과 일본인’(고단샤, 2021)에서 “요시와라 유곽의 소멸은 역시, 에도 문화의 소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또한 요시와라는 살롱이 없던 에도에서 살롱의 역할을 떠맡기도 했습니다. 이곳에는 다이묘, 무사, 상인, 쵸닌과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에도 시대의 엄격한 신분 질서도 엄격하게 작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요시와라말이 따로 있을 정도의 독특한 문화적 별천지였던 것입니다. 유녀들도 단순한 창부와는 차원이 다른 문화인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전설적인 오이란(최상위 지위의 유녀)이였던 다카오를 모신 다카오이나리 신사가 지금도 도쿄에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바로 이 요시와라에서 나고 자라며, 츠타쥬는 에도의 첨단적인 유행과 감각 등을 익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화의 첨단지 요시와라가 츠타쥬를 기른 것처럼, 츠타쥬 역시 수많은 콘텐츠를 통해 요시와라의 이미지를 더욱 풍요롭게 창조했는데요. 츠타쥬는 1773년에 요시와라 정문 앞에 경서당(耕書堂)이라는 서점을 내고 처음에는 책 대여를 했지만, 곧 본격적인 출판에 나섭니다. 이 시절의 서점은 단순하게 책만 파는 곳이 아니라, 책의 출판, 유통, 판매를 모두 겸하는 일종의 출판사였습니다.
츠타쥬가 출판업에 처음 뛰어들어 만든 것은 요시와라 가이드북으로서, 츠타쥬는 이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안내서가 정보의 전달에만 치중했던 것과 달리, 츠타쥬는 요시와라 안내서에 약도 등을 집어넣어 현장감을 극대화하였으며, 첫번째 출판하는 책에서부터 다재다능한 유명인 히라가 겐나이(1728~1780, 에도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림)의 서문을 수록해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책에서는 최고의 화가를 고용하여 유녀들을 꽃으로 표현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츠타쥬가 출판한 책으로 샤레본(洒落本)이 있는데, 샤레본은 요시와라에서의 놀이와 익살을 묘사한 풍속책이었습니다. 또한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인 우키요에가 가장 많이 제재로 삼은 것도 역시나 요시와라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요시와라가 이상적이거나 바람직한 공간일 수는 없습니다. 요시와라는 쿠가이(苦界, 괴로움이 끊임없는 세계)로 불렸으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유녀들의 삶은 화려한 만큼이나 비참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녀들의 기본적인 고용조건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나는데요. 유녀들은 일단 업주들에게 거금의 빚을 진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유녀들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선지급된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유녀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경제적 조건으로도 이들은 요시와라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요시와라를 벗어나기 어려웠숩니다. 요시와라에는 출입문으로 ‘요시와라 정문’ 하나가 있었을 뿐이며, 유곽 주변에는 높은 담과 해자까지 설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처우도 열악하여 영양실조나 성병으로 요절하는 유녀들도 많았습니다. 유녀들 사이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었으며, 화대의 차이도 아주 컸습니다. 그렇기에 유녀들은 자주 목숨을 건 방화사건을 일으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습니다.
츠타주는 요시와라의 이러한 어둠까지 깊이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그가 만들어낸 콘텐츠에는 사회를 향한 불만과 풍자도 적지 않습니다. 요시와라와 츠타쥬의 관계는 “야만의 흔적이 없는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는 발터 벤야민의 명제를 곱씹어 보게 합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