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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품에서 자란 느티나무… 500년 역사와 품격

경북매일
등록일 2025-05-14 19:51 게재일 2025-05-1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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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고령 노곡리 느티나무 노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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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 다산면 노곡리엔 수령 500년이 넘는 거대한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다.

경상북도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3대 문화권이 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불교문화권, 안동을 축으로 한 유교문화권, 그리고 고령을 중심으로 한 가야 문화권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령의 가야 문화권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어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이 문화권은 태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 중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낙동강은 오랜 세월 동안 영남 내륙을 휘돌아 흐르며 수려한 자연경관을 창조함은 물론 영남의 젖줄로 곳곳에 기름진 땅과 생명이 깃드는 쉼터를 만들어왔다.

 

그 낙동강을 따라가다 보면 고령군 다산면 노곡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거대한 느티나무 노거수가 마을의 들판과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그 위용은 한눈에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낙동강의 생명력, 그리고 그 곁에서 반 천 년을 훌쩍 넘긴 삶을 지켜온 나무와 마을 주민들이 얽힌 이야기가 이 마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경상북도청 자연보호 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고령군 다산면 낙동강 변의 모래사장을 찾은 적이 있었다. 때마침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세계적 희귀종, 철새인 흑두루미들이 그곳에서 노닐고 있었다. 흑두루미는 시베리아와 몽골의 습지에서 번식한 후, 일본 가고시마의 이즈미 평야로 이동한다. 그 긴 여정의 오고 가는 중간 기착지 중 하나가 바로 이곳, 다산면 낙동강 둔치이었다. 

 

노곡리 ‘새창재’ 꼭대기에 뿌리를 내린

마을의 정신적 중심·수호신 같은 존재

반 천 년 동안 마을과 낙동강을 굽어봐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에서 더위 식히고

정월 대보름이면 나무에 동제를 올리며 

공동체 안녕과 마을의 풍년 농사를 기원

다른 새들이 숲속에서 짝을 지을 때, 흑두루미는 공중에서 사랑의 유희를 펼친다. 암컷이 먼저 날아오르면, 수컷이 그 뒤를 따라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 장면은 마치 고요한 자연 속에서만 펼쳐질 수 있는 신비로운 춤사위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흑두루미에게 먹이와 휴식을 제공하는 중요한 생태적 거점으로, 낙동강의 너른 둔치는 조용하고 안전한 환경 덕분에 해마다 수많은 철새가 찾아드는 생명의 오아시스이었다.

 

그 강을 바라보고 있는 고령 노곡리 마을 언덕 위에 우뚝 선 한 그루의 나무 앞에 섰다. 바로 수령 500년을 자랑하는 장수한 느티나무 노거수다. 1982년 10월 29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당시 이미 460년의 세월을 살아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지금은 500살에 이른 장수목으로, 다산면 노곡리 산 37번지, ‘새창재’라 불리는 구릉지 꼭대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주민들은 이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숲을 가꾸었고, 1986년 4월에는 이를 기념하는 표지석도 세워 두었다. 팔각정자와 풍경 조형물, 나무 의자가 설치되어 쉼터의 역할을 하며, 주위에는 15년생 느티나무 다섯 주와 배롱나무 열 주가 심겨 있어 노거수의 품격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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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곡동의 유래를 알려주는 비석.

느티나무는 누군가 마을 주민이 인공적으로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오랜 세월 고령의 바람길을 따라 계절마다 다른 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느티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마을의 정신적 중심이며 수호신 같은 존재다. 여름이면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나무에 동제를 올리며 공동체의 안녕과 마을의 풍년 농사를 기원하였다.

 

‘노곡동의 유래’에 “느티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유좌묘향(酉坐卯向)’이라 하여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는 형세다.”라고 했다. 느티나무를 ‘사정수(射亭樹)’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경치가 수려하고 바람이 시원하여, 이곳에서 활쏘기 행사가 자주 열렸다고 한다. 성주 목사가 행차 도중 이곳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지금도 나무 아래에 서서 들판을 바라보면, 주변의 형세가 한눈에 들어와 이 같은 전설이 과장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노곡리는 단순한 시골 마을을 넘어, 지형과 역사, 생태와 풍수의 의미가 어우러진 특별한 공간이다. 마을 입구에 ‘노곡동의 유래’가 새겨진 큰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비봉산의 맥이 동쪽으로 뻗어 멈춘 자리이자,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마을의 옛 이름은 ‘영천동(靈川洞)’이었으며, 이후 ‘백자촌(白子村)’으로 불렸다. 백 가지 약초가 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이 일대는 전국 향부자 생산량의 90%를 차지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향부자는 다년생 식물로, 뿌리를 약재로 쓴다. 은은하고 독특한 향 덕분에 한방차나 한약재로 귀히 여겨졌다. 고령 낙동강 변의 모래 둔치는 배수가 잘되고 햇볕이 풍부하여 향부자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노곡리는 자연과 생약이 조화를 이루는 풍요로운 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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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노거수의 웅장한 줄기.

500년을 살아온 고령 노곡리의 느티나무 노거수는 단순한 경관 물이나 쉼터가 아니다. 그것은 마을의 역사와 공동체의 삶을 지탱해 온 살아 있는 문화재, 자연유산이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마을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가 되며, 마을 사람들의 삶과 교류를 이어주는 중심이 되어왔다. 마을 주민들은 나무 아래서 힘든 삶을 내려놓고, 행복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왔다. 나무는 모든 계절과 시간을 견디며, 묵묵히 마을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느티나무 노거수 앞에 서니, 오랜 세월을 버티며 살아온 존재의 기품과 품격을 느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사람과 자연이 함께 써 내려간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했다. 경북 고령 노곡리의 느티나무 노거수는 우리에게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지혜와 경외심을 일깨워주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도 느티나무가 건강하게 오래 장수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쉼과 영감을 주는 노거수로 남기를 기원했다.

 

노곡동의 유래 

비봉산의 한줄기 맥이 동으로 달려 멈춘 곳과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서로 만난 곳이 노곡리인데 옛 지명은 영천동(靈川洞)이라 하였으나 그 후 백자촌(白子촌)이라 불렀으며, 백자촌이란 백 가지 생약이 생산된다고 붙여진 이름이며, 한약재인 향부자는 노곡리를 중심으로 전국의 90%나 생산되고 있다. 그 후 답곡동(畓谷洞)으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에 노곡동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산천 정기가 준수하여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에 앙심을 품은 어떤 사람이 산천 정기를 절맥하고 다녔는데 아시현 고개를 절맥 시 땀이 난다고 하여 땀고개라 불렀으며, 우리 동네 노현고개 절맥 시 이슬이 맺혔다고 하여 이슬고개라 하였고, 우리 동네 동편에 선달산이 있었는데 산이 서서 달아나 강을 막는다고 하여 못 가게 당겨 잡은 손자국 흔적이 바위에 남아 있었는데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손자국이 없어졌다.

 

노곡리 앞산에 수령 500년 정도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경치와 활쏘기에 너무 좋아 사정수(射亭樹)라고도 불렸다. 현재로서는 마을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있다. 옛날 성주 목사가 출두하면 사정수에서 쉬어가기도 했다고 하며 나무가 서 있는 방향이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고개 정상에 서 있어서 삼복더위에 노인들이 상의를 탈의하고 앉아보면 더위를 한 번에 식힐 수 있는 풍광이 좋은 절경이다. 동으로 낙동강이 마을 앞 들판을 감싸 기름지게 하며 마을 뒷산에는 중록당과 할매능이 있어 매년 정월 보름날 주민들의 마음을 모아 동제를 지내고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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